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영국 음악계는 블러(Blur)와 오아시스(Oasis)라는 브릿팝 이름 아래 격전을 펼친 두 그룹의 이야기로 뒤덮였다. 오아시스는 제2의 비틀스 칭호를 얻으면서 미국 진출에도 성공을 거두며 영국음악의 자존심을 대변했다. 반면 블러는 2, 3, 4, 5집으로 지속적인 음악적 변신을 시도했지만 미국시장에서 고배를 마시면서 다수 대중의 외면을 당해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에 대한 음악적 평가는 결코 오아시스에 뒤지지 않는다. 브릿팝의 상징성은 보다 블러에게 주어진다.
오아시스는 앨범이 거듭되어도 별반 변화 없는 리듬과 멜로디 패턴으로 식상함을 던져주었고 그 음악이 추구하는 방향성이 또한 뚜렷하지 않았다. 언제든 더 좋은 음악이나 사운드를 가진 그룹이 나오면 그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는 '시한부 황제'의 자리에 놓여있었다고 할까? 하지만 블러는 비록 '최고의 인기가수'는 아니더라도 '1960년대 이후 들어볼 수 없었던 영국음악의 진수'로 고평을 받는다.
블러는 데이먼 알반, 그래험 콕스, 알렉스 제임스, 데이브 로운트리의 라인업으로 80년대 말 시무어(Seymour)라는 이름으로 결성되어 1989년 블러(Blur)로 이름을 바꾸고 당시 영국에서 유행하던 펑큰롤(Punk'n' roll)의 직선적인 리듬과 단순한 멜로디로 대중의 인정을 받기 시작한다. 1991년 첫 앨범 <Leisure>에서 펑큰롤로 성공한 이들은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1992년 <Modern Life Is Rubbish>를 통해선 가사에 시사적인 입장을 개진하면서 더 이상 음악적 방관자가 아님을 보여준다. 이들의 3집 <Parklife>은 주지하다시피 빅히트 앨범이었다. 그 히트의 이면에는 늘 그랬듯 그들의 과감한 변신과 시도들이 저류했다.
<Parklife>은 사운드 측면에서 기념비적 업적이었다. 앨범 속에는 펑큰롤에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트럼본, 프루겔혼, 플롯, 3음역의 색소폰의 혼 섹션이 동원되었고, 디스코, 글램 록, 펑크등 다양한 사운드를 담아냈다. 하지만 1995년 오아시스의 블록버스터 ('What's The Story)Morning Glory?>와 비슷한 시기에 내놓은 4집 앨범 <The Great Escape>은 브릿팝의 최강자였던 블러의 자존심을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오아시스의 성공에 밀려 2인자로 각인되면서 어쩔 수 없이 앨범의 가치 또한 대중에게 어필되지 못한 것이다.
<The Great Escape>은 사운드가 많이 무거워져 있다. 하지만 그 앨범 구성과 가사에서 보여지는 참신하고 독특한 상상력은 벗어나고픈 일상에서 탈출하려는 그들의 사고를 한 편의 앨범으로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오아시스에게 밀린 1990년대 후반 블러는 그런 판매량 측면에 결코 연연하지 않았다. 어쩌면 더 태연해지려고 스스로 노력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브릿팝이란 호들갑떠는 영국 언론의 장난으로 간주하며 그저 해오던 대로 음악에 열중할 뿐이었다.
5집 앨범 <Blur>에서는 대중성을 포기하고 새로운 시도의 음악들로 방향을 잡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과감한 변화 속에는 미국 사운드와의 결합이라는 영국 밴드가 시도하기 힘든 부분까지 아우르기에 이른다. 영국을 대표하는 밴드 블러의 사운드가 미국을 쫓아간다는 것은 분명 변절로 치부될 수 있지만 블러의 스타일은 그랬다. 그냥 자신의 의지를 따라 음악에 열중할 뿐이었다. 앨범은 노이즈를 그대로 방치함으로써 소닉 유스(Sonic Youth)로 대표되는 미국의 로우파이 계열의 음악까지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10년은 변화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음악 속에는 부담스럽지 않은 저항정신과 자유분방함이 깔려있다. 인간과 자유, 평화를 사랑한 1960년대 젊은이들의 시대정신을 재현하고 있는 의미 있는 밴드로 10년을 보내온 것이다.
<The Greatest Escape> 앨범 재킷 안에는 저 우주부터 깊은 바다 속까지 일상에서 탈출할 수 있는 공간을 4페이지의 긴 공간에 연속적으로 그려놓았다. 재킷의 첫 장은 업무에 바쁜 모습과 돈에 관련된 그래프를 그려 놓았고, 다음 장은 전원의 가정, 다음 장은 깊은 바다 속, 다음 장은 산 속의 아름다운 산과 호수이며, 다음 장은 고요한 밤하늘을 그려놓았다. 과연 앞의 풍경들은 이들에게 위대한 탈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주었을까?
