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간 새로운 그룹을 데뷔시키지 않고도 SM이 아이돌 왕국으로서의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음악적 완성도에 대한 끊임없는 내부적 혁신에 있었다. 강력한 자본력과 튼튼한 팬덤을 기반으로 한 개혁은 H.O.T와 동방신기로 대표되는 과거의 뻔한 SM 스타일의 음악 SMP에서 탈피하여, 샤이니와 에프엑스로 대표되는 세련된 음악을 만들어냈다. 여기에 확실한 콘셉트와 정체성까지 갖추게 되자 어느새 SM은 공산품 음악을 찍어내는 악덕 기획사에서 아이돌 음악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개혁적인 기획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러한 진보적 흐름 속에서 새로이 선보이는 보이 그룹 엑소는 그러나, 그 시작부터 과거로의 회귀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프로모션 싱글 'History'와 데뷔 싱글 'Mama' 는 둔탁한 일렉트로닉 비트 위에 비장한 사회 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전형적인 '전사의 후예' 형 곡이었다. 중화권 아시아 시장 진출까지 염두에 둔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는 이들은 멤버 수로는 슈퍼주니어, 음악적 특성으로는 동방신기의 초창기와 맞닿아있다.
타이틀곡 '늑대와 미녀 (Wolf)'부터 그 욕심을 숨기지 않는다. 강한 비트와 어우러진 화려한 퍼포먼스는 눈길을 사로잡고, 무거운 사회 비판 대신 선택한 동화적 가사는 엑소만의 판타지를 구축하며 소녀시대의 'I got a boy' 와 같은 흐름의 현대적 SMP를 지향한다.
파격은 여기까지다. 나머지 곡들의 구성은 대중들이 익히 알고 있는 전형적인 아이돌 그룹의 앨범 형식을 따르고 있다. 국내 작곡가들과 다양한 해외 작곡가들의 협연을 통한 작업방식은 여전히 유효하고, 이를 통해 탄생한 결과물들은 현재 유행하는 트렌드들의 집합체로서 존재한다. 익히 들어온 형식이지만 좋은 멜로디를 가지고 있는 'Baby, don't cry (인어의 눈물)', 덥스텝 사운드를 차용한 'Let out the beast'가 있고, '3.6.5'는 원 디렉션 스타일이다.
좋은 결과물을 위한 노력은 세련된 결과물들을 만들어냈다. 문제는 이러한 일련의 작업들이 엑소라는 이름 아래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곡은 동방신기를, 어떤 곡은 슈퍼주니어를, 또 어떤 곡은 까마득한 H.O.T를 떠올리게 하지만 정작 '이것이 엑소다.'라고 느껴질 만한 곡은 없다. 때문에 신보는 분명히 완성도 높은 수록곡들로 구성되어 있으나 개성의 부재로 전체 완성도와 집중도는 현저하게 떨어진다.
결국 신선한 출발이 되어야 할 그룹의 첫 번째 정규 앨범이 소속사가 쌓아놓은 클리셰에 점철된 모양새다. 데뷔하기도 전에 프로모션을 통해 확보해놓은 거대한 팬덤이 있기에 내부적 결속을 다지고 인기를 재확인 하는 데는 무리가 없겠지만, 그간 보여주었던 진보적 흐름에 '혹시나' 하며 관심을 가졌던 대중들에게는 '역시나' 라는 말이 나올 법한 앨범이다. 과거 답습이 지향점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룹 구성은 드디어 완전체가 되었다고 하나 음악은 마니아들의 수요 충족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잘나가던 SM이 또다시 자가당착의 모순에 빠졌다.
-수록곡-
1. 늑대와 미녀 (Wolf) [추천]
2. Baby, don't cry (인어의 눈물) [추천]
3. Black pearl
4. 나비소녀 (Don't go)
5. Let out the beast
6. 3.6.5
7. Heart attack
8. 피터팬 (Peter pan)
9. Baby
10. My lady
11. 늑대와 미녀 (Wolf) (EXO-K Ver.)
12. 늑대와 미녀 (Wolf) (Chinese 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