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릴린 맨슨의 여섯 번째 스튜디오 작품 < Eat Me, Drink Me >는 외견상으로 몇 가지 변화가 감지된다. 우선 갖가지 기괴한 형상을 연출했던 예전 커버에 비해 옅은 화장과 얌전하게 검은 정장을 입은 미스터 맨슨의 모습이 눈에 띈다. 날 좀 어떻게 해달라(?)는 도발적인 타이틀과 비교해보아도 낯선 모습이다. 그리고 수록된 곡의 수도 대폭 줄었다. 리믹스를 제외하면 신곡은 단 열한 트랙. 물론 적은 수는 아니지만 한 장의 앨범에 기본적으로 15곡 정도를 빼곡히 담으며 규모의 만족감까지도 채워주었던 그가 말을 아끼기 시작한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마릴린 맨슨은 하나의 종교와도 같았다. 그가 아무리 위악으로 가득한 노래를 부르고 사회적으로 끊임없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낸다 하더라도 추종자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뒤틀린 몸짓 하나하나에 열광할 뿐이다. 이른바 '맨슨교'였다. 교주는 다름 아닌 미스터 맨슨. 그 광란의 열기는 평생 성사되지 않을 것 같던 2003년과 2005년의 내한 공연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다. 마치 신도들의 집회를 방불케 한 그 공연은 순결한(?) 동방예의지국을 마음껏 유린한 자리였다.
하지만 마릴린 맨슨도 사람이다. 지난 1999년 미국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에서 그가 정신적 주도자로 지목된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 있었다. 갖가지 추악한 범죄의 온상으로 치부되는 것에 지쳤는지 그는 직접 마이클 무어 감독의 영화 < 볼링 포 콜럼바인 >에 출연해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은 교주의 인간적 면모를 느낄 수 있는 사례이다.
이번 신보의 작업 중에도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부인 디타 본 티즈와 헤어지는 아픔을 겪은 것이다. 게다가 히트 싱글 'The fight song'을 작곡한 기타리스트 존 파이브 마저도 떠나보냈다. 그는 먼저 밴드를 떠난 트위기 라미레즈를 대신해 작곡 파트너로서 팀의 중추로 떠오른 인물. 가정과 밴드의 동반자를 동시에 잃은 마릴린 맨슨은 감정적, 음악적 변화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고, 남은 단짝 팀 스콜드와 함께 쓸쓸하게 할리우드의 스튜디오로 향했다.
그 결과 탄생한 < Eat Me, Drink Me >에는 화제와 이슈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수퍼스타의 외로움이 담겨있다. 밴드의 작품이라기보다는 마릴린 맨슨의 솔로 앨범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어느 때보다도 사운드는 가라앉아 있고 목소리에는 서글픔이 묻어있다. 인더스트리얼 메탈의 휘몰아치는 광풍도, 글램 록의 반짝이는 후광도 신작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발라드 앨범이라 부를 정도로 어둡고 침잠해 있다.
이 때문에 골수 마니아들은 발끈할지 모르겠다. 'Just a car crash away', 'Eat me, drink me'와 같은 곡에서 마릴린 맨슨은 농익은 보컬 연기력을 선보이지만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악한 교주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이들에겐 사회 비판의 날카로운 촉수를 거두고 내면으로 향한 밴드의 관심사가 영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다.
첫 싱글 'Heart-shaped glasses' 역시 기존의 잣대를 갖다 댄다면 턱없이 아쉬운 곡이다. 전체적으로 비감을 내뿜는 앨범에서 가장 가벼운 사운드를 가진 곡으로 초기의 강렬한 인더스트리얼 사운드를 희망한 팬들에겐 변절과도 같을 것이다. 앨범 말미에 실린 뉴웨이브 리믹스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낯선 첫 인상을 거둔다면 즐길만한 요소는 충분하다. 마릴린 맨슨 스스로는 새 앨범을 “기타를 기반으로 했으며 매우 멜로디가 강조된 앨범”이라고 평했다. 실제로 6분을 상회하는 오프닝 트랙 'If I was your vampire'를 비롯해 모던한 느낌을 주는 'Putting holes in happiness', 얼터너티브와 메탈의 경계를 넘나드는 'They said that hell`s not hot' 등 어느 한 곡이라도 수려한 멜로디가 빠지지 않는다.
맨슨은 “난 이 앨범이 내 개인적인 생활을 이용하는 것이 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그와 동시에 내가 누구고 무엇을 느끼는지 정확히 나타낸다”고 덧붙였다. 혼탁한 사회상을 비꼬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는 부드럽고 감성적 터치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 Eat Me, Drink Me >는 마릴린 맨슨의 디스코그라피에서 가장 이례적이면서도 가장 솔직한 앨범으로 기록될 것이다.
강경한 모습만을 보여주던 이의 갑작스런 변화는 당혹스럽게 마련이다. 현지에서도 별 한 개짜리 야박한 평에서 네 개의 후한 평까지 시선이 엇갈린다. 이럴 때는 대중의 평가가 가장 신뢰할만 하지 않을까. 대중들만큼은 쉽게 다가갈 수 없었던 교주의 살가운 변화에 마음을 연 듯하다. 첫 번째 싱글 'Heart-Shaped Glasses'는 이미 영국 록 싱글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고, 미국에서도 순조로이 차트 항해 중이다. 원래 남의 속내를 들쳐보는 것만큼 흥미로운 일은 없지 않나. 더구나 '교주' 마릴린 맨슨이라면.
-수록곡-
1. If I was your vampire
2. Putting holes in happiness
3. The red carpet grave
4. They said that hell`s not hot
5. Just a car crash away
6. Heart-shaped glasses (when the heart guides the hand)
7. Evidence
8. Are you the rabbit?
9. Mutilation is the most sincere form of flattery
10. You and me and the devil makes 3
11. Eat me, drink me
12. Heart-shaped glasses (when the heart guides the hand) - Inhuman Remi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