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년 만에 발표되는 체리 필터의 신보이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낭만 고양이'가 수록된 두 번째 앨범 이후, 그 연장선상에 있던 세 번째 앨범이 발표되는데 고작 한 해 밖에 걸리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밴드는 그 사이에 자신들만의 스튜디오를 확보했으며, 그로부터 오랜 시간을 두고 편안하게 작업에 임했다고 한다.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어느 정도의 변화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일 것이다. 무엇보다 눈에 띠는 변화는 '연주'가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물론 체리필터의 음악은 여타의 여성 보컬을 둔 그룹과는 다른 리프 위주의 강성 록에 기초하고 있었지만, 체리 필터하면 떠오르는 건 분명히 조유진 특유의 건강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 팔색조 보컬일 것이다.
조유진의 즐거운 샤우팅은 여전히 건재하지만, 기타의 디스토션과 리듬 파트의 볼륨이 그와 대등할 만큼 커졌다. 실제로 전 곡의 드럼은 일본에서 녹음했으며, 그런 리듬의 파괴력과 질감은 이전의 음악과 비교하여 가장 확연한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확실히 전작보다 강하고 거친 질감이 살아 있으며, 헤비메탈의 감성이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2,3집에서 보여준 친 대중적인 사운드보다는, 데뷔 앨범에서 보여주었던 보다 본격적인 록 사운드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타이틀곡 'Hapy day'의 피아노와 기타가 함께 하는 코드 진행과 경쾌한 비트, 조유진의 음성과 제목처럼 밝은 메시지는 모두 '낭만 고양이', '오리 날다'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겠지만, 상대적으로 어둡게 느껴지는 것은 그 연주가 보다 둔중하고 묵직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멜로디의 훅은 이전의 타이틀곡들에 비한다면 조금 아쉽다.
첫 트랙 'Revolution A.D'도 그러한 그룹의 노선 변화와 궤를 같이 하는 곡이며, 'Peace & rock'n roll'은 전반부의 스카리듬으로 재미를 보탠다. 'Melody'는 사운드와 곡의 분위기, 조유진의 보컬 스타일이 이전의 음악과 가장 유사한 곡으로, 특유의 유쾌하고 밝은 록 사운드가 잘 드러난다.
'유쾌한 마녀'와 '전장의 마돈나'는 곡목과 가사에서부터 조유진에게 초점을 맞춘 곡이다. '유쾌한 마녀'는 귀엽고 따사로운 전반부와 후렴부의 몰아치는 연주가 듣기 좋은 대조를 이룬다. '전장의 마돈나'는 잘 짜인 곡구성이 돋보이며, 왜곡된 그로울링과 직선적인 노래, 하드코어적인 랩, 폭발적인 샤우팅까지 조유진의 매력과 능력이 십분 발휘되어 있다.
'Posion apple'은 강력한 하드코어 사운드에 충실하며, 조유진의 색다른 면모와 체리필터의 근본을 확인할 수 있는 곡이며, 이어지는 '엑스트라 출동기'도 무겁고 건조한 사운드를 들려준다. 몽환적인 키보드의 울림과 빠르지만 차분한 비트가 두드러지는 '유리'에서는 트립합의 기분도 느낄 수 있으며, '틈'은 음침한 발라드이다.
작금의 오버 그라운드에선 다분히 모험적일 수도 있는 강도와 명도, 정서를 함유하고 있는. 더도 덜도 아닌 '록 앨범'이다. 워낙 사운드와 그룹 본연의 지향에 초점을 맞춘 앨범인지라, 귀에 선연하게 울리는 필살 멜로디는 찾아지지 않는다. 이전과 같은 대중적인 호응은 따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원래 한국인은 노래를 좋아하지, 연주를 좋아하지는 않으니까. 특히나 록은 영원한 아웃사이더니까.
(요새 그들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나오는 얘기인)'낭만 고양이', '오리 날다'를 잇는 '동물 시리즈'가 실리지 않은 것과 함께, 대중적 성공에 대한 부담도 줄어든 것일까. <평화와 록앤롤>이란 앨범 타이틀처럼, 자신들의 이름에 허용된 한계 안에서 가능한 '록'을 원 없이 해 본 앨범으로 다가온다.
-수록곡-
1. Revolution A.D
2. Peace n'rock n'roll
3. Happy day
4. Melody
5. 유쾌한 마녀
6. 전장의 마돈나
7. I stay here..
8. 끝나지 않는 이야기
9. Poison apple
10. 엑스트라 출동기
11. 유리
12. 틈(間)
프로듀서: 체리필터, INA, Murohime Shin, KO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