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팝의 '메트로폴리스'인 그룹의 '시티홀' 앨범
90년대 영미 대중음악의 주요한 흐름인 얼터너티브 록과 브릿팝은 비슷한 시기에 나왔다. 미국의 얼터너티브 록이 조금 먼저 구동했지만 시기의 유사성 때문에 일각에선 브릿팝이 얼터너티브 록에 대한 영국적 대안이라는 관점이 고개를 들기도 했다.
물론 빗나간 시각이다. 미국 쪽의 흐름과 무관하게 브릿팝의 생성은 예정된 것이면 독자적인 것이었다. 70년대와 80년대 영국의 모드(mod)와 퍼브록(pub rock), 투톤무브먼트(two tone movement) 그리고 뉴웨이브 등을 통하여 얼마든지 그리고 구체적으로 스미스와 스톤로지스를 통해 이미 80년대부터 선명한 청사진이 제시되었다. 브릿팝은 후발적 대항이 아니라 분명 자생했다.
블러(Blur)는 브릿팝 수도(首都)이며 <파크라이크>(Parklife)는 그 시내에 위치한 시청(市廳)으로 규정된다. 멤버 본인들은 꺼리긴 하지만 무엇보다 브릿팝이라는 신조어의 생성이 이 앨범에서 비롯되었다('브릿팝은 죽었다'는 선언도 이들의 입에서 나왔다). 블러는 어쨌든 '브릿팝의 표준'을 확립했다. 메트로폴리스에 선 그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지방색들이 존재한다.
블러는 89년 영국 콜체스터에서 세이무어(Seymour)라는 이름으로 결성되었다. 하필 때는영국 록이 위기에 처한 시점이었다. 당시 록은 뚜렷한 경향 없이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90년대 초반까지 록의 공황은 계속되었으며 EMF나 지저스 존스(Jesus Jones) 등 이른바 파트타임 펑큰롤(funk`n`roll)이 겨우 체면을 지키고 있었다.
'아마추어 블러'인 세무어는 어려운 시기에 뛰어들어 나름대로 스타일을 만들어나갔다. 그것은 맨체스터형 '배기 비트'의 수용이었다. 실제로 데뷔 앨범 <레저>(Leisure)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이웃집 잔치 '매드체스터'를 흠모한 흔적이 역력하다. 2집 <현대의 삶은 쓰레기>(Modern Life Is Rubbish)부터 블러의 정체성이 구축된다. 미국과 다른 '영국성'이 진가를 발휘한 이 앨범은 킹크스(Kinks) 버즈칵스(Buzzcocks) XTC 등 영국 토종 그룹의 감성을 고스란히 전수했다.
블러의 완성을 일반에게 고지한 작품이 본 앨범 <파크라이프>다. 발매직후 영국 앨범차트 1위로 데뷔했으며 95년 영국의 그래미라는 브릿 어워즈에서 베스트 싱글, 앨범, 비디오 그리고 최우수 그룹 등 4개 부문을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기한 대로 이 음반으로 브릿팝이라는 단어가 일반화되었다.
80년대 후반 맨체스터를 시발로 90년대 초반까지 증식을 거듭한 '기타 팝'이 <파크라이프>와 함께 브릿팝으로 명료하게 통합된 것이다. 이전에는 그저 어림잡아 '뉴웨이브 오브 뉴웨이브'라고 불렸다.
전작보다 밀고적이며 재미있으며 커졌다. 음악은 백화점식이라고 할만큼 메뉴가 다채롭다. 이 부분이 미국의 얼터너티브 록과 가장 커다란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지 록이 전면적인 '기타 록'으로 '한 앨범에 한 음악'인데 반해 '기타 팝'인 브릿팝(용어도 미국이 록인데 반해 영국은 아예 어휘부터 팝이다)은 '한 앨범에 여러 음악'이란 점이 특징을 이룬다.
또한 그런지 록이 '집합의식'을 전제한 것이라면 브릿팝은 '개성'의 무한대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런 지향의 차이가 두 스타일의 대립 구도 아니면 의도적인 대치를 초래했는지도 모른다. 국내에서도 얼터너티브의 굉음이 지겨워졌을 때, X세대라는 억지 묶음이 부자연스러워졌을 때, 팬들이 브릿팝으로 귀를 옮긴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블러는 하지만 브릿팝에 일반적인 '저항에의 탈출'로부터 탈출한 것은 아니다. 이미 2집 앨범 제목이 말해주듯 사회의식의 요소가 존재한다. '없지는 않은데 행복하지도 않은' 중산층의 미묘한 사회상과 신세대의 굴절된 사랑방식 등을 예리하게 관통한다.
