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는 것은 일찍이 다 했다. 사운드클라우드에서 부화해 힙스터들의 귀를 현혹한 빌리 아일리시는 EP < Don’t Smile At Me >로 Z세대의 대변인 지위에 올랐고, 2019년 첫 정규작 < When We All Fall Asleep, Where Do We Go? >는 더 나아가 그에게 새 시대의 혁신가 칭호를 안겼다. 팝의 정점에 오른 안티 팝스타의 다음 행선지는 고전적인 세계 탐구. 각종 영화 사운드트랙 참여와 재즈, 보사노바 등 다양한 장르를 흡수한 소포모어 < Happier Than Ever >로 수평적 너비의 확대와 시대 관통의 성과를 동시에 일궈냈다.
그렇다면 빌리 아일리시가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 Hit Me Hard And Soft >는 지금 시점에서 그가 도출할 수 있는 결론 중 가장 높은 개연성을 지닌 결과물이다. 우울함이 낭만이자 멋이 되게 했던 주역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장르적인 시도에 더해 지난날의 과오를 수정하고 있다. 현재 단계에서 그가 응당 챙겨야 할 보수성이다.
첫 싱글 ‘Lunch’에 모토가 담겨있다. ‘Lost cause’ 뮤직비디오에서 불거졌던 ‘퀴어 베이팅’ 논란을 잠재우려는 듯이 외설적인 동성애 테마의 가사를 들이밀었고, 전속 프로듀서인 오빠 피니어스의 특기라 할 수 있는 쫀쫀한 리듬은 유지하되 물결처럼 퍼지는 기타 이펙트로 중간중간 조미료를 쳤다. 그러나 가장 놀랄 점은 그가 노래를 한다는 사실일 테다. 그림자에 숨어 속삭이던 데뷔 앨범과 참고 참다 끝자락에서야 성대를 터뜨린 < Happier Than Ever >와 달리 이번에는 첫 트랙 ‘Skinny’부터 목소리의 존재를 숨기지 않는다.
자신감 표출일 수도, 커리어 초반 ‘Ocean eyes’와 ‘Bellyache’로의 복귀일 수도 있다. 마냥 상념에 잠길 때는 지나버린 팝 신의 기류를 의식한 결과물이라 해도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것이다. 타협과 성장의 나이테 둘 중 무엇이든 이번 앨범에서 두드러지는 가창 퍼포먼스는 이제 그의 호소력에 슬픔이 필수 요건 자리를 강탈당했음을 알린다. 역대 내놓은 음악 중 가장 일반적인 팝 싱글 ‘Birds of a feather’의 살랑대는 음색과 이별한 연인에게 미련 없이 손을 흔드는 ‘L’Amour de ma vie’의 능글맞은 표정은 익숙한 빌리 아일리시 어법의 완전한 폐기다.
음반 전체로나 개별 곡으로나 허리를 지나 가빠지는 호흡이 흠이다. 고전 호러 영화음악 같은 ‘The diner’와 인트로에서 순간 힙합의 레이지(rage)가 보이는 ‘Bittersuite’ 모두 구상에 비해 최종 갈무리가 개운치 않아 완결된 노래보다는 길게 늘인 인터루드 같다. 노래 안에서도 비슷한 약점을 공유해, ‘L’Amour de ma vie’ 후반부에서 댄스 팝으로 바뀌는 ‘Over now’ 섹션은 당황스럽고 ‘Blue’의 두 번째 파트는 일부 사족으로 들린다. 기성 문법으로 돌파하는 트랙의 일장(一長)과 기존처럼 프로덕션 중심인 곡의 일단(一短) 그 중간에서 ‘The greatest’마저 ‘Happier than ever’의 아류 격으로 난처하게 끼이는 상황이다.
예로부터 물에 빠지는 일은 새로운 탄생을 상징했다. ‘다음 작품은 언제 들을 수 있냐?’는 물음이 음반을 닫는 것을 생각하면, 여러 가치와 고민이 뒤엉킨 채 어둠 속 허우적대는 < Hit Me Hard And Soft >는 빌리 아일리시 스스로 거행하는 세례 의식으로도 보인다. 창백함과 찬란함을 함께 품은 자신을 인정하는 ‘True blue’와 불면증을 토로하는 ‘Born blue’가 상충하는 마지막 결론, 강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제목처럼 음반은 모순적이고 울퉁불퉁하나 그래서 답이 아닌 질문과 선택의 연속인 인생을 닮았다. 결과 대신 과정을 민낯으로 보여주는, 빌리 아일리시가 왜 ‘안티 팝스타’인지를 재차 입증하는 작품이다.
-수록곡-
1. Skinny [추천]
2. Lunch [추천]
3. Chihiro
4. Birds of a feather [추천]
5. Wildflower [추천]
6. The greatest
7. L’Amour de ma vie
8. The diner
9. Bittersuite
10. Bl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