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결성 37년을 맞는 시카고는 긴 역사만큼이나 많은 우여곡절과 변화를 겪어왔다. 7인조의 대형 그룹으로 출발하여, 처음에는 브라스 연주와 흥겨운 리듬으로 대표되는 '브라스 록', 혹은 '재즈 록'을 추구한 그들은 이후 1970년대 후반 발표된 < Chicago 10 >의 'If you leave me now'와 < Chicago 11 >의 'Baby, what a big surprise'의 히트를 통해 보다 대중적인 방향으로의 변화를 모색한다.
이러한 흐름은 소속사가 바뀐 1980년대로 들어와 더욱 본격화되는데, 최고의 프로듀서 데이비드 포스터(David Foster)를 영입하고 토토(Toto)의 멤버들과 작업해 발표한 < Chicago 16 >에서는 넘버원 싱글 'Hard to say I'm sorry'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활동 이래 가장 큰 인기를 구가하였다.
1984년 발표된 < Chicago 17 >도 또다시 스매시 히트를 기록했지만, 보다 첨예해진 그룹 멤버들 간의 음악적 견해 차이와 순회공연의 피로를 이유로, 그룹의 간판스타였던 피트 세트라(Pete Cetera)가 솔로활동을 위해 탈퇴하면서 그룹은 적어도 인기 측면에서는 존폐의 위기에까지 놓이게 된다. 피트 세트라의 공백을 어떻게 메울 것인지, 기존의 대중적인 인기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지, 이후의 음악의 방향은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 그룹에겐 상당히 중요한 시점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불안요소들을 타개하며 새로운 시카고의 건재를 알린 앨범이 1986년 작 < Chicago 18 >이다. 피트 세트라가 탈퇴면서 생긴 보컬과 베이스 자리의 공석은 과거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의 백밴드에서 활동한 바 있는 제이슨 셰프(Jason Sheff)를 영입해 메웠다. 셰프의 목소리는 피트 세트라의 따뜻한 허스키 보이스에서 느껴지던 블루아이드 소울적인 요소를 충분히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좀 더 거칠고 팝 적이다. 피트 세트라와 거의 유사한 느낌을 풍기면서, 무리 없이 그룹에 녹아들어 그룹의 성공적인 변화에 기여하고 있다.
음악적으로는 기존의 록 적인 성향을 유지하면서도, 솔로로 독립하자마자 탄탄대로를 걷던 피트 세트라에 대한 의식과 보컬리스트 교체 직후 발표하는 앨범이라는 부담감 때문인지, 이전 앨범들에 비해 더욱 팝 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전작들을 프로듀스한 데이비드 포스터가 다시 참여했고, 토토의 스티브 루카써(Steve Lukather: 기타 연주는 하지 않았다)와 마이클 랜도(Michael Landau)와 같은 기라성 같은 세션 맨 들의 이름도 보인다.
싱글 커트되어 히트한 'Will you still love me'와 'If she would have been faithful'을 비롯해, 여타의 앨범들에 비해 미드 템포의 발라드 성향의 곡들이 앨범에 대거 포진되어 있다. 사실 < Chicago 16 >도 'Hard to say I'm sorry'를 뺀다면, 재즈와 록이 결합된 시카고 특유의 빅밴드 스타일의 음악 세계의 연장선상에 있던 앨범이다. 당장 'Hard to say I'm sorry'의 접속곡인 'Get away'에서 그런 성격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때로 음악적 정체성에 대한 의심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절대 팝 발라드 전문 그룹이 아니며 그들의 역사에서 순전히 감상적인 팝송만으로 점철된 앨범은 사실 없었다.