전원의 가정 위에 크게 써있는 'Win'이라는 문구와 아래 칸의 'Match & Win'이라는 문구는 아마도 이 평화로워 보이는 집은 복권으로 사들일 수 있는 자본주의의 산물임을 나타내는 것 아닐까. 다음장의 바다 속..... 마지막 장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지만 이들이 보트 위에서 웃으며 뛰어든 저 바다 속에는 무시무시한 상어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다음 장에 보여지는 아름다운 성과 호수는 무엇인가. 정말 탈출의 공간으로 손색이 없어 보이지만 맨 아래 줄에는 'Warning: Private Property'(경고 : 개인소유 재산)이라는 문구가 이곳도 탈출의 공간이 될 수 없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밤하늘은 어떤가? 탈출의 공간인 듯 보이긴 하지만 다음 장에 석양 속에 서서 밤을 기다리는 건장한 청년의 모습에는 외로움이 그득하다. 결국 가사와 대치되어있는 마지막 장은 영안실로 끌려가는 시체로 마무리되어 있다. 그 배경은 복잡한 앞의 색상과 대비되는 순백의 색상이 그들이 보여주고파 한 순결한 영혼의 자유를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그 다음 장에는 'The Great Escape...'이라는 앨범 타이틀이 마지막을 장식한다. 아마도 '...'에 생략된 문구는 'is the death of body'가 아닐까 싶다.
각각의 노래는 가사에 따라, 각각의 사건에 맞게 적절히 배치되어있다. 트랙에 수록된 곡의 순서와 재킷에 배열되어있는 곡의 순서가 다른 이유는 여기에 연유했을 거란 추측을 낳는다. 'He thought of cars'는 이 복잡한 세상에 혼란스러워하다 죽은 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통해 첫 장에 일상에서 탈출해야 할 필요성을 끄집어내고, 복권으로 얻을 수 있는 전원의 가정과 함께 배열되어 있는 'It could be you'는 복권당첨을 갈망하는 힘없는 사람들에게 아마 이번에는 당신일거라는 위로의 말을 전하고 있으며, 밤하늘과 대비되어있는 'Best days'는 낮 시간을 꿈꾸는 밤 근무자의 애환을 노래한다. 'Globe alone'은 석양 속에 서있는 남성의 외로움을 드러내어주고 있으며 마지막장의 시체는 'Fade away'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알게 모르게 전체적으로 컨셉 앨범의 형식을 취한 것이다.
이들의 가사 속에는 1970년대 영국에서 유행했던 투 톤 무브먼트(Two-tone movement)가 바탕을 이룬다. 투 톤은 영국에 만연된 인종과 고용차별에 반대하는 운동이었고, 1990년대 발표되긴 했지만 이 앨범의 내용은 차별의 대상인 도시 빈민들의 소외된 삶으로부터의 탈출을 묘사하고있는 것이다. 별 의미 없이 살아가는 직장인의 애환을 담은 'Ernold sane', 모든 것이 무료인 세상을 꿈꾸는 'The universal', 배운 자의 무리를 매력 없는 집단으로 그려내고 있는 히트넘버 'Charmless man'등은 소위 가진 자들의 교만과 위선을 비꼬면서 깎아 내리는 메시지의 흐름이 통쾌함을 불러일으킨다.
1990년대를 만족스럽게 장식해낸 블러지만 이들에게도 하나둘 쓰러져 가는 주위 밴드들의 모습은 더 전진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어느새 중견이 된 그들은 분명 무너진 영국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노력을 선도해야할 밴드라는 기대가 주어진다. 그런 2000년 베스트 앨범을 발표한 블러의 행보는 의미가 있는 듯 싶다. 1990년대는 이것으로 정리한다는 그런 의미 말이다. 한참 활동을 해야할 밴드가 베스트 앨범을 내는 것은 새로운 시작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한 동네에서 최고의 아티스트로 성장해있는 라디오헤드 또한 블러의 새로운 음악을 이끌어내는데 암암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기대를 해본다. 다음 블러의 앨범이 기대된다. 하지만 21세기의 젊은이들은 이 강력한 밴드에게 쉽사리 애정을 제공하지는 않을 것 같아, 아티스트의 실험과 대중의 수긍은 여전히 날카로운 대립 각을 세울지도 모른다.
-수록곡-
1. Stereotypes (Albarn) - 3:11
2. Country House (Albarn) - 3:57
3. Best Days (Albarn) - 4:48
4. Charmless Man (Albarn) - 3:35
5. Fade Away (Albarn) - 4:19
6. Top Man (Albarn) - 4:00
7. The Universal (Albarn) - 3:59
8. Mr. Robinson's Quango (Albarn) - 4:01
9. He Thought of Cars (Albarn) - 4:16
10. It Could Be You (Albarn) - 3:13
11. Ernold Same (Albarn) - 2:07
12. Globe Alone (Albarn) - 2:23
13. Dan Abnormal (Albarn) - 3:24
14. Entertain Me (Albarn) - 4:19
15. Yuko and Hiro (Albarn) - 3:54
16. Ultranol (Albarn) - 2:41
17. No Monsters in Me (Albarn) - 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