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라틴 그래미 시상식이 독립적 영토를 확보했다는 사실적 근거를 말하지 않아도 이제 라틴 음악은 월드 뮤직이 유행의 꽃을 피우고 있는 현재, 가장 선호도가 높은 장르 중 하나로 폭 넓은 인기의 세례를 누리고 있다. 이전까지는 지구촌 시장 진출을 위해 영어로 부르는 것이 필수였지만 지금의 탈국적, 무국적 시대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그럴 필요는 없다는 설명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장점은 있겠지만 과거와 같은 큰 메리트는 더 이상 되지 못하는 형편이다.
이번에 라틴어 새 음반 < Fijacion Oral Vol.1 >으로 다시금 정열의 여신이 될 준비를 끝마친 샤키라에게도 이는 마찬가지다. 그녀에게는 아마도 이미 영어 앨범 < Laundry Service >와 2004년의 라이브 레코드 < Live & Off The Record >로 탄탄한 지지 기반을 마련해두었기에, 영어로 부르든 라틴어로 부르든 팬 층의 쏠림 현상은 거의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자신감의 발로 덕분인지 신보에서 샤키라는 그 매혹적인 중음역대 허스키 보이스를 마음껏 내지르며 라틴의 젊은 여제가 다시 돌아왔음을 선포하고 있다.
올해 역시 새 앨범을 내놓았던 제니퍼 로페즈가 블랙 뮤직 쪽으로의 완전 경사(傾斜)를 택한 데 반해 샤키라의 입장은 그야말로 단호한 듯 보인다. 라틴 팝 하나만으로도 지구촌 음악 팬들을 석권할 수 있다는, 어찌 보면 무모한 수도 있을 용감성과 대담성을 한껏 표출하고 있다. 라틴의 빅 스타인 알레한드로 산즈(Alejandro Sanz)와의 듀엣곡이자 첫 싱글로 발표되어 전세계 라틴 차트를 싹쓸이하고 있는 'La Tortura'(고문)과 그녀 특유의 낭만적 활기와 생기로 곡 전체를 리드하고 있는 미드 템포의 감성 라틴 넘버 'La Pared'(벽)만 들어봐도 이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다.
전작 < Laundry Service >에 비해 전체적으로 톤 다운(tone-down)된 사운드 스펙트럼을 들려주고 있다는 점이 샤키라의 신보 파악을 위한 핵심 키워드이다. 'Whenever, Whatever' 보다는 'Underneath Your Clothes' 쪽에 더 가깝다 말해도 좋을 정도로 템포를 한층 늦춰 로맨틱한 분위기를 강화하는데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예쁜 라틴 발라드 소품 'Obtener Un Si'(예스라고 해줘), 록 쪽으로 제법 무게가 실린 러브송 'Dia Especial'(특별한 날), 멜로디컬 발라드 'No'(이제 그만) 등이 잘 말해준다.
이 외에 흥겨운 리듬과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Escondite Ingles'(잉글리쉬 숨바꼭질), 샤키라의 가사 쓰기에 대한 재기를 엿볼 수 있는 'Las De La Intuicion'(여자의 직감), 힘차게 방점을 찍는 'Lo Imprescindible'(피할 수 없는) 등은 < Laundrey Service >와의 지나친 간극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어느 정도 힘을 실은 고(高)중력 넘버들로 해석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샤키라는 남미 권에서 그 열정적인 무대 매너와 파워풀한 목소리로 명성이 자자하다. 같은 콜롬비아 출신이자 <백 년 동안의 고독>으로 노벨상 문학상을 받은 문호 가브리엘 마르케스가 그녀를 두고 “샤키라의 음악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는 특징을 갖고 있다. 아무도 그녀처럼 노래하거나 춤출 수 없다”라고 말한 것은 이제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유명한 일화가 되어버렸다. 곡을 쓰는 실력도 일취월장 했지만 하나의 분명한 악기로 기능하고 있는 그녀의 보컬은 여전히 마법을 거는 듯 아름답고 또한 칭찬할 만하다.
음반 재킷에서 보듯, 이제는 섹시 스타의 도발적 이미지보다는 성숙한 한 명의 아티스트로 다가서려는 샤키라의 이번 도전은 아마도 큰 지각변동이 없는 한 히트의 존에 무사히 연착륙할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광 팬을 자처했던 대작가 가브리엘 마르케스 역시 이 앨범을 듣고 흐뭇한 미소를 지을 게 틀림없다. 지금, 샤키라를 필두로 라틴 팝이 다시 한번 정열의 마차를 타고 그 화려한 쇼 무대를 준비 중이다.
-수록곡-
1. En Tus Pupilas 너의 눈동자 안에서
2. La Pared 벽
3. La Tortura 고문
4. Obtener Un Si 예스라고 해 줘
5. Dia Especial 특별한 날
6. Escondite Ingles 잉글리쉬 숨바꼭질
7. No 이제 그만
8. Las De La Intuicion 여자의 직감
9. Dia De Enero 1월의 어느 날
10. Lo Imprescindible 피할 수 없는
11. La Pared (Version Acustica) 벽 (어쿠스틱 버전)
12. La Tortura (Shaketon Remix) 고문 (셰이크톤 리믹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