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때가 있었다. 마릴린 맨슨이라는 밴드가 세기말의 아이콘으로 인식되던, '자극'의 콘셉트가 곧 '충격'이라는 낙인을 찍을 수 있던 때가 말이다. 미디어에게는 오로지 비난의 대상이었을지 몰라도, 오컬트 팬들과 당시의 10대들에게만큼은 그는 곧 숭배의 대상이며 종교와도 다름없었다. 이 괴상한 그룹은 그렇게, 긍정과 부정의 자양분을 모두 섭취하며 무럭무럭 자라났다.
이것이 이 불길한 이름을 가진 밴드의 성장 배경이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음악도 음악이지만) 사회적 불안을 건드리는 남다른 감각이 있었기에 보다 큰 집중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역사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록 밴드들이 그러하듯, 이들 또한 사회적 맥락과 그 궤를 함께 한다.
이제 눈을 돌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인 2012년을 생각해보라.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빗나간 지 오래고, 세기말의 불안은 사라졌다. 세계화 현상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물론 포르노 산업에도 영향을 미쳤고, 우리는 웬만한 자극을 통해서는 충격을 받지 않는다. 이쯤에서 질문을 던져보자. '만약 당신이 그것을 그토록 잘 활용하던 마릴린 맨슨이라면' 이제 어떤 음악을 보여줄 것인가. 타개책을 내놓기가 쉽지 않다.
2003년의 < Golden Age Of Grotesque >이후 맨슨의 전략은 '힘을 빼자'인 것으로 보인다. 신보의 특이점이 있다면 (여전히 자극적인 면모는 있지만) 마릴린 맨슨이 그를 규정하던 충격의 화법에서 상당부분 벗어났다는 점일 텐데, 어떤 의미로는 이제까지 이들의 음반 중 가장 색다른 커리어로 다가오기도 한다. 만약 이것이 음악적인 면에서 전성기 이상의 커리어를 뛰어넘는 흡인력을 보여주었다면, 아마 맨슨의 최고작 리스트에는 < Antichrist Superstar >와 함께 < Born Villain >도 함께 이름을 올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싱글로 낙점된 'No reflection'을 포함, 모든 수록곡들을 들어봐도 예전만큼의 에너지, 혹은 멜로디 흡인력은 감지되지 않는다. 과거 'Irresponsible hate anthem'과 'Rock is dead', 'Disposable teens' 등의 곡을 통해서 알 수 있던 것은 이들이 어두운 곡에서도 댄서블한 후크를 뽑아내는 것에 능란한 그룹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들의 곡에서 그런 맛을 기대하기가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은 그룹이 새로이 돌파해야 할 약점으로 보인다.
그러나 '변화'의 영역에 초점을 맞춘다면 새롭게 꾸린 개인 레이블(Hell Inc)에서, 그것도 오랜만에 'Parental Advisory' 딱지를 벗어던지고 나온 < Born Villain >은 분명 그들의 디스코그래피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혼돈의 20세기를 지나 내성(耐性)의 21세기에 직면한 마릴린 맨슨, 신보는 시대의 틈에 끼인 그의 새로운 싸움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수록곡-
1. Hey, cruel world [추천]
2. No reflection [추천]
3. Pistol whipped
4. Overneath the path of misery
5. Slo-mo-tion [추천]
6. The gardner
7. The flowers of evil
8. Children of Cain
9. Disengaged
10. Lay down your Goddamn arms
11. Murderers are getting prettier every day
12. Born villain [추천]
13. Breaking the same old ground
14. You`re so vain (bonus tra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