캐스커(본명 이준오)는 모비(Moby)와 마찬가지로 혼자 작곡, 연주, 믹싱, 프로듀싱을 모두 소화해내는 만능 테크노 뮤지션이다. 그는 원래 라디오헤드를 카피하던 인디 밴드의 기타리스트 출신으로 정점에 올랐던 '일렉트로니카 붐'이 한풀 꺾일 시점이었던 1998년 전자음악으로 진로를 수정한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상대적으로 뒤늦게 테크노판에 뛰어들었지만 그가 밟아온 길은 결코 후발주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단기간 내에 일본의 간판 디제이들과 함께 공연할 정도의 실력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일렉트로니카만을 전문으로 방영하는 인터넷 방송의 진행자로 활약할 정도로 주가를 상승시켰다. 현 국내 테크노 신을 견인하는 가재발, 프랙탈 등의 밴드도 당시 그와 무대를 함께 했었다.
실질적인 처녀작인 <철갑혹성>은 5년 동안의 지하칩거에서 벗어나 더욱 많은 대중들과 교신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음반이다. 앨범에는 언더에서 내공을 쌓으며 힘겹게 만들었던 13곡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음악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사실 이런 시도는 매우 위험하지만) '시부야계의 한국 버전'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시부야계란 첨단의 유행을 걷는 일본의 젊은이들이 많이 오가는 시부야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음악을 통칭하는 말로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음악을 가리킨다. 진지하지만 사뭇 밝은 톤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토와 테이(Towa Tei)의 음악을 많이 들었는지 몰라도 캐스커의 뮤직파일에는 시부야의 속성이 적지 않게 삼투되어 있음을 캐치할 수 있다.
앨범의 포문을 여는 'Cross the roads', 이소은의 3집에도 수록된 1103(불독맨션의 이한철이 스캣으로 참여했다) 등만 들어봐도 대강 감이 잡힐 것이다. 발걸음이 경쾌하고 날렵하다. 그러면서도 경박스럽지 않게 능숙한 템포조절이 이루어져있다.
전자음악답지 않게 따스한 인간미를 녹여내려 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사항이다. 애잔한 아우라를 잔뜩 풍기는 '철갑혹성', 헤이(Hey)가 보컬을 담당해준 'Vague'가 대표적인 곡들. 적절한 게스트 초빙과 보컬 변조로 곳곳에 포인트를 주면서 자칫 진부해질 수 있는 음악에 악센트를 심고 있는 모습이다. 특히 두 번 실린 'Discoid'의 리믹스 버전은 한국 테크노의 기수인 가재발과의 조인트가 이채로운 곡이다.
이제 유행이 끝난 일렉트로니카라 하지만 그의 음악은 이제부터가 시작인 듯 싶다. 비록 비옥하지 못한 국내의 토양이지만 유니크한 그의 <철갑혹성>이 팬들 사이에서 한 송이 장미가 피어 있는 B612로 기억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수록곡-
1. Cross the roads
2. 8월의 일요일들
3. 1103
4. Nowhere
5. Luna
6. Skip
7. 철갑혹성
8. Discoid
9. Crispy
10. Complex walkin'
11. Alice
12. Vague
13. Discoid (slick deep mix) - 가재발
14. Luna (the verdure mix) - skooolgirl a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