그런 시카고라는 것을 감안하면, < Chicago 18 >은 시카고의 디스코그래피 전체에서 상당한 이채를 띄는 앨범이다. 시카고 특유의 경쾌하고 역동적인 혼 섹션의 홍수와 발군의 리듬파트는 상당부분 그 위상이 감소되어 있다. 그에 반해, 변함없이 훌륭한 멜로디와 매력적인 보컬 하모니, 데이비드 포스터의 손을 거친 빈 틈 없이 완벽한 팝송들이 앨범의 주된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피트 세트라가 없어도 시카고는 건재할 수 있음을 입증했고, 그룹의 무게 중심이 키보디스트 빌 챔플린(Bill Champlin)으로 완벽하게 옮겨졌음을 알리며, 데이비드 포스터가 팝 프로듀스의 최강자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1980년대 초중반, 시카고의 인기폭발과 히트 행진의 정중앙에 있던 존재는 사실 그였다. 특히 < Chicago 16 >에서 < Chicago 18 >로 이어지는 히트 곡 퍼레이드는 '미다스의 손' 데이비드 포스터 음악 세계의 정점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첫 번째로 싱글 커트되어 차트 3위까지 오른 'Will you still love me'는 드라마틱한 곡구성과 데이비드 포스터 특유의 두텁고 울림이 큰 소리가 단연 일품으로, 새로운 보컬 제이슨 셰프의 호소력 있는 음성이 돋보인다. 'If she would have been faithful'은 차트에서는 17위에 그치며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일련의 히트곡들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감동적인 발라드 넘버로, 특히 절정부와 후반부의 보컬의 중첩과 풍성한 사운드는 언제 들어도 뭉클한 기분을 자아낸다.
공명감 있는 키보드와 브라스가 상큼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도입부가 인상적인 'Niagara falls'(차트91위), 빌 챔플린의 굵직한 목소리와 쫀득쫀득한 기타, 잔잔한 브라스 연주가 마냥 듣기 좋은 'Over and over', 업템포의 'It's all right'는 < Chicago 17 >에 수록된 히트곡 'Along a comes woman'을 연상시키는 경쾌한 곡이다. 전형적인 데이비드 포스터 스타일의 도회적인 팝송이라 할 'I believe'와 'One more day'로 대미를 장식한다.
시카고 특유의 혼 섹션과 맛깔 넘치는 리듬감을 살린 연주 위주의 음악이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다. 초기 히트곡인 '25 or 6 to 4'를 일렉트릭 기타를 부각하여 1980년대식으로 재해석하였으며, 25초의 짧은 연주곡 'Free flight'는 혼 섹션이 이루는 앙상블이 푸근함을 안기는 구식의 소품이다.
초기 시카고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소간의 불만을 자극할 수도 있는 말랑말랑하고 편한 앨범이지만, 팝의 황금기라 하는 1980년대 초반의 대중음악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앨범이다. 데이빗 포스터와 시카고의 세 번째 조우로, 1980년대 팝 음악의 스타일과 정서, 그 외에 모든 것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데이빗 포스터의 위용 앞에서, 위태위태하던 큰 변화의 시기에 어쩔 수 없던 선택으로 인해, 시카고의 본래 모습이 온전히 담기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앨범이 발표된 지도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지났고, 그룹의 전성기도 지나간 지 오래이다. 새로운 앨범의 발표 소식은 뜸하지만, 워낙에 많은 히트 레퍼토리를 보유한 만큼 지금도 새로운 베스트 앨범과 영상물이 꾸준히 출시되고 있다. 8인조의 대식구를 유지하며 초기의 빅밴드 스타일의 음악을 고수하고 있으며, 캐럴 앨범 발표와 지속적인 공연을 통해 꾸준한 음악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전성기가 지나 찾아온 것은 아쉬웠지만, 2003년에 첫 번째 내한 공연도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수록곡-
1. Niagara falls
2. Forever
3. If she would have been faithful
4. 25 or 6 to 4
5. Will you still love me?
6. Over and over
7. It`s alright
8. Nothing`s gonna stop us now
9. I believe
10. One more day
Producer: 데이빗 포스터(David Fo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