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같은 가속화 시대에 19곡, 1시간 남짓의 러닝타임은 막연한 긴장을 낳기 마련이지만 크러쉬에게는 통하지 않는 걱정이다. 레트로 펑크와 숏폼 챌린지 문화 유행을 전격 수용한 2023년 싱글 ‘Rush hour’로 대중 가수 자격을 유지한 그는 4년 만에 발매하는 정규 3집 < Wonderego >로 앨범 아티스트의 지위까지 당당히 얻어낸다. 음악가로서의 야욕을 적극 드러내면서도 완성도를 함께 잡아낸 흔치 않은 작품이다.
부감으로 촬영한 아트워크 속 크러쉬가 올려다보는 대상은 자기 자신인 것일까. 뮤지션은 전지적 시각으로 음반 전체를 통솔한다. 피쳐링 기용 방식이 그 첫 번째 근거다. 다이나믹 듀오에게 많은 분량을 할애한 ‘No break’는 일반적인 경우라면 과도한 양보로 보이겠으나 거시적 관점에서는 적절한 포인트로 기능한다. 멜로디의 선명도를 높이고 공간감을 키워 페노메코의 개성 강한 톤을 매끄럽게 흡수한 ‘Satisfied’, 음색 대비와 통일을 동시에 이뤄낸 이하이와의 듀엣 ‘Bad habits’ 등에서는 그의 콜라보레이션 지휘 능력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음을 실감하게 된다.
막힘이 없다. 가장 먼저 ‘힙’하게 출발을 알리는 첫 세 트랙 뒤 이어지는 대중적 선율 행렬로의 자연스러운 전개가 귀에 들어온다.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후렴으로도 이미 집중할 이유가 충분한 앨범은 중반부에 인터루드 ‘Nothing else’와 음산한 1990년대 테크노 스타일 ‘Got me got u’를 배치하여 편안한 분위기가 종종 낳는 노곤함의 부작용을 알맞은 타이밍에 끊어낸다. 개별 곡 제작과 정렬을 넘어 음반의 구성 및 설계까지 아우르는 크러쉬의 기획력을 확신하게 되는 지점이다.
과거에 비해 높아진 영어 가사의 비중이나 전반적으로 나른한 무드에서는 시저(SZA)의 < SOS >로 대변되는 ‘바이브 음악’ 열풍을 일부 받아들인 티가 난다. 그러나 ‘Me myself & I’, ‘EZPZ’, ‘Monday blues’처럼 곡 단위로도 존재감이 뚜렷한 킬링 트랙은 그가 음악이 배경으로 전락한 추세를 경계하고 있음을 또한 시사한다. 특히 ‘미워’는 트렌드와 줏대 사이 절묘한 균형감각을 집약하는 곡으로, 도자 캣의 밑그림 위에 리듬 기타를 대체한 피치카토 주법 위주의 현악 구성과 남성 보컬로서의 해석을 덧씌워 굉장히 재밌는 결과물을 탄생시켰다. 좋은 입력만큼 독창적인 출력도 중요한 시대적 요구에 대한 훌륭한 대응이다.
2016년 < Wonderlust >, 2018년 < Wonderlost >를 잇는 ‘Wonder’ 트릴로지의 마지막은 뒤에 붙은 단어 ‘에고(ego, 자아)’에서 알 수 있듯 뮤지션으로서 크러쉬라는 인물을 정의하려 한다. 여러 장르 선택과 방법론의 혼용에 기반한 ‘확장을 통한 성장’ 시나리오는 그 자체로 크게 새롭지 않지만, 부지런히 자아를 탐구하고 궁금해(wonder)하는 자세는 확실히 그를 놀라운(wonder) 아티스트로 만든다. 아늑한 분위기를 깨고 다시 바쁘게 움직이는 마지막 트랙처럼 안주하지 않는 자의 자세가 멋진 작품. 우리가 크러쉬를 계속 기억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록곡-
1. New day
2. 흠칫 (Hmm-cheat)
3. No break (Feat. Dynamicduo)
4. Me myself & I [추천]
5. Satisfied (Feat. PENOMECO) [추천]
6. Deep end (Feat. AMAKA)
7. EZPZ [추천]
8. Nothing else (Feat. 김심야)
9. Got me got u
10. Bad habits (Feat. 이하이)
11. 미워 (Ego) [추천]
12. Ego’s theme (interlude)
13. A man like me
14. Monday blues [추천]
15. ㅠ.ㅠ (You)
16. She
17. 산책 (Harness)
18. 나를 위해 (For days to come)
19. 기억해줘 (Remember me)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