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음은 차갑다. 컴퓨터가 찍어내는 디지털 음은 정교하나 리얼 악기가 뽑아내는 울림과 따스함을 갖지는 못한다. 세기말을 맞아 붐을 이룬 일련의 테크노 밴드들은 화려한 소리 공세를 펼쳤지만 그 냉랭한 기운은 오래가지 못했다. 캐스커(Casker)는 역설적이게도 '따뜻한 전자음악'을 모토로 삼은 팀이다. 컴퓨터로 인해 메말라 가는 21세기의 현실을 컴퓨터로 치유하고픈 음악을 목표로 하고 있다.
두 번째 앨범 < Skylab >(2005)에서 그들은 멜로디를 강조한 전자 음악으로 그 온기의 실마리를 잡았다. 겹겹이 둘러싼 소리를 걷어내면 그 자체로 아름다운 발라드가 될 정도로 부각된 선율은 전자음의 차가운 인상을 지우는데 효과적이었다. 그 본바탕이 되고 있는 라틴 음악의 뜨거운 기운 역시 일등공신. '고양이와 나', '7월의 이파네마 소녀', '선인장' 등은 그 의도가 성공적으로 구현된 곡으로 라디오의 전파를 타고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는 사실 윤상과 웨어 더 스토리 엔즈(Where The Story Ends)가 이미 선보인 방법론이다. 허나, 윤상은 < There Is A Man.. >(2003) 이후로 신보 소식이 들리지 않으며, 웨어 더 스토리 엔즈는 'W'로 이름을 간략하게 줄임과 동시에 클래지콰이(Clazziquai) 풍의 가벼운 팝 음악으로 돌아섰다. 현재로서는 캐스커만큼 꾸준하게 양질의 전자음악을 선보이는 이들을 찾기 힘들다. 이것이 캐스커의 행보가 주목을 받는 이유이다.
3인조에서 사운드 메이커 이준오와 보컬 이융진의 듀오 체제로 변화한 세 번째 앨범 < Between >은 듣기 좋은 팝과 세련된 전자음의 만남이라는 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연주곡의 수가 줄고 보컬에 상당량의 비중을 할애한 만큼 또렷한 멜로디를 자랑한다. '모든 토요일'은 라운지 풍의 음악으로 보사노바의 부드러움을 담아내었고, '정전기'는 전작의 '7월의 이파네마 소녀'와 닮아있어 라디오에서의 러브콜이 예상된다.
일렉트로니카의 본령이 클럽임을 잊지는 않았다. 'Night people'은 불독맨션의 베이스 주자 이한주의 손을 빌어 넘실대는 그루브를 표현해냈으며, 'NU'는 공일오비(015B)의 신작에서 낯을 익힌 케이준(Kjun)이 랩을 맡아 흥겨운 클럽 분위기를 재현했다. 1집과 2집에서 다양하게 변주했던 'Discoid'가 그랬듯이, 리믹스 친화력을 가진 트랙들이다.
무엇보다도 앨범에서 도드라지는 부분은 남미 리듬을 차용한 곡들이다. 타이틀 곡 '나비부인'은 탱고를 기반으로 두터운 비트 속에서 아코디언과 피아노가 애상적 분위기를 환기하며, 이융진의 목소리에는 평소보다 힘이 실렸다. 조금 더 극적인 구성의 '인형' 역시 마찬가지로 볼륨감이 넘치는 사운드를 선보인다. 슬프지만 격정적인 춤곡, 탱고의 성공적인 변용이다. 전작의 'Tango toy'에서 느낄 수 있었던 이러한 변화는 앨범 전체의 이미지를 결정하고 있다.
공들인 흔적이 역력한 사운드는 홈레코딩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세련된 질감을 자랑하며 어느 때 보다도 집중도가 높지만, 프랑스의 일렉트로니카 밴드 고탄 프로젝트(Gotan Project)의 잔향이 짙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더욱이 싱글 위주로 재편되는 현 시장에서 머릿곡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요즈음, 캐스커가 해외 유명 밴드의 그럴 듯한 모사 정도로 치부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우리의 전자 음악이 서구의 감각에 뒤떨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앨범이다. 트렌드를 뒤쫓는 것이 아니라 함께 발맞추어 가고 있음에 더욱 반갑다. 여기에 캐스커는 따라 부를 수 있는 멜로디를 더해 나름의 영역을 구축해냈다. 기계음으로 가득하지만 난해하거나 어렵지 않고, 말끔한 카페와 들썩이는 클럽과도 어울린다. 팝의 따스함과 전자음의 냉철함을 동시에 취한 음악이다. '심장을 가진 기계 음악'이라는 홍보 문구가 무색하지 않다.
-수록곡-
1. Nuevo cancion
2. 인형
3. 가면
4. 모든 토요일
5. 나비부인
6. 정전기
7. 달
8. Night people
9. NU (feat. Kjun)
10. 말할 수 없는 이야기
11. Soul:free
12. 후유
13. 망부가(忘夫歌)
Produced by 이준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