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적 매혹에 비해 감정적 몰입은 덜한 영화다.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남녀배우로 각광받는 조니 뎁(Johnny Depp)과 안젤리나 졸리(Angelina Jolie)의 만남을 마침내 성사시킨 캐스팅 파워에도 불구하고 두 배우의 또 다른 장기인 연기력을 제대로 조화시켜내지 못한 것은 굉장히 아쉽다. 두 매력적인 배우의 로맨스와 그들의 로맨스를 받쳐주는 매혹적인 풍광에 홀려 멍하니 지나가는 시간이 대부분일 게다. 이상한 만남에서 터무니없는 결말로 이어지는 이야기전개는 그냥 덤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졸리는 본연의 섹시한 도발적 자세를 제대로 보였음에도, 적재적소가 아닌 곳에서 제 기량을 다 발휘하지 못한 사람처럼 정적이고 활기 없게 보이는 뎁의 연기로 인해 결과적으로 균형감을 이뤄내지 못한 모양새다. 왠지 모르게 어색하고 구색이 안 맞는 느낌! 영국 경찰로 출연한 티모시 달튼(Timothy Dalton)과 폴 베타니(Paul Bettany)는 물론 영국인으로 출연한 루퍼스 시웰(Rufus Sewell)과 러시안 갱 두목 이반 역의 스티븐 베르코프(Steven Berkoff) 역시 표류하는 두 주인공들 틈바구니에서 자신들의 전형성을 극복하지 못한다.
음악은 원래 가브리엘 야드(Gabriel Yared)가 하기로 했다가 제임스 뉴튼 하워드(James Newton Howard)가 인계받아 작곡했다. 무도회장 시퀀스를 통해 야드의 풍부한 낭만적 음감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는 물론 마련되었다. 영화의 초반부터 역시 뉴튼 하워드답다는 감이 절로 들게 할 만큼 독특한 사운드 패턴과 메커니즘으로 귀를 사로잡는다. 추격의 박진감 넘치는 활력을 주입하는 동시에 부드럽고 풍부한 감성적 터치로 지속적인 낭만성을 유지하는 사운드스코어를 전자음과 오케스트라의 결합으로 완성해냈다.
일반적으로 제작자나 감독의 지향에 맞지 않을 경우 작곡가를 교체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가브리엘 야드(Gabriel Yared)에서 제임스 뉴트 하워드(James Newton Howard)로 교체된 것도 동일한 경우이겠지만 영화의 본원적인 풍부한 낭만성을 상호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했다는 점에서 둘은 연계는 긍정적이다. 여하튼 음악은 전반적으로 조니 뎁의 캐릭터를 위한 낭만주의적 경향의 만개와 안젤리나 졸리의 일상에 방아쇠를 당기는 서스펜스의 결합으로 시청자들이 감정을 이입하도록 돕는다.
그녀를 위한 풍취는 'Tracking elise'(엘리제 추적)와 'Burned letter'(편지 소각)에서 공개되고 한편 그를 위한 로맨티시즘은 'Paranoid math teacher'(편집증적인 수학선생)의 첫 소절에서 낭만적으로 묘사된다. 지속적인 긴장감을 주는 서스펜스 추격 음악은 <솔트>의 연장선상에서 별반 다를 게 없는 반면 로맨틱한 면이 더욱 특별하고 흥미로움을 자아낸다. 아코디언을 포함해 배경무대에 적합하게 감이 사는 이국적 악기편성에 적당한 순간에 감속하면서 효과음으로 동작에 맞는 유쾌한 추임새를 넣는 것까지 1960∼1970년대 동일한 장르영화를 되돌아보게 하는 고전적 기품과 현대의 세련미를 두루 갖췄다. 그의 음악이 주는 감정적 전조와 암시는 매우 효과적이다.
첼로와 시타르 중심의 현악위주 왈츠 곡을 쓴 가브리엘 야드에게서 이국적인 정취가 더욱 짙게 나타나지만 낭만적인 열정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두 작곡가의 음악은 서로 제휴한 것처럼 보인다. 단언컨대 <투어리스트>의 음악은 스파이스코어이자 매혹적인 로맨틱 스코어이다. 최근 <솔트> 이후 안젤리나 졸리와는 같은 작품에서 다시 만난 것도 관심을 끄는 대목. 배경에 맞게 유럽의 풍취가 휘도는 노래들을 배치한 것을 포함, 2006년에 나온 철지난 곡이긴 하지만 종영과 함께 영국록밴드 뮤즈(Muse)의 'Starlight'(별빛)을 포진시켜 희망찬 분위기를 가한 것도 상당히 괜찮은 선정이다.
<투어리스트>(The Tourist)를 만든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Florian Henckel von Donnersmarck)감독의 접근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범죄스릴러를 로맨틱코미디와 이종 교배시킨 작품은 파리와 베니스를 주요무대로 촬영되었고 미국 위스콘신에서 온 수학강사와 베일에 가린 매혹적인 영국여인이 관련된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그런데 문제는 플롯이다. 파격적이다. 가당치도 않게 엉뚱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관객들은 첫눈에 끌린 듯 서로에게 지분거리면서 농을 치는 두 배우들 간의 터무니없는 헛된 망상과 더불어 표류해야만 한다.
