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8090
누구에게나 과거가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각자의 추억을 만들어간다.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났을 때 그것은 잔잔한 향수로 남게 되는데, 사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도 그리워지는 날들이 있게 마련이다. 초등학교 3학년생이 1학년짜리 동생을 보며 초등학생의 첫 봄소풍을 떠올리는 상황이 있다면, 그 꼬마에게 예전의 기억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애틋함을 자아낼지도 모른다. 그리움의 정도(精度)라는 것이 꼭 나이에 비례하지만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000년대를 사는 청춘에게 있어서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은 유년시절 향수의 근원지다. 철없이 뛰어놀 시절, 세상 모든 것에 호기심이 생기면서 눈여겨 바라 본 그 때의 현실은 순간의 이미지, 익숙한 소리, 아련한 향기가 모자이크처럼 연결되어 기억된다. 그래서 젊음의 끓는 피가 갈피를 잡지 못하며 회의에 빠져드는 찰나에는 과거의 무모했던 용감함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7080은 서서히 8090으로 이동한다. 이제는 엄연한 대중가수인 서영은이 두 번째 리메이크를 8090에 집중시킨 것도 그 이유다. 지금의 청년들이 더욱 예쁜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서영은은 그런 바람으로 그들이 어렸을 적 2, 30대를 동경하며 들었을 청춘의 음악들을 다시 불렀다. 타이틀곡으로 내세운 일기예보의 '좋아 좋아'부터 싱그러운 봄 내음을 닮은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 전형적인 90년대 스타일인 모노의 '넌 언제나' 등 자신도 모르게 따라 부를 수 있을만한 노래들을 선곡했다.
2. 어여쁜 신부
서영은 개인에게 있어서도 이번 수록곡 리스트는 한 번쯤 불러보고 싶은 레퍼토리였으리라 짐작된다. 1994년 데뷔하면서부터 재즈 가수로 더욱 인지도가 높았으니, 정작 부르고 싶었던 순수한 대중가요에 대한 갈증이 많았을 것이다. 이 음악들을 행복에 차서 불렀을 그녀의 환한 미소가 연상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영은이 오는 10월 재미교포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비 신부의 설렘은 이 풋풋한 사랑 노래에 담뿍 담겨 있다. '어여쁜 신부'의 이미지는 '내 몸을 감싸봐, 조금씩 나를 느껴봐'라든가 '오늘 너를 택했어, 나를 한 번 안아봐' 등 감각의 제국이 낳은 현재의 가사보다, '그 흔한 유희로 이 밤을 보낼 수도 있어, 하지만 나의 마음을 이제는 알아줬으면 해'('널 사랑하겠어')나 '어여쁜 꽃송이 가슴에 꽂으면 동화 속 왕자가 부럽지 않아요'('장미') 등 말 그대로 '착한' 이야기로 수놓아진 과거의 것으로 표현하기에 더 적합하다.
그러다보니 설득력이 더욱 강하다. 여름의 불쾌지수 때문에 누군가의 옷깃만 스쳐도 악연이 되곤 하는 요즘, < Romantic 2 >는 이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꼭 붙어 다니고 싶은 애심(愛心)을 자극한다. 특히 유열과 함께해 인기를 얻은 자신의 히트곡 '사랑의 찬가'를 깊고 부드러운 목소리의 소유자인 친동생 서유식과 부른 버전에 가서 그것은 절정에 달한다. 지금은 사랑의 계절이다.
3. 로맨스, 그 후
그렇다고 < Romantic 2 >가 이성에 대해 터질 것 같은 감성만 표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개똥벌레'다. 강력한 브라스 세션을 동원해 발랄하게 진행되는 연주와 달리 서영은의 목소리는 유독 쓸쓸하다. 듣기 편한 박자 덕분에 놓치고 있었던 '개똥벌레'의 슬픈 가사를 그녀는 자신의 음성을 통해 다시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그만큼 서영은은 유능한 가수다. 그녀가 이 앨범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든, 리메이크가 원곡이 가진 감성을 자신의 식으로 잘 소화해야 하는 것이라는 기본 전제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아쉬움은 남는다. '좋아 좋아'를 대표곡으로 내세우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저 방송에서 홍보될 수 있는 노래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모든 곡들이 각 시대를 대표하며,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본 것'이 아니라 가끔은 지겹기까지도 하다. 물론 전곡의 타이틀화는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것은 정규 앨범의 경우다. 리메이크라면, 조금 더 서영은의 감성을 잘 나타낼 수 있는 묻혀진 좋은 노래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다시 부르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까.
< Romantic 2 >는 소박하고 정갈하며 깨끗하다. 햇살이 들어오는 오후에 하얀 쌀밥이 소복이 담긴 밥상을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반찬은 식상하고 특별 메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 끼라면 기분 좋게 먹을 수도 있지만, 매번 같은 식이라면 사양하고 싶다. 과거의 기억이란 문득 한 번 떠올렸을 때 가치가 있는 것이지, 매일같이 곱씹고 있으면 병이 된다. 추억이 아닌 것을 추억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을 충분히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놓친 것이 안타깝다. '로맨틱' 시리즈가 어디까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혹 정규작에서라도 지나간 것을 돌이키려 하는 시도를 한다면, 서영은이 가진 품이 조금 더 넉넉해질 수 있었으면 한다.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더라도, 아름다운 노래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록곡-
1. 널 사랑하겠어 (작사: 김창기 / 작곡: 김창기)
2. 좋아 좋아 (나들 / 나들)
3. 칵테일 사랑 (김선민 / 김선민)
4. 그대를 만나는 곳 100미터 전 (노영심 / 이남우)
5. 넌 언제나 (장경아 / 박정원)
6. 산다는건 다 그런게 아니겠니 (조병석 / 조병석)
7.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오태호 / 오태호)
8. 개똥벌레 (한돌 / 한돌)
9. 장미 (김미선 / 이정선, 백순진)
10. 사랑할거야 (최봉 / 원경)
11. 사랑의 찬가 (이숙연 / 조성우)
프로듀서: 한성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