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훈'의 이름이 주는 시장 파괴력은 확실히 죽었다. 가공할 만한 히트 연발과 그 이름만으로 몇 백 만장이 팔려나가던 시대는 지난 지 오래다. 특유의 필살의 멜로디는 변화에 대한 강박 탓인지 서서히 빛을 잃어가는 듯했고 결국은 '미소 속에 비친 그대', '널 사랑하니까'에 열광한 젊은 여성 팬들의 감수성을 끝까지 붙들지 못했다. 6집 이후, 이전의 감각을 회복하지 못한 그로부터 팬들은 좀 더 젊고 신선한 싱어 송 라이터들에게로 서서히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과거의 영광을 돌리는 건 차치하더라도 한 때 발라드 황제를 군림한 최소한의 체면치레가 관건인 듯 했다.
유난히도 많은 다른 작곡가들의 멜로디를 수혈 받은 9집에 있어서는 이젠 그의 선율이 다 한 것 아니냐는 조심스런 추측까지 나왔다. 광고에 삽입되어 히트한 '그대여서 고마워요'도 결국은 작곡가 박근태의 작품이었으니, 이런 의구심도 무리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수'이기 이전에 '작곡가'로서 인정받고 싶은 그였기에 섭섭한 마음은 더 컸을 터. 이쯤해서 그가 내놓은 타개책은 온전히 그의 음악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가 직접 쓴 음표들의 찬란한 휘광을 다시금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랑해도 헤어질 수 있다면'이 수록된 8집 < The Shin Seung Hun >의 '답습의 방법론'이 아니다. 무리한 욕구로 교착 상태였던 전작들과도 거리가 멀다. 표현은 좀 더 풍부해지고 살이 붙었으며 초점이 분명해졌다. 자신의 이름이 허용하는 한계 내에서 뿌리를 깊게 박고 있는 까닭이다. 역시 그는 타이틀 곡에서 모든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강력한 히트 싱글 하나로 승부하는 뮤지션이 아니다.
그렇기에 지금 전파를 타고 흐르는 'Dream of my life', 'Lady'만으로 < The Romanticist >를 정의하기엔 무리가 있다. 모든 곡들에 힘을 고르게 안배하고, 전 수록곡의 타이틀 화를 노린다. 그 역시 “전 곡이 타이틀 곡이다.” 라며 호언한 바 있다.
허나 그의 이런 호기와는 달리, 혹자는 '전설속의 누군가처럼'과 비슷한 패턴 탓에 'Dream of my life'에 지루함을 느낄 수 있고, 잔잔히 흘러가기만 하는 흐름에, 또 다시 신파적 감성을 건드린 'Lady'에 그다지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오랜 침체 속에서 다시 찾은 '신승훈 스탠더드 발라드' 'Lady'는 팬들이 듣기에 어쩐지 선율이 주는 '카운터 펀치' 한 방이 부족하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그는 이번 앨범의 모토를 '희망'이라 정한다. 호소력과 애절함을 거세한 '희망'을 부르는 '로맨티시스트(Romanticist)'. 그런 의미에서 '삶은 그대 편이죠, 눈부신 내일이 기다리겠죠'의 '신승훈 표 희망가' 'Wonderful world'는 앨범의 결정타다. 여유와 관록의 시선을 놓치지 않는 그의 보컬은 예전보다도 힘을 뺐으며 탄탄하다. 15년 경력의 가수만이 가질 수 있는 노련한 터치는 곳곳에서 발한다.
펑키(funky)감각의 전복적인 쾌감을 선사하는 '어디선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역시 마찬가지. '어긋난 오해', '내 방식대로의 사랑'의 2006년형 버전이라고 보면 정확하다. 그 때 그 시절의 톡톡 튀는 감성 그대로를 현재로 불러내고 있다. 진부한 기대를 무참히 깨버리는 '대단한 파격'만이 변화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오랜 시간동안 '슬픔'과 '눈물'로 호소한 '사랑과 이별 노래'에 그는 지쳤다. 이제 '대중'과 '뮤지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 곡예만을 하고 있는 그도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숨을 한 번 고른 앨범이다. 단 두 곡만은 다른 작곡가에게 할애했지만 여느 때보다도 그의 이름이 빛나는 것은 균형감각을 획득한데서 오는 자신감이다.
이제는 과연 그의 안경에 알이 있을까 없을까를 두고 내기를 하는 팬도, 사소한 몸짓에 울부짖을 센세이션도 더 이상은 없다. 하지만 16년이 지난 그의 감각은 < The Romanticist >에서만은 여전히 유효하다.
-수록곡-
1. Dream of my life (작사: 심현보 / 작곡: 신승훈)
2. 송연비가 (양재선 / 신승훈)
3. Lady (조은희 / 신승훈)
4. 시간을 뒤로 걸어 (김진용 / 신승훈)
5. 지금 만나러 갑니다 (조은희 / 신승훈)
6. 못된 기다림 (양재선 / 신승훈)
7. 그런가요 (양재선 / 김종익)
8. I luv U I luv U I luv U (최갑원 / 신승훈)
9. 아파도, 그래도... (양재선 / 인영훈)
10. 그랬죠 (심현보 / 신승훈)
11. 로미오&줄리엣 Ⅱ (김영아 / 이준호, 신승훈)
12. 어디선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심재희 / 신승훈)
13. Wonderful world (심현보 / 신승훈)
14. 어떡하죠 (천국의 나무 OST)
15. 그래도 사랑이다 (이 죽일놈의 사랑 OST)
Produced by 신승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