비밀스러운 여인의 자태를 과시하는 안젤리나 졸리는 정말 끝내준다. 그녀는 처음부터 살살 농을 치면서 유혹한다. 파리의 노변 카페에서 느긋하게 시작한 영화는 곧이어 추격전으로 전개된다. 졸리는 경찰들의 추적을 피해 급히 지하철로 빠져나가면서도 아주 침착하고도 도도한 면모를 잃지 않는다. 그리고는 밤샘기차를 타고 베니스로 향한다. 도중에 그녀는 자신으로 오인할만한 남자를 찾으라는 알렉산더의 지시에 따라 낯선 남자를 찍는다.
그 이상한 남자는 자신을 프랭크라고 소개한다. 열차 안에서 저녁식사를 나눈 프랭크와 엘리제는 자연스럽게 베니스의 최고급호텔에 함께 투숙해 하룻밤을 보낸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엘리제는 몸가짐에서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다. 지옥 불처럼 섹시하다. 오드리 햅번(Audrey Hepburn)이나 그레이스 켈리(Grace Kelly)의 고전적인 요염함에 필적한다. 졸리도 이를 알고 역할을 소화했을 것이다.
뎁은 친절하고 배려있는 도우미 역할을 자청하는 인물로 <샤레이드>(Charade)의 캐리 그란트(Cary Grant)를 연상케 한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문제를 대신 뒤집어쓰게 된 그가 우연히 만난 여인과 예전부터 알았던 것처럼 사랑에 빠지고 사건에 연루되는 것도 신빙성을 더한다. 원칙적으로 이 두 남녀는 익살스럽게 절제된 표현에 따라 재치 있고 불장난 같은 연애관계를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뎁은 여기서 전혀 익살스럽지 않다.
저속한 익살과 거칠게 밀고 당기는 장난 그리고 터무니없이 사실 같지 않은 상황들이 동원되는 희극적인 드라마 속에서 뎁의 연기가 빛을 발해야 옳다. 뎁은 그러나 너무 진지하고 뚱한 태도로 자신이 맡은 수학강사 역에 충실하다.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에서의 잭 스패로우 선장과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서 모자장수의 이미지를 생각한다면 적잖이 실망스러울 수 있다.
이야기구성은 알다시피 흔히 볼 수 있듯 신비에 싸인 남자 알렉산더가 암흑가의 폭력조직들로부터 거액의 돈을 훔쳐 잠적한 한편 그의 연인 엘리제을 통해 이를 밀반입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녀에게 베니스 행 열차를 타라고 지시하는 초반부터 런던경찰국에서 급파된 경찰들이 그녀를 미행하고 프랭크라는 이름의 미국인 여행객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연루되면서 금융 사기범 알렉산더를 체포하려는 바람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게다가 빼돌린 돈을 되찾으려는 러시아 암흑가의 보스와 그를 수행하는 암살자들까지 끼어들면서 국제적 절도범을 둘러싼 추격전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개된다. 베니스의 가옥 지붕 위로 쫓고 쫓기는 장면을 펼치고 열차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카지노에서 장면, 유명디자이너가 만든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그리고 모토보트 수상택시를 직접 운전해 운하를 관통하는 추격 등이 로맨틱한 무드와 아름다운 풍광 속에 연계된다.
그러한 가운데 <문레이커>와 <카지노 로얄>과 같은 007시리즈에서나 <더블스파이>(Duplicity) 그리고 <샤레이드> 등 고전풍 범죄스릴러물을 가장한 로맨틱 코미디물에서 익숙한 상투적 장면들이나 상황들이 연상되는 장면들도 자주 보인다. 보기에 따라 반가울 수도 진부하다는 불평을 털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조연들은 탁월한 남자배우들이 몰렸다. 그리고 이는 아무도 주목받지 못할 영화의 불운의 전조적 신호와도 같다. 영국 경찰로 등장한 폴 베타니와 티모시 달튼(4대 제임스 본드), 러시아 갱스터 보스 역에 스티븐 베르코프 그리고 영국인으로 출연한 루퍼스 시웰까지 영화의 주변을 겉돌기만 할 뿐 어떠한 목적의식도 없어 보인다. 정말 이름값 못하는 배역소화다.
가장 우울하게 만드는 요인은 카메라 배후에 얼마나 많은 재주꾼들이 이 영화를 위해 관여했느냐다. 각본 겸 감독 플로리안 헨겔 폰 도너스마르크는 <타인의 삶>(The Lives of Others)로 2007년 오스카 최우수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 각본의 크리스토퍼 맥쿼리(Christopher McQuarrie)는 <유주얼 서스펙트>(The Usual Suspects)로 오스카를 수상했고 줄리안 펠로우즈(Julian Fellowes) 또한 <고스포드 파크>(Gosford Park)로 오스카상을 거머쥔 실력파 인재다. 영화는 제롬 셀(Jerome Salle)이 쓴 프랑스영화에 근거했고 세자르(Cesar)에 수상후보로 거명된 있는 작품이다. <투어리스트>를 쓴 세 작가들 모두 그들의 수상경력을 버팀목으로 유용하려고 했던 것 같다.
플롯이 불합리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시종 몰아치는 논스톱 액션으로 애당초 가지 않았을 거면 스타일과 품위 그리고 농담이 적절히 배합된 각본과 그에 합당한 연출이 필요했다고 본다. 그나마 요부로 등장한 졸리만이 제 몫을 다한 것 같다. 급사할 지경의 성적매력을 발산한다. 뎁은 위스콘신 수학강사로서 지지부진한 면모 이상의 그 무엇을 보여주지 못한다. 다른 배우들은 그들의 전형적인 그늘 속에 가려있다. 연출을 한 감독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조니 뎁은 케리 그란트(Cary Grant)에게서 숙녀 다루는 법을 좀 배울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