80년대 뉴웨이브와 '뽕짝' 디스코를 변절없이 차용한 '여자와 남자'(Girls&boys)는 전이된 성(性)을 묘사한 가벼운 포르노그래피이며 '주빌리'(Jubilee)는 X세대 사이버 아나키스트를 예우하고 있다. '빚 수집자'(The debt collector) '트레이시 잭스'(Tracy Jacks) '은행 휴일'(Bank holiday)와 같은 곡들에서는 도시중산층의 경제적 한계와 일상의 권태를 밀고한다.
'도버해협 위의 클로버'(Clover over Dover)에서는 독특하게도 황폐해진 도버해협을 재조명하며 환경대사의 역할까지 수행한다. 킹크스의 레이 데이비스가 워터루 역에서 아름다운 석양을 보았다면(Wateroo sunset) 블러의 데이먼 알반은 모쿄노 댄스플로어의 미러볼에 투영되는 런던의 현실을 보았다. 『롤링 스톤』은 그를 '킹크스의 레이 데이비스에 의해 확립된 사회비평으로서의 팝 전통의 유일한 상속자'로 평했다.
<파크라이프>는 냉철한 시각으로 수집한 영국의 사회상을 꼼꼼하게 스크랩해 낸다. 전작을 아울렀던 킹크스, 스몰 페이시즈, 매드니스, 잼 등의 내외곽적인 체취는 자취를 감추고 블러만의 정체성 또한 확고해진다.
음악에 있어서도 신스 팝, 기타 팝, 펑크 등의 각 단위들이 결속되어 세련된 브릿팝이 나열된다. 전체적으로 같은 밀도를 유지하며 '꽉 찬' 느낌이다. 전혀 지루한 구간이 없다. 기본적으로 각 채널이 살아 있는 조합형 음악이기 때문이다. 블러 사운드의 아기자기한 재미는 바로 여기서 나온다. 각 채널은 독자적 개성을 발휘한다. 노래를 중심으로 반주되는 음악이 아니라 보컬, 베이스, 드럼, 기타라는 네 개의 건반이 동시에 연주되는 음악이다. 노래가 리프일 때도 있고 건반이나 드럼, 기타 루프 등이 노래일 때도 있다. 각 채널의 화음은 대단하다. 비틀스처럼.
'여자와 남자' '파크라이프' 그리고 '끝으로'(To the end) 는 순차적으로 차트를 휩쓸었고 특히 '끝으로'는 스테레오랩의 라티샤 사디에의 목소리가 들리는 곡으로 '배드헤드'(Badhead) '도버해협 위의 클로버' '이것은 낮아'(This is low)와 함께 앨범의 분위기를 일시적으로 진정시키며 청자를 온화하게 가라앉히는 매력적인 곡이다.
블러는 이후 음반들에서 다양한 역량을 통한 새로운 스타일 추구에 집중한다. 다섯 번째 앨범 <블러>(Blur)에서는 그런지 록과 6집 <13>에선 소울과 타협했다. 미국에서도 먹힌 비교적 성공적인 대서양 횡단이었다.
허나 이러한 변화는 만능그룹이라는 일각의 찬사를 얻어주었으나 치명적인 손실 또한 초래했다. 그것은 영국적 기질의 급격한 퇴조였다. 다양한 시도를 기하다보니 그룹의 생명이라 할 영국성의 감소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이다. 마니아들은 손상되고 상처받지 않은 브릿팝과 블러를 기억하기 위해 이 앨범으로 '귀거래'를 반복했다. 그리하여 <파크라이프>는 반사적으로 브릿팝과 블러의 정점을 축약하는 걸작이라는 역사성을 획득했다.
