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에서 '파라노이아'로..
< The Eraser >는 '사운드'로 시작해서 '사운드'로 끝나는 앨범이다. 그래서 'No surprise'의 녹아드는 듯한 멜로디를 원한다는 식의 기대는 큰 실망을 안겨주기 쉽다. 제대로 즐기고자 한다면 톰 요크에 관한 기대감을 살짝 다른 방향으로 이동할 것을 권한다. “이 앨범 속에는 얼마나 다채로운 음향의 향연이 있을까”, “톰 요크는 혹시 그만의 음향 세계를 가졌다 할 만큼 독특한 사운드 스케이프를 창조 했을까” 등이 알맞다.
그래서 이 앨범은 < The Bends >와 비교해서 듣는 것보다는 차라리 < Dig Your Own Hole >과 비교하는 편이 낫다. 첫 싱글 'The eraser'부터가 그렇다. 중요한 것은 사운드의 정경이지 멜로디, 밴드 간의 호흡 등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음악이 시작하자마자 화음을 뭉개놓는다.
또한 'The eraser'에서 들리는 건반 소리는 스튜디오 속에서 새롭게 변형된 음향이다. 그는 예전 같으면 건반 세션에게 자신이 원하는 연주를 상세히 주문했을 것이다. 그는 사람 대 사람의 음악을 해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톰 요크는 누군가에게 원하는 대강의 건반 소리를 연주하게 해놓고, 이 음원을 스튜디오 안에서 변형하고, 자르고, 붙이고, 뗀다. 팀들 간의 호흡은 현재 그의 음악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는 “이 장비를 쓰면 과연 내가 원하는 소리를 낼 수 있을까?”에 몰두하는 편을 더 좋아하고 있다. 그는 이제 음향 기기들과 더 친하다.
이러한 제작 방식의 변화는 < Kid A >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는 톰 요크의 '우울증'을 '파라노이아'로 심화시켰다. 전자 음악에도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톰 요크는 그 중에서도 도발적인 신시사이저로 댄스 그루브를 만드는 것 따위엔 관심이 없다. 그는 자신의 고립과 우울함을 좀 더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법에 몰두했다. 그는 록에서는 표현할 수 없었던 느낌들을 마음껏 펼쳐냈고, 그것은 의외로 꽤 지독했다. 이를테면, 심장 박동 같은 퍼커션, 꿈속에 잠수한 듯한 공간감, 연기처럼 승화하는 듯한 음색들이 그렇다. 이 느낌들은 기타, 베이스, 드럼의 생음악으로는 표현하기 힘들다.
그래서인지 < Kid A > 이후의 음악은 '우울함'이란 단어만으로는 다 표현되지 않는다. '착시', '환청', '자살 충동', '분열', '망상'과 같은 수준으로 표현의 수위를 높여야 한다. 톰 요크의 머리 속에는 온통 수수께끼와 기괴한 환상, 아픔, 우울로 가득한 듯하다. “이 기괴한 환상과 아픔들을 얼마나 고스란히 앨범 속에 담아낼 수 있을까” 이 물음이 톰 요크가 항상 스튜디오 속에서 고민하고 있는 지상 과제로 보인다.
그의 첫 솔로 앨범 < The Eraser > 역시 이러한 지향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The eraser'의 건반 소리는 차갑고도 기계적인 심상을 가졌고, 리듬을 지배하고 있는 비트들은 거의 모든 곡들에서 모래알처럼 흩어진다. 아주 건조하고, 기계적이며, 신경질적이고, 초현실적이다.
게다가 앨범 속의 거의 모든 보컬, 코러스, 음원간 하모니는 꼭 신음, 귀곡, 애원, 한(恨)의 느낌으로 들려진다. 'The eraser', 'And it rained all night', 'Harrowdown hill'에서 특히 그렇다. < OK Computer >의 'Paranoid android'에서 보여주었던 그 느낌이다. 극도의 우울함, 엄숙함, 장중함, 묘한 광기가 동시에 흐른다.
그리고 이런 파라노이아 정서 속에서도 서정성과 서사성이 빛난다. 이는 주로 앰비언트의 성향 탓인지 몽환적이고, 우주적인 느낌으로도 느껴진다. 진공 상태, 잠수한 듯한 공간감에 황홀히 젖을 수 있다. 톰 요크의 목소리 자체가 주는 연민과 호소력도 서정성에 한 몫을 했을 것이다. 한없이 슬프지만, 한 편으로는 아름답다 느끼게 되는 아슬아슬한 감정의 줄타기가 흐른다.
사운드도 충분히 즐길만하지만, 앨범 속에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그것은 바로 '리듬'이다. 그리 광폭하지 않은 작은 퍼커션 소리들, 나아가서는 전기 스파크, 티끌, 먼지처럼 들리기도 하는 노이즈들이 오밀조밀하게 정교한 리듬을 이루고 있다. 그는 리듬에 있어서도 평범하지 않은 사운드를 활용했고, 그것도 아주 잘하고 있다. 'The clock', 'Skip divided'는 특히 매력적이다.
단지 독특한 소리를 활용하는 것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The eraser'의 후반부, 'Harrowdown hill'의 초반부, 'And it rained all night'의 후반부, 'Cymbal rush'의 후반부는 여타의 정글 장르의 곡들만큼 긴장감에 넘친다. 아주 실험적인 앨범이지만, 그 속에서도 그루브를 잃지 않는다는 점이 재밌다.
개인적으로 톰 요크의 실험이 그 방법론 자체로서 위대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인 인치 네일스(Nine Inch Nails)는 이미 1994년에 < The Downward Spiral >을 통해서 < Kid A > 보다 훨씬 놀랍고도 혁신적인 사운드로 전 세계 음악인들에게 충격을 준 바 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이전에도 브라이언 이노(Brian Eno), 카바레 볼테르(Cabaret Voltaire), 아트 오브 노이즈(Art Of Noise) 같은 뛰어난 사운드 메이커, 혹은 실험 음악 팀들이 있었다. 적어도 '방법론'에 있어서 톰 요크는 기술의 진보를 잘 활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자신만의 파라노이아 정서를 고스란히 스튜디오 음향 실험 음악에 적용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 The Eraser >는 그 공로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후기 라디오헤드의 음악은 바로 '톰 요크 표 전자음악'이다!”라고 말이다.
-수록곡-
1. The eraser
2. Analyse
3. The clock
4. Black swan
5. Skip divided
6. Atoms for peace
7. And it rained all night
8. Hrrowdown hill
9. Cymbal ru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