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현진이 만든 한상차림은 언제나 소담하고 정갈한 끼니를 제공한다. 종로에서 바둑 두는 노인, 관악구의 분주한 학생, 마포와 서대문구 인근 예술 종사자까지 한국인 누구든 부담 없이 즐길 < 서울식 >의 손님맞이는 해가 갈수록 인산인해를 이룬다. 별미로 소문난 ‘모과’ 에이드도 물론 좋지만 메뉴판 위 모든 곡이 담백한 매력을 지닌다. 그러니 다 듣고 음미한 뒤 계산서를 내밀며 엄지를 올릴 수밖에.
에피타이저인 ‘숲길’ 샐러드는 상큼한 소스와 버무려져 풍미가 가득하다. 타격감을 강조한 드럼과 양쪽에서 하늘거리는 관악기의 향연, ‘오 사랑해’를 연거푸 외치다 빨라지는 리듬은 애심(愛心)으로 들끓는 심장을 청각적으로 그려내며 꺼졌던 낭만을 일깨운다. 뒤따르는 ‘모과’는 깎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향기를 내뿜으며 기분을 상기시킨다. 들이키는 숨에서 나는 콧소리마저 기분 좋은 아침에 지저귀는 새처럼 산뜻하다. 진심으로 노래하는 사랑스러운 순간이 각 곡에 응집된 걸 듣노라면 가히 표현의 귀재라 할만하다.
점심상의 백미는 끝나지 않았다. 대문호 헤르만 헤세는 1898년 한 편지에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3번을 가장 좋아한다며 “해명 불가능한 보물”이라 서술했다. 누군가에게 ‘빛23’도 그만한 경탄으로 반짝일 것이다. 볕 드는 카페의 잔향처럼 천천히 스며드는 온기가 알맞은 온도로 마음을 데운다. 달력의 어느 계절에도 어울릴 따스함을 만드는 능력이란. 2019년에 발표한 < 가볍고 수많은 >에 이미 공개된 바 있던 ‘빛’이 6년 후의 음반에서도 생생히 빛난다.
두 앨범에 수록된 ‘빛’은 날마다 다른 자외선처럼 편곡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본작에 담긴 ‘빛23’은 더 풍성해진 재즈풍 연주에 신시사이저 음을 기존보다 많이 품었다. 두 앨범 사이 다년간 < 심플렉스 > 시리즈로 쌓은 전자음악에 관한 연구를 어어부 프로젝트, 방백 등 팀 활동과 솔로 커리어로 다진 기존 색채에 수용한 결과다. 건반을 두드리는 실험정신은 후에 나올 ‘파도’나 ‘서울식’ 시간을 나타내는 각 인터루드 트랙에도 고스란히 녹아 있다. ‘낮잠’은 그러한 모티브를 보컬로 풀어낸 사례로, 자유롭고 거침없다. 박자 따위의 규율은 이곳에서 무용하다.
‘시간’의 물을 머금으면 행복한 기억만 되살릴 윤슬을 바라보는 감각이 번진다. 기타 연주에 힘쓴 까데호 이태훈의 손길은 꾸밈새를 밀도 높게 달며 초침을 옮긴다. ‘남산’에서도 느릿느릿 내딛는 발자국을 묘사하는 솜씨가 발군이다. 어딘지 모를 목적지에 오른 뒤 흐르는 진수영의 피아노 후주는 무엇보다 탁월한 마무리. 듣는 사람들에게 마무리까지 과식한 기쁨을 소화할 틈을 벌어주는 연주 역시도 아름답다. 언급한 인물들 외에도 세션 모두의 기량이 산들바람처럼 포근하게 귀를 스쳐 간다. 온갖 예쁜 소리를 버무린 낮 사이드는 햇살이 그렇듯 찬란히 머무르다 이내 저문다.
브레이크 타임 이후 저녁 코스의 첫 입은 음주로 시작한다. ‘횟집’의 폭력적인 소재와 비명을 지르는 코러스, 연주의 교차는 더없이 자극적이다. 달아오른 도시 찬미의 감상에 침을 뱉어 미적지근한 축축함을 들여보게 만든다. 다만 밤 사이드의 시작은 이렇게 극적이었으나 서곡이 전부를 대변하지는 않는다. 마치 달밤 아래처럼 고요한 적막에 가깝기 때문으로, 낮에 이어 연속된 하루가 내내 백현진의 스펙트럼을 증명한다.
오감을 사용케 하는 공연에서는 비교적 수월하나 음원을 들으며 깊은 숨을 들이키게 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을 ‘핑크’의 잦아드는 목소리와 피아노, 기타 소리의 합일이 해낸다. 이전 파트와는 다른 방식의 사랑 찬가는 한낮의 여름에도 새벽처럼 찬 공기를 고르게 한다. 이만큼 농익은 감정선은 ‘앵두’의 한가운데에서도 일어난다. 흐르던 음악을 잠시 멈추고 ‘정적’을 부르는 독백은 배우로도 잘 알려진 그다운 표현력의 정점이다. ‘순댓국을 퍼먹’는 평범한 행위에서도 눈물을 일군다. 국물이 유난히 많다.
백현진의 목소리로 풀어내는 모든 이야기는 설득력이 있다. 이 힘은 그가 지닌 특유의 자연스러움에서 올 테다. ‘우리가’ 같은 발라드에 ‘길냥이’, ‘인스타’ 등 너무나 일상적인 언어를 가사에 그대로 옮겨도 먹먹함에 젖어 들게 만드는 일, 이건 도무지 기술의 영역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음악은 본디 감정을 건드리는 예술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한다. 상투적인 주제로도 상상을 이끄는 마법이 열다섯 번째 상을 장식한다.
서울이 제목에 붙었지만 도시는 관념의 함축어에 불과하다. 백현진은 이 음반에 삶을 녹였다. 그것이 ‘픽션’이든, 아니든 간에 하나하나가 고유하고도 짙은 색깔을 담았다. 익어가는 밥솥처럼 자연스럽게 퍼져오는 필연적인 고양감은 본작이 가진 진정성의 명목이다. 인터넷에 맛집 후기를 작성할 때 “재방문 하고 싶어요” 버튼은 사실상 찬사에 가깝다. < 서울식 >에 대해 후술할 때면 그 표시를 몇 번이라도 누를 것이다. 이토록 섬세한 감정 모음을 듣게 되면 권태를 느낄 틈이 없어진다.
-수록곡-
낮 사이드
1. 서울식 낮 06:06
2. 숲길 [추천]
3. 모과 [추천]
4. 빛23 [추천]
5. 시간 [추천]
6. 낮잠
7. 서울식 낮 03:03
8. 남산 [추천]
밤 사이드
1. 횟집 [추천]
2. 서울식 밤 09:09
3. 핑크 [추천]
4. 픽션
5. 파도
6. 앵두 (Feat. 이옥경) [추천]
7. 우리가 [추천]
8. 서울식 밤 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