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진섭 인터뷰

변진섭

by 임진모

2005.02.01

정상에 섰던 경험이 있는 사람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언변의 밑에는 왠지 모를 여유가 흐른다. '1980년대 발라드의 정상' 변진섭은 딱딱한 질의와 응답의 방식을 처분시키고, 친구처럼 농을 주고받는 듯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인터뷰를 주도했다. 그는 대화의 재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돌이켜보면 1988년 여름부터 1990년 겨울까지 적어도 2년 반 동안 한국 사람들은 음악매체를 통해 오로지 변진섭의 노래들만을 들었다. 전파는 그의 데뷔작이자 시그니처 송인 '홀로된다는 것'을 위시해 '네게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 '너무 늦었잖아요' '새들처럼' '너에게로 또다시' '숙녀에게' '로라'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희망사항' 등으로 완전히 뒤덮였다.

이 시기에 방송사와 신문사가 주는 최고가수상은 모조리 그가 독식했다. 귀엽고 사람 좋은 외모는 대중적 인기를 한층 부채질했다. 심지어 별명이 '아기 공룡 둘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그는 국민적 사랑을 만끽했다. 인터뷰 시간을 관통한 넉넉한 웃음과 여유로움은 바로 그 시기의 '최고상태'를 겪어본데서 무의식적으로 퍼져 나오는 파편들이었다.

하지만 '99년에 발표한 앨범 <논픽션>을 끝으로 우리는 아기공룡 둘리를 보기 힘들었다. 사람들은 가수로서 그의 존재를 차츰 잊어갔고, 실제로 가수 아닌 골퍼로 간간이 뉴스를 타서인지 거의 노래와 작별한 듯 보였다. 2004년 연말 침묵을 깨고 그가 신보 를 발표하자 언론이 '돌아온 변진섭'이나 '변진섭 활동재개'라고 써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변진섭은 그러나 단 한순간 노래를 떠나 있지 않았다. 단지 대중들의 인식에 갭이 있었을 뿐 공백기 내내 음악과 씨름하고 있었다. 음악 하다가 시간나면 골프했으니까 '그간 음악과 골프만 했다'는 그는 “대중들에게 안보인 시간에도 내 자신이 음악과 분리된 적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그동안 뭐하고 지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당혹스럽다는 것이었다.

이번 < He'Story >는 6년 만에 낸 회심작이라는 사실 외에 '필생의 파트너'인 작곡가 겸 프로듀서 하광훈씨와 재결합해 만든 앨범이라는 점에서도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하광훈씨는 '홀로된다는 것'을 작곡했을 뿐 아니라 국내 음반시장에 첫 100만장 신화의 깃대를 꽂은 기념비적인 1988년의 첫 앨범과 1989년의 2집을 꾸려낸 인물.

두 주체의 밀월은 짧았다. 1990년 3집에 2곡을 받은 뒤, 음악접근법의 차이로 변진섭은 하광훈과 갈라섰다. 따라서 대중들한테 둘의 재회는 자그마치 15년만인 셈이다. 변진섭은 왜 다시 하광훈과 의기투합했을까. 신문보도를 보니 2000년, 미국에 있던 하광훈한테 변진섭이 찾아가 전화를 걸었다고 되어 있다.

하광훈씨의 어떤 점을 염두에 두고 찾아간 겁니까?
2000년 미국을 찾아가 전화를 했을 때 이미 전 신보를 위해 8곡을 준비한 상태였어요. 그러나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길이 없었어요. 전작들과 같아서는 안 된다는 판단이었거든요. 주변에서도 '왜 하광훈씨와 재회하지 않느냐?'고들 했고, 그를 찾아가면 뭔가 해답이 나올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인기한창이었을 때를 돌아보니 하광훈씨만이 제게 '싫은 소리'를 한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 말은 들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거죠.

하광훈씨와 미국에서 재회했을 때 한번 노래를 불러보라는 청에 응하면서 테스트 받는 기분이었다면서요.
그래요. 불러보라고 해서 김범수의 '약속'을 부르겠다고 했죠. 평소 자주 불렀던 곡이었거든요. 광훈형은 이미 그 곡을 다른 버전으로 편곡해놓은 상태였어요. 정말 테스트 받는 기분으로 불렀더니 '너한테는 무엇인가가 있다. 내가 추구하려 했던 것을 다시 너로부터 발견했다.'하는 거예요. 작업의 시작이었죠. 그 뒤는 예상한대로 엄청나게 많이 부딪쳤죠.

하광훈씨는 김범수에게 준 '약속'이라는 곡에 유달리 애착이 강한 것 같습니다. 유려하고 감상적인 멜로디의 우수한 곡이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해서일까요. 이번 앨범도 인트로 연주곡 다음 사실상의 첫 곡이 '약속'이잖아요. 변진섭씨도 '약속'에 약간은 부담을 느끼지 않았나요? 김범수도 노래를 잘하는 가수인데...
그랬어요. 김범수는 노래를 잘하는 후배죠. 하지만 다르게 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봤어요. 아마도 그 부족분은 필(feel)이었을 거예요. 촉촉이 젖어있지 않은 느낌이었던 거죠. 바로 그것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어때요? 전체적으로 음반에 만족하나요? 들어보니 그 긴 작업기간 만큼이나 우선 정성들여 만들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2000년 11월부터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2년 동안 녹음작업을 했어요. 그런데 2003년 6월, 한국에 돌아오니 광훈형이 다시 하자는 겁니다. 음정 하나하나에 필 하나하나에 신경 쓰는 그는 만족을 몰랐죠. 저도 동의했고. 다시 1년 반을 녹음에 매달렸죠.

타이틀곡 'My only love'를 녹음하고 마치고 나오는 제게 악수를 청하며 그는 앨범이 성공하든 못하든 진짜 후회 없다고 했어요. 흥행에 관계없이 완성도를 얻었다는 거죠. 저도 노래를 이렇게 많이 부른 적이 없습니다. 정말 엄청나게 정성을 들였죠.

타이틀곡 'My Only Love'나 '미안해요 고마워요'가 돋보이는 곡들인데요. 발라드 가창에 있어서 '역시 변진섭'이라는 말이 나올 법합니다. 아까 전작과 달라야 한다고 했는데 이 곡들에 변화를 주었다면 과연 무엇인가요?
예전의 음악과는 다르면서, 즉 성숙하게 바뀌면서도 제 특유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는 그런 거죠. 앨범작업에 임하면서 설정한 기본적 목표도 색깔을 버리지 않으면서 한 단계 상승한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어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뱃심으로 질러대는 게 아니라 소곤거리는 노래죠.

정직하게 부르지 않으면 그런 노래는 맛이 나오지 않아요. 그 점에서 'My only love'는 향후 10년간 변진섭이 해야 할 스타일의 방향을 제시한 곡이라고 자부합니다. 지금의 변진섭을 정직하게 전달하는 마음으로 불렀어요. 개인적으로는 '미안해요, 고마워요'가 더 맘에 들긴 하지만요.

'누구라도 그러하듯이'(배인숙) '비나리'(심수봉) '내 마음 갈 곳을 잃어'(최백호) 등 리메이크가 7곡이나 되는데...
하광훈씨를 찾아갔을 때부터 김범수의 '약속'을 비롯해 김수희의 '마지막 포옹', 장현의 '마른 잎' 등 옛날 곡을 불렀어요. 광훈이형은 조관우씨와 리메이크 앨범을 작업했듯이 리메이크에 집착하는 편입니다. 요즘 트렌드에 맞추려는 건 전혀 아니에요. 2000년 그때는 리메이크 추세가 있는지도 몰랐고, 또 언제 앨범이 출시될지도 모르는데 정책성 의도를 가질 리 없죠.

본인이 보기에 현재 앨범의 반응은 어떤 것 같아요?
이제 한달 정도 됐으니 아직 판단하기는 무리죠. 팬들은 '(신보를) 너무 기다려서 지쳤지만 간만에 접하니 역시...'하며 무척 기뻐합니다. 음악적으로도 성숙해졌다는 말을 들어서 기분은 좋네요. 일단은 긍정적이에요.

하지만 '새(new) 변진섭'의 목표는 현재의 반응에 일희일비하는 게 아닙니다. 전 나이 30대 중반 이후의 대중은 유행에 쏠리지 않고 주관으로 판단하는 세대라고 봐요. 그 대중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작은 움직임이 지속되는 것을 바랍니다. 바로 이게 제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죠.

얘기 도중 '새 변진섭'이라는 표현이 귀에 감겼다. 그는 분명 가치관이나 사고에 있어서 새 사람의 면모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팬클럽을 예로 들면서, 한창 때에는 솔직히 통과의례처럼 무감각하게 팬클럽 모임에 임했으나 세월이 흐른 뒤 60여명 정도 모이는 지금은 '찌릿찌릿' 전율이 퍼지는 것부터 '새 변진섭'의 일면이라고 피력했다.

앨범 속지에 추신으로 '광훈이형! 또 걸어가 봅시다!! 나도 이제 뛰지 않을 거야!'라고 쓴 것은 무슨 의미냐고 물었더니 그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답했다. “되돌아보니까 알지도 못하고 그저 급하게 살아온 것 같습니다. 늘 달리고 뛰어왔지요. 주변으로부터 그런 지적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제는 서서히 밟아가고 싶어요. 뛰지 않고 걷는 기분으로요.”

좋은 시절로 잠깐 얘기를 돌릴까요? 변진섭 하면 누구나 '홀로된다는 것'을 가장 먼저 꼽습니다. 당사자는 이 곡을 어떻게 여기는지 궁금하네요.
(말 떨어지기 무섭게) 처음에는 싫었습니다! 단조에다 어딘지 모르게 성인가요 같아서 탐탁치 않았죠. 하지만 기획자, 작곡자, 제작자 모두가 좋아했고 나중에는 저도 이해가 됐어요. 발표하고 나니 내 의도와는 관계없이 뭐랄까 '뽕발라드'라고 할까요, 그 트렌