* 브릿팝 주요 앨범들
오터스(Auteurs)(1993)
브릿팝 씬은 각양각색이다. 스미스와 스톤 로지스가 일군 양질의 고운 토양에서 자양분을 섭취하며 자생을 거듭했다. 블러와 오아시스, 라디오헤드, 펄프, 수에이드 5강 구도를 중심으로 대단히 개성적인 음악 스타일로 세분화되었다. 그 중 오터스는 대표 스타일에서 탈피한 대단히 순도 높은 '기타팝'을 지향한다. 프라이멀 스크림과 함께 대표적인 런던파로 92년 결성되었다.
사운드의 핵심은 보컬과 기타, 피아노를 두루 담당하는 루크 헤인즈이다. 루크 헤인즈의 동력감 없는 헐렁한 기타와 정제된 음성을 원자재로 대단히 깔끔하고 순도 높은 음악이 완성된다. 가벼운 듯하면서도 포크적 진지함과 두터움을 겸비했다. 본 앨범은 데뷔작으로 순도 절정의 기타팝을 선보인다. 기타와 목소리만으로도 음악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여실히 증명한다. 프라이멀 스크림의 걸작인 87년 기타팝 앨범 의 '순수함'을 잇는 기타팝 그리고 브릿팝의 보석.
수에이드(Suede) (1994)
수에이드가 '데이비드 보위 주니어'로서 주목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보위가 확립한 글램 록의 그로테스킹을 적극 수용했고 리더인 브렛 앤더슨의 음성이 그와 유사한 점 그리고 역시 브렛의 바이섹슈얼(양성애적인)한 성분이 그런 혐의를 낳았다. 그러나 그룹의 2집인 앨범에 와서는 누구도 그 유사성을 추궁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한 '배경' 없이도 수에이드가 충분히 각광받을 만한 독창성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음반의 가장 함축적인 느낌은 '장려'함이다. 사운드 규모가 대단하다. 작고 변태적인 그리고 '비밀스런' 스토리들을 큼지막하게 떠들고 있다. 관능적인 퇴폐와 개인적 나르시시즘을 소곤거리지 않고 화끈하게 증폭시켜 미묘한 아이러니를 생성했다. 퇴폐와 우아, 어두움과 밝음, 경(輕)과 중(重)이라는 상반적 성질이 동거하는 또 다른 아이러니도 매력적이다. 'We are the pigs' 'New generation' 'The asphalt world' 등이 그렇다.
후반부로 갈수록 스케일이 점증되어 오페라 내지는 오케스트레이션적인 규모로 위압한다. 'The wild ones' 'Daddy`s speeding' 'The 2 of us' 'Still life'는 서정적 '아리아'이다. 그렇다고 정말로 오페라를 연상하진 말기를. 그 장황한 규모와 서정성, 스토리 텔링 그리고 컨셉트형 구성에서 그리 비유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앨범.
펄프(Pulp) (1995)
블러에 견줄만한 영국적 사운드의 정형은 단연 펄프다. 혼혈되지 않은 영국 토종의 사운드를 뿜어낸다. 뿜어낸다고 하기엔 사뭇 가볍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카바레 뽕작' 사운드로 가볍게 실토해낸다. 비록 결성 20년에 다가서는 노익장이지만(81년 결성) 예비역 아닌 브릿팝의 전방에 현역 배치되어 있다. 혼선만 야기하는 일회성 밴드가 난무하는 가운데 끈덕지게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브릿팝 가문의 믿음직한 터줏대감이다.
(94)로 펄프는 재탄생하였고 이듬해의 이 음반으로 대기만성해 전성기를 구가했다. 스미스와 로이드 콜이 엉성하게 버무려졌던 초기의 펄프는 자취를 감추고 거듭났다. 은 브릿팝 주요작이며 히트 트랙인 'Common people' 역시 브릿팝 대표 싱글로 평가받는다. 그룹의 프론트맨인 자비스 코커는 재주있는 팝 조율사이며 그의 농담에는 언제나 뼈있는 냉소가 가득하다. 불편하게 조여오는 사회에 대한 비관이다. 그게 가벼운 펄프임에도 쉽게 '넘길 수 없게' 만드는 특별한 장치였다.
의 당분은 살살 녹기만 하는 소프트 아이스크림의 그것과는 달랐다. 생선뼈가 은닉해있는 '달콤하면서도 비린' 빙과류다. 재밌게도 80년대 로라 브래니건의 히트곡 'Gloria'의 향수에 젖어들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