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 음악을 평가하는 데에는 수많은 잣대들이 필요하다. 다른 모든 문화 영역들과 마찬가지로 대중 음악 역시 단 한가지 카테고리만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 다양한 검증 절차를 거친 뒤에야 한 음반이 명반인지 아니면 단순한 평작에 불과한 지가 판가름 난다는 설명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밴드'라는 개념이다. 역사가 말해주듯 록 음악은 주로 '공동체'라는 수단을 통해 그 찬란한 음악적 결실을 거두어온 바, 록 평단의 밴드를 향한 깊은 애정은 다른 것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특히나 한 음악 서클이 멤버 교체 없이 롱런 가도를 달려왔다면 따고 들어가는 기본 점수의 단위대가 틀려진다. 해체한 레드 제플린(Led Zeppelin)과 비틀스(The Beatles), 그리고 현재의 알이엠(R.E.M.)과 유투(U2) 등이 이에 대한 증빙 자료들. 그만큼 밴드라는 형태는 록 음악에 있어 매우 중요하며 또 소중하다.
블러(Blur)의 이번 새 앨범 <Think Tank>(2003)는 우리로 하여금 이 '밴드'라는 개념을 다시금 고찰케 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프런트 맨인 데이먼 알반(Damon Albarn)과 더불어 블러의 간판을 형성했던 그레이엄 콕슨(Graham Coxon)이 떠난 뒤에 발표한 첫 번째 작품인 까닭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가 블러를 등졌던 이유는 신보에서 기타 사운드가 대폭 축소되었기 때문. 얼마 전, 데이먼 알반이 주도한 프로젝트 고릴라즈(Gorillaz)가 강력히 시사했듯, 점점 블러의 사운드 스케이프는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전자를 택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곳곳에서 전자음이 난무하는 대신 강력한 기타 사운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레이엄 콕슨이 참여한 마지막 트랙인 'Battery in your leg'에서도 그의 존재감은 미약한 수준일 뿐이다. 과연. 기타리스트라면 불만을 가질 법도 하다.
바로 블러가 점점 밴드라는 수평적 평등구조에서 데이먼 알반을 정점으로 하는 수직적 하강구도로 이동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하기야 데이먼 알반이 본디부터 블러의 음악적 중심 축이기는 했지만 이번만큼 그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난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별다른 잡음 없이 7집까지 잘 달려왔음에도 불구, 스스로를 망치는 행위 아니겠는가.
그러나 한가지 더 고려해야 할 사실은 '음악인은 음악으로써 말한다'는 점이다. 데이먼 알반이 주도권을 완전히 가져간 지금의 음악이 과거의 것들에 비해 뒤질 것이 없다면 현재의 모습을 비판할 이유가 전연 없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그레이엄 콕슨 없는 블러는 올해 영국 최고의 앨범이 될지도 모를 걸작을 들고 돌아왔다. 호들갑스럽기로 유명한 영국 언론들은 벌써부터 난리 법석을 피우고 있는 중이다.
<Think Tank>를 설명키 위해서는 우선 <Blur>와 <13>을 거친 그간의 과정 요약이 불가피하다. <Blur>는 주지하다시피 데이먼 알반의 미국 인디 록, 특히 로 파이에 대한 호감도가 전면에 드러난 음반. 따라서 기타가 대부분의 곡을 주도해 혹자들은 그것을 '그레이엄 콕슨의 레코드'라고 일컬었다. 반면 <13>은 일렉트로니카의 적극 도입을 통해 기타 중심의 악곡 구조를 완전히 해체한 앨범이었다. 수순을 살펴보면 신보가 일렉트로니카 쪽으로 전향한 결과가 너무도 자연스러움을 잘 알 수 있다. 자연스레 그레이엄 콕슨은 도태될 수 밖에 없었던 것. 하지만 이는 나무만 보고 숲은 못 보는 격에 다름 아니다. 데뷔 이후부터 블러라는 그룹을 관통해온 음악적 에센스를 간과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간 블러는 어떤 지향의 작품을 내건 변함없이 팝에 중독된 팝 그룹이었다. 단 한번도 그들은 이에 소홀했던 적이 없었다. 1990년대 브릿 '팝'!(BritPop)이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주인공이 바로 블러였다는 점이 이를 잘 대변해준다. 데이먼 알반은 이에 대해 “팝은 록보다 더 높은 수준의 예술 형식이다.”라며 강변해온 바 있다. 그렇다. 록처럼 시끄럽게 들렸던 <Blur>도 실은 멜로디가 잘 부각된 팝 음반이었으며 전자음으로 인테리어 했던 <13> 역시 전형적인 팝 앨범이었다.
데이먼 알반의 선율감 넘치는 보컬이 정 중앙에서 힘있게 자리를 잡은 첫 곡 'Ambulance', 로 파이 넘버인 'Good song', 중동풍의 'Out of time', 'Caravan', 'Moroccan peoples revolutionary bowls club'(이번 음반은 영국과 모로코를 오가며 녹음되었다.)등에서 블러만의 트레이드 마크인 팝 적인 감수성을 잘 느낄 수 있다. 1990년대를 대표하는 멜로디 메이커를 넘어서서 뉴 밀레니엄 시대에도 권좌를 유지하려는 블러의, 아니 데이먼 알반의 야심이 전편에서 드러난다.
팻 보이 슬림 노먼 쿡(Norman Cook)이 프로듀싱한 일렉트로닉 송 'Crazy beat'와 'Gene by gene' 또한 강력한 훅을 내재하고 있기는 마찬가지. 아름다운 블러 식 발라드 'Sweet song'도 같은 관점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그레이엄 콕슨을 아껴왔던 팬들로써는 안타까울 수 있겠지만 확실히 이번 앨범 <Think Tank>는 수작이다. 음반은 개인으로 분해될 수 없는 하나의 통일적 단위인 밴드라는 형식이 여타의 것들에 비해 항상 우월할 수는 없다는 점을 우리에게 잘 말해준다. 중요한 순간에 음악적 결단을 내리지 못해 우왕좌왕하기 보다는 결정권을 가진 한 멤버에게 맡기는 편이 때론 좋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물론 이것이 독재로 이어져서는 안되겠지만 말이다.
이렇듯 각 파트간의 갈등이 때로는 생산적으로 작용, 그룹 내부에 활력을 줄 수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생명력은 그리 길지 못하다고 그 동안의 역사는 말한다. 그래서 일까. 'But I hope I see the good in you/Come back again/I just believed in you'라는 가사가 유난히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동시에 비슷한 코스를 밟았지만 음악적 역경을 결국에는 이겨내고 멤버들 '모두 함께' 갔던 라디오헤드의 케이스가 머리 속을 스친다.
-수록곡-
1. Ambulance
2. Out Of Time
3. Crazy Beat
4. Good Spng
5. On The Way To The Club
6. Brothers And Sisters
7. Caravan
8. We've Got A File On You
9. Moroccan Peoples Revolutionary Bowls Club
10. Sweet Song
11. Jets
12. Gene By Gene
13. Battery In Your Le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