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집을 발표한 박혜경은 한 인터뷰에서 데뷔 당시 품었던 간절한 마음을 공개했다. "불행해져도 좋으니, 가수가 되게 해 주세요." 그리고 '불행한 가수' 시절을 충분히 겪었다. 대부분의 가수들이 꼭 한 번씩은 거치는 고역일 것이다. 지난 2년간 전 소속사와 법적 분쟁에 이어 또 다른 음반사인 EMI뮤직코리아로부터 가처분 신청을 당했다고 한다. 절박한 문제이지만 복잡하고 어려운 내부사정보다 중요한 본질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 박혜경의 음악을 제대로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음악은 전혀 불행하지 않다.
박혜경은 여전히 한 밴드의 프론트 우먼 같다. 프로젝트 록 그룹 더 더(The The)의 보컬로 데뷔한 전력과 함께, 영국식 밴드 음악을 집요하게(?) 탐구하는 강현민과 합동 작업들이 남긴 흔적들, 그리고 아일랜드 록 밴드 크렌베리스(Cranberries)의 여성 보컬 돌로레스 오리어던(Dolores O'Riordan)의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는다. 새 앨범 < 아마란스 >의 첫 곡 '자유'를 들으면 음색과 발성 모두 그리 독창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조금만 너그럽게 생각한다면 밴드 음악의 스타일을 지금까지 고수하는 초심의 유지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곡 작업을 하지 않으며 프로듀서가 아니면서도, 가수라는 한 가지 직함으로 록 음악의 장악력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6집 < 아마란스 >는 여성적 록, 즉 밝고 상쾌한 이미지를 최대화한다. 과거 'It's you' 'Rain'의 나른한 서정미나 '주문을 걸어'의 당찬 보컬, 혹은 지난 5집에서 시도한 전위적인 아이리쉬 음악은 이제 없다. 외로운 감수성에 호소하는 평범한 발라드와 통쾌한 열창을 넘어서고, 색다르고 어려운 이국의 음악을 거슬러서, 이제는 상냥하면서도 탄탄한 주류 모던 록을 전면화한다. '빨간 운동화'나 더 더 시절에 부르던 '내게 다시'를 떠올리게 하는, 탄산음료의 명랑한 자극과 이온음료의 안정감이 곳곳에 퍼져있다. 이미 했던 형식의 반복이지만, 맑은 느낌을 보다 확장해 박혜경 특유의 미적감각을 완성한 느낌을 준다. 연주와 보컬 모두가 경쾌, 찬란하다.
박혜경과 콤비를 이루는 작곡가, 러브홀릭(Loveholic)의 이재학이 만든 'Yesterday'는 몰래 화장도 해보고 밤 새워 일기를 쓰던 어린 날을 적당히 새침하게 회상하는 예쁜 가사에, 박혜경의 '든든한 가성'을 제대로 살린 곡이다. 'Anything for you' 'Single party' '자유' 등은 클라이막스에서 특히 솟아오르는 박혜경의 '가진 소리'를 강조한다. 드넓은 초원에서 홀로 희열을 느끼며 질주하듯 자연미가 살아 있다. 듬직한 연주와 함께 공연에서 활약하기 딱 좋은 곡이다. 부클릿에 도배되어 있는 녹색 잔디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이렇듯 '본성'을 따르는 음악이 있다.
한편 연속으로 흐르는 '여행' '소녀 사랑을 만나다' '보물섬'은 새 앨범의 목표가 집약되어 있다. 어떻게 표현하면 가장 예쁘고 친절할 수 있을까를 오래 고민했을 것 같다. 다분히 팬시적인 모던록이지만 소녀의 어리광이 아니다. 우아하게 가꾼 여성미다. 앨범의 제목인 '아마란스'는 시들지 않는 꽃을 의미한다고 했던가. 그 견고한 낭만을 담았다. 그런데 프로듀서는 의외의 인물로, 시나위를 거쳐 나비효과에서 베이스를 연주하는 정한종이다. 극과 극은 통하는 것일까? '미스터 정'은 남성적 록 파워의 정반대편에서 박혜경 목소리의 아름다움을 더 많이 끌어낼 수 있었다.
단언하자면 단 한 곡도 거슬리지 않는다. 소속사와의 연이은 불화로 '불행한 가수'로 고된 시간을 보냈지만 음악은 전혀 그늘이 없다. 독창적인 무언가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가능한 표현의 범위 안에서 최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데에 매우 공을 들였다. 모호한 작가주의나 어설픈 예술적 마인드를 지향하지도 않으며, 예쁜 음악이지만 가공된 성형미 없이 연주와 보컬의 중심을 지키는 천연의 사운드이다. 참 잔잔하게 우수하다. 생각해 보면 거창하고 대단한 게 꼭 미덕은 아니다.
6집 이력의 박혜경은 뮤지션이기 이전에 결국 겸손하고 자연스러운 음악을 추구하는 '가수'라는 생각이 든다. 가수란 무엇인가. 좀 과장하자면, 불합리하거나 골치 아픈 정황에 구애받지 않고 노래에만 가장 충실할 수 있는 믿음직한 사람을 지칭하는 고결한 이름이다. 불행해도 좋으니까 가수이고 싶다는 소박한 소원은 이미 성취하고도 남았으니 이제 당당하게 행복한 가수를 꿈꿔도 될 것 같다. 여섯 번째 앨범 < 아마란스 >는 정서적인 가난함이 없다. 행운을 넘볼 수 있는 충분한 음악적 감각을 갖고 있다.
-수록곡-
1. 자유 (작사 : 박혜경 / 작곡 : Winther-John, Marcus, Christensen, Tim)
2. Anything for you (임창범 / 고동훈)
3. Yesterday (박혜경 / 이재학)
4. 여행 (김민섭 / 김민섭)
5. 소녀 사랑을 만나다 (박혜경 / 최정민)
6. 보물섬 (정한종 박혜경 / 정한종)
7. Single party (임창범 / Winther-John, Marcus)
8. 아마란스 (박혜경 / Brace)
9. 길 (정한종 박혜경 / 이창현)
10. 아름다움 (정한종 / 김인섭)
11. Finale (정한종 / 김원준)
프로듀스 : 정한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