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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Diagrams
우탱 클랜(Wu-Tang Clan)
2007

by 김태형

2008.02.01

1993년 우탱 클랜(Wu-Tang Clan)이 등장했을 때, 흑인 커뮤니티 거리의 음악이면서도 동시에 동양의 신비주의를 표방하고 나온 이들의 랩뮤직은 '우탱 장르'라고 이름 붙일 만한 그들만의 스타일로 추종자들을 끌어 모았다. 쿵푸 무비의 샘플들과 연기가 자욱한 언더그라운드의 비트들, 마피아식 별명 짓기와 만화책에서 걸어 나온 캐릭터들처럼 개성이 뚜렷한 아홉 MC들의 집단 래핑, 범죄지역에서의 삶과 죽음에 관한 금언과도 같은 압축된 라임 스타일. 이 모든 것은 90년대식 쿨(cool)함의 발견이자 힙합의 확장된 가능성이었다.

그리고 15년의 세월동안 우탱의 표식(W)을 내건 앨범들이 쏟아져 나왔다. 정규앨범과 정예멤버들의 솔로앨범만 줄잡아 추산해도 35장. 연계된 패밀리들의 앨범과 사운드트랙까지 합치면 그 수는 몇 배로 늘어난다. 하지만 엄청난 창작 작업에도 불구하고 우탱 클랜의 음악은 그들이 등장했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은 < Enter The Wu-Tang (36 Chambers) >가 너무나도 혁신적이었기에, 그것의 테두리 안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우탱 클랜의 다섯 번째 회합, < 8 Diagrams > 역시 위와 같은 시선을 떨쳐내긴 쉽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전작들의 넘치는 에너지에 비해 이번 앨범은 우탱 특유의 드라이하면서도 뜨거운 열기가 많이 식은 느낌이어서 강렬한 컴백을 기대했던 팬들에게 약간은 실망스러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 Iron Flag > 이후 약 6년간의 휴지기. 올 더리 배스터드(Ol' Dirty Bastard)의 사망이라는 힘겨운 시기를 겪어야만 했던 여덟 멤버들을 생각할 때 이러한 변화는 당연한 것으로 보아야한다.

< 8 Diagrams >라는 타이틀은 홍콩의 쇼 브라더스에서 제작했던 쿵푸영화 '오랑팔괘곤(The 8 Diagram Pole Fighter)'에서 따왔다. 데뷔 앨범의 제목이 '용쟁호투(Enter The Dragon)', '소림 36방'에 대한 일종의 유머처럼 보였던 것에 비해, 죽은 친구에게 보내는 진혼미사이자 남겨진 8명들의 기록물적인 성격을 지닌 이 앨범의 컨셉을 비춰보면 타이틀에서부터 진중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것은 앨범 속, 주역의 팔괘(八卦)가 상징하듯, 남겨진 8형제의 '유체적 조화'를 통해 한걸음 더 나아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

진보의 열쇠는 역시나 르자(Rza)의 프로듀싱이 쥐고 있을 것이다. 그는 이번 앨범에서 전작과 같이 혼 섹션과 디지털 비트를 난립시키지 않으며, 사운드를 매우 간결하고 짜임새있게 잡아냈다. 이것은 르자의 자신감을 동시에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 Iron Flag >가 'Bobby Digital' 솔로작품들에서 르자가 보여준 강한 비트의 영향아래 있었다면, < 8 Diagrams >는 인스트루멘탈 사운드로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었던 '고스트 독', '킬빌' 사운드트랙에서 보여준 명상적이고 동양철학의 속성에 대한 성찰적인 힙합의 전과가 확연히 드러난다. 이점은 분명 싱글적인 측면에서 강한 억양을 싣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앨범 전체적으로 깊은 맛이 진하게 우러나오는 르자 비트의 발전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앨범을 여는 'Campfire'와 'Take it back'을 들어보면 MC 개개인의 색채가 최대한으로 배제된 채, 여러 사람들과의 차분한 조화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예전의 우탱이었다면 화려한 라임들로 치장하고 축축한 여성 코러스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분주했을, 'Starter' 같은 노골적인 섹슈얼 트랙에서도 코러스라인을 상당히 절제했고, 천재 지자(Gza)의 버스(verse)마저 묵묵히 자신의 부분만을 들려주고 있을 뿐이다.

물론 앨범 전체적으로 메쏘드 맨(Method Man)과 고스트페이스 킬라(Ghostface Killah)의 랩은 여전히 사람들의 피를 끓어 올릴만한 것이지만, 올 더리 배스터드라는 선정적 활기의 부재는 어쨌든 치명적으로 보인다. 반항 펑크(funk)의 절대고수 조지 클린튼(George Clinton)을 모신 'Wolves'는 그래서 앨범의 가장 중요한 트랙으로 필청을 권한다. 사운드도 초기의 우탱처럼 매우 심플하고 파워풀하며, 라임 스타일 또한 짧은 격언 같은 강인함으로 단칼에 귀를 베어버린다. 특히 어둠을 향해 서있는 메쏘드 맨의 “Me and my comrades following the cash, and living everyday like tomorrow is the last" 부분은 우탱 음악의 진면목이 무엇인가를 깨우치게 한다.

첫 싱글인 'The heart gently weeps'의 뛰어난 성취도 간과할 수 없다. 너무나 친숙하지만 왠지 힙합과는 잘 매치가 되지 않던 비틀즈의 곡('While my guitar gently weeps')을 감싸안으면서 힙합의 수려한 변형을 선사하는데, 아마도 우탱의 팬들에겐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서정적인 접근방식일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블루지한 기타 사운드에 기원을 둔 원곡의 텍스트를 게토 흑인의 리얼리즘으로 표현한 세 가지 내러티브(주방장 래퀀, 고스트페이스 킬라, 메쏘드 맨이 번갈아 등장하는)와 평온함을 전하는 에리카 바두(Erykha Badu)의 노래는 록과 힙합, 알앤비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만난 희귀한 순간이다. 원곡의 주인인 고(故) 조지 해리슨의 아들, 다니 해리슨(Dhani Harrison)의 참여도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이것은 로열티를 주고 골라잡는 재활용 쇼핑들로 정형화 된 현재의 힙합과는 정반대의 방식이어서 더욱 평가받을만하다.

앨범 후반부에 두드러지는 클라이맥스가 없다는 일말의 아쉬움과 함께(물론 진혼미사곡 'Life changes'는 너무나 아름답고 가슴 아프지만), '싱글 히트될 만한 곡이 없다'라는 우탱 클랜의 가장 큰 약점이 여전히 이어질 것으로 보이지만. 분명 < 8 Diagrams >는 무당파의 파란만장한 15년의 역사와 더불어 보다 성숙되고 진일보한 음반임에 틀림없다. 당신이 우탱 클랜의 팬이라면 세계 최고의 랩 그룹이 돌아왔다고 야단법석을 떨고 다닐지도 모르겠다.

-수록곡-
1. Campfire
2. Take it back
3. Get them out ya way pa
4. Rushing elephants
5. Unpredictable (Feat. Dexter Wiggle)
6. The heart gently weeps (Feat. Erykah Badu, Dhani Harrison, John Frusciante)
7. Wolves (Feat. George Clinton)
8. Gun will go (Feat. Sunny Valentine)
9. Sunlight
10. Stick me for my riches (Feat. Gerald Alston)
11. Starter (Feat. Sunny Valentine & Tash Mahogany)
12. Windmill
13. Weak spot
14. Life changes
김태형(johnnyboy@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