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들에게 '맹신'을 주창했던 블라인드 페이스(Blind Faith)의 활동을 접고 미국에서 시작한 델라니 앤 보니 (Delaney & Bonnie)와의 투어는 에릭 클랩튼 커리어에 일대 전환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
빛나는 솔로 경력의 출발은 델라니 브램릿(Delaney Bramlett)의 철저하고 헌신적인 서포트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이 앨범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기타의 신(神)'이라는 지위에서 연주만을 집중하고 절대시했던 그가 '연주자'의 사명감을 접어두고 노래를 부르는 '싱어'로서의 첫발을 디뎠다는 점이다. 일찍이 블라인드 페이스 시절부터 스티브 윈우드(Steve Winwood)는 그의 보컬리스트로서의 가능성을 점쳤던 바 있지만 '오로지 기타'라는 당시 클랩튼의 고집은 어쩔 수 없었다. 그저 기타리스트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했던 그가 '싱어'라는 짐을 짊어지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점부터다.
당시 클랩튼은 '책임감의 결여'라는 몰염치한 면모를 음악 동료들에게 수 없이 보여주곤 했다. 술과 마약, 그리고 여자 문제로 끊임없이 입방아에 올랐고, 변덕도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해서 함께해 온 동료들보다 훌륭한 연주자들이 있다고 판단되면 홀연히 밴드를 떠나 새살림을 꾸렸다. 그 방랑벽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이 작품이다. 동시에, 스스로의 잠재력을 믿지 못하던 상황에서 본인의 이름을 내걸고 자신도 발견치 못해왔던 '잠들어있던 음악성'에 불씨를 지펴내기 시작한 지점이기도 하다.
비슷한 시기에 발매한 < Layla & OtherAssorted Love Songs >와 마찬가지로 당시 비평가들에게는 물론 상업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세월과 역사, 그리고 뮤지션의 이력에 의해 '숨겨진 명반'으로 평단에 서서히 인정받은 작품인 것이다. 간결, 간명한 기타연주는 물론, 마니아적 접근 보다는 팝적 센스가 수록곡 곳곳에서 빛나는 수작으로, 그의 경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작업은 델라니의 부추김에 못 이겨 스튜디오에 떠밀리듯 착수했다. 하지만 클랩튼은 “환상적이었다”는 말로 당시 녹음 진행 사항을 회상한다. 그가 작곡해둔 곡은 'Let it rain'뿐이었지만 델라니 브램릿에 따르면 입을 열면 곡이 술술 나올 정도였고 녹음도 한, 두 번의 테이크로 해치웠다고 한다. 필요에 따라 그 위에 코러스와 관악기 등의 연주를 덧칠하는 방식으로 모든 것을 막힘없게 물 흐르듯 끝냈다.
수록곡들에서는 억지스러운 기타 솔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인기를 얻었던 'After midnight'은 기존 J.J. 케일(J.J. Cale)의 오리지널보다는 스트레이트하고 긴박한 속도감을 더했다. 'Easy now'에서 풍성한 어쿠스틱 기타의 울림은 확실히 달라진 팝적 접근의 묘미를 선보이는 트랙이다. 마지막 곡 'Let it rain'은 유일한 블루스 곡으로 명성을 대변할만한 유려한 독주가 돋보인다. 로큰롤과 블루스의 색을 유연하게 혼재시킨 가스펠과 리듬 앤 블루스, 컨트리와 팝이라는 새로운 접근이다. 블루스라는 한 가지 장르만을 탐구하고 연주하고자 했던 그에게 있어 의외라고 여겨질 수 있다. 리온 러셀(Leon Russell)과 함께 작곡한 로큰롤 곡 'Blues power'의 가사는 앨범의 의도와 속내를 정확히 말해준다.
내가 로큰롤을 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에요 / 오, 내 영혼 속에는 부기우기가 흐르고 있어요. / 소침하게 물러나 있지는 않겠어요 / 지금의 나를 살게 하는 것은 블루스 파워니까요
'신'으로서의 초월적인 기타 연주보다는 느긋한 코드 워크와 평온한 곡 전개가 더 눈에 띄는 작품이다. 이미 '기타 예술의 미학'에 대한 영감을 획득했던 그가 새로운 경지의 비범함을 드러내는 또 다른 시작일 뿐이었다. 이로부터 기타 갓(Guitar God) 에릭 클랩튼의 활동은 전성기를 맞게 된다. 전설은 필연이었다.
-수록곡-
1. Slunky
2. Bad Boy
3. Lonesome And A Long Way From Home [추천]
4. After Midnight [추천]
5. Easy Now [추천]
6. Blues Power [추천]
7. Bottle Of Red Wine [추천]
8. Lovin' You Lovin' Me
9. Told You For The Last Time [추천]
10. Don't Know Why
11. Let It Rain [추천]
Eric Clapton: Guitar and Lead Vocals
Delaney Bramlett: Rhythm Guitar and Vocals
Leon Russell: Piano
Bobby Whitlock: Organ and Vocals
John Simon: Piano
Carl Radle: Bass
Jim Gordon: Drums
Jim Price: Trumpet
Bobby Keys: Saxophone
Tex Johnson: Percussion
Bonnie Bramlett, Rita Coolidge, Sonny Curtis, Jerry Allison, Stephen Stills: Voca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