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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st Century Breakdown
그린 데이(Green Day)
2009

by 배순탁

2009.05.01

그 방향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 수준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 4년 전, 한 편의 장대한 록 파노라마 < American Idiot >으로 지구촌을 강타했던 그린 데이(Green Day)의 2009년 신보 < 21st Breakdown >은 아찔할 정도로 명백한 걸작이다. 총 3부작으로 구성된 이 앨범은 펑크라는 장르의 극한을 실험하는 동시에 이 탁월한 재능의 밴드를 더 이상 펑크라는 족쇄로 재단할 수 없음을 명증하는 위대한 예시로서 일제히 찬사를 받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2004년에 선보인 < American Idiot >의 후폭풍은 어마어마했다. 12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고, 5개의 히트 싱글을 배출했으며 이듬해 그래미에서는 '최우수 록 앨범' 부문을 수상했다. 곡, 앨범, 그리고 작품성의 공인마크까지, 추수하지 못한 것이 없었던 환상적인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성과는 대표작 < Dookie >(1994) 이후 10년 내내 쇄락하고 있던 그들의 인지도가 다시금 최정상으로 복귀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린 데이의 이런 극적인 재도약을 짐작했던 이들은 거의 없었다. < Dookie >와 < American Idiot >이라는 두 봉우리 사이의 지층에서 그들은 도돌이표 위로 무망한 왕복달리기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히트 싱글은 가뭄에 콩 나듯 나왔고, 앨범 판매고는 바닥을 향해 하락을 거듭했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병폐들에 눈을 돌린 멤버들이 이 주제를 큰 스케일의 음악에 맞춰 잡아나가면서, 탈출구는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American Idiot >의 성공 요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본작 < 21st Breakdown >에서도 그린 데이는 < American Idiot >에 이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문제점들을 진단한다. 우선 '21세기 몰락'이라는 제목부터가 음반의 테마를 압축해 설명해준다. 3부작으로 나뉜 이 앨범의 주인공은 크리스찬(Christian)과 글로리아(Gloria)라는 남녀 커플이다. 1부인 “Heroes And Cons”에서 화자는 자신의 이름을 노 원(No one)이라고 규정하며 희망 없는 제로 세대(zero generation)에서 태어났음을 고백한다. 제목처럼 '영웅들과 보수주의자'들이 득실거렸던, 1969년이라는 사생아(bastard)와도 같은 시대의 자손으로서 허울뿐인 아메리칸 드림을 우렁우렁 외친다. 그래서 1부는 로큰롤과 미국 자유주의의 전성기였던 1969년을 현재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망가(挽歌)처럼 들린다.

2부인 “Charlatans And Saints”는 '허풍선이와 성인들' 사이에서 주인공들이 겪는 고통을 묘사하고 있다. 크리스찬은 '살인자들로 가득한 도시'에서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임을 깨닫고는 피 흘리고 있는 연인 글로리아에게 어서 도망가라고 재촉한다. 이후 기억을 지워버림으로써 마음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느냐고 묻더니, 결국 모든 인간들은 실패한 시스템의 희생양일 뿐이라고 절규한다. 마지막 3부작인 “Horseshoes And Handgrenades”에서는 정신병에 걸린 세계를 향해 저주를 퍼부으며 더 이상 현대에서 살기 싫다고 외친다. 그저 자그마한 빛을 보고 싶었을 뿐이라는 소망과 함께.

이런 다채로운 주제에 맞춰 수록곡들도 능란한 변주를 들려준다. < American Idiot >에서도 놀라웠지만, 이번 앨범은 그 이상이다. 게다가 너바나(Nirvana), 스매싱 펌킨스(The Smashing Pumpkins)의 프로듀서로 유명한 부치 빅(Butch Vig)이 지휘를 맡아서인지 좀 더 로큰롤의 본질에 가까워진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톤-다운되어있으면서도 파워가 넘친다.

첫 싱글 'Know your enemy'가 대표적이다. 우선 'American Idiot'과 비교해 확연히 헤비해진 리프가 인상적이다. 단 두 개의 리프만으로 듣는 이들의 감성 속으로 성큼 들어오는 일체적 연주를 통해 범상한 밴드는 꿈도 못 꿀 고차원의 영역을 시범한다.

이어지는 'Viva la Gloria'와 'Before the lobotomy'는 전작의 'Boulevard of Broken Dreams',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 등과 대차 대조될 그린 데이식 연가다. 두 곡 모두 모두 전반부와 후반부가 현격하게 대비되는 양식을 통해 긴장감을 고조하는 것이 특징. 속전속결의 게릴라 사운드를 지향한 'Christian's Inferno'는 스피디한 전개를 통해 후련함을 던져준다. 글로리아를 향한 크리스찬의 사랑 고백을 담고 있는 발라드 'Last night on earth'로 1부는 마무리된다.

'모두 손을 올려 저항을 준비하라'라는 구호로 출발하는 'East Jesus nowhere'는 썩어버린 기존 가치를 혁파하자는 하드코어 선동가다. 이 외에 초기 로큰롤 리듬과 스윙 무드를 연계한 'Peacemaker', 제목만큼이나 음반에서 가장 강렬한 노래로 꼽힐 'Murder city', 피아노 연주로 만들어낸 백 비트와 계단식 선율 진행이 돋보이는 'Viva la Gloria(Little girl)' 등이 2부를 장식하고 있다.

3부의 스타트를 끊는 'Horseshoes And Handgrenades'에서 그린 데이는 게이지를 한층 높여 장엄한 결말을 암시한다. 'The static age'도 마찬가지. 그러나 '21 guns'부터는 두 주인공의 여행이 비극적 드라마로 완결될 것임을 서서히 드러내는데, 주인공이 모든 것을 바친 사투가 결국 무위(無爲)였음을 사운드를 통해, 또 가사를 통해 말해준다. 첫 곡 'Song of the century'와 수미상관으로 매치되는 'American Eulogy', 서정적인 마무리 'See the light'로 앨범의 이야기는 종결된다.

< American Idiot >처럼 9분에 달하는 대곡은 없지만, 이처럼 본작 < 21st Century breakdown >은 한 덩어리로 접근해야 온전하게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로큰롤 에픽(epic)이다. 잉여의 사운드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 이 음반만큼 밀도가 높은 경우도 극히 드물 것이다. 또한 모든 곡마다 각기 다른 폭발력의 다이너마이트가 장착되어 있어 듣는 이들에게 격렬한 음악적 체험을 던져주는 앨범이기도 하다.

못 하나 박지 않은 채 세심하게 목재의 홈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튼튼한 집 한 채를 올리는 일류 목장(木匠)의 솜씨처럼,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구성으로 곡과 곡 사이를 절묘하게 얽어낸 솜씨도 감탄을 넘어 경기(驚氣)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설령 방향은 능히 짐작이 되더라도 셈과 여림의 호흡은 예측할 수 없는 특출한 밴드 하모니 덕분이다. 자연스레 그들이 예열 없이 곧장 불을 지르고 쾌속 질주하는 고전 펑크의 단면적 성취를 이미 오래 전에 훌쩍 뛰어넘었음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밑바닥에 남아있는 마지막 한 홉의 에너지까지 퍼낸 사운드는 록 본연의 볼트 높은 박진감으로 넘실거리고, 가사는 사실적 스토리텔링을 통해 메소드(method) 음악의 정점을 완성한다. 현대 사회에 만연해있는 폭력들에 반대하는 거침없는 분노와 그 뒤를 잇는 뼈아픈 성찰이 때로는 강렬하게, 때로는 절절하게 레코드의 전편을 흐르고 있다. 그래서 음반은 마치 그린 데이가 현대 사회라는 괴물을 향해 던지는 부고장처럼 읽힌다.

이처럼 시종일관 곡의 개성을 달리 가져가는 이 팔색조 앨범이 듣는 이에게 어떻게 작용할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린 데이의 웅대한 야망이 구체화된 이 작품은 섬광과도 같은 깨달음으로 당신의 현재를 흔들어놓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가사가 말해주듯, 치료제는 없을지언정 근래의 그 어떤 앨범에서도 경험할 수 없었던 강력한 각성제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2년이라는 시간을 송두리째 바친 이 절품(絶品)에 대한 박수세례가 벌써부터 훤히 다 들리는 것 같다. 이것이 바로 한 덩이 바위 같은 진골 밴드가 완성한 진정한 '앨범 미학'이다.

-수록곡-
ACT I - HEROES AND CONS
1. Song of the Century
2. 21st Century Breakdown
3. Know Your Enemy
4. Viva La Gloria!
5. Before The Lobotomy
6. Christian's Inferno
7. Last Night On Earth

ACT II - CHARLATANS AND SAINTS
8. East Jesus Nowhere
9. Peacemaker
10. Last Of The American Girls
11. Murder City
12. Viva La Gloria? (Little Girl)
13. Restless Heart Syndrome

ACT III - HORSESHOES AND HANDGRENADES
14. Horseshoes and Handgrenades
15. The Static Age
16. 21 Guns
17. American Eulogy
a) Mass Hysteria
b) Modern World
18. See The Light
배순탁(greattak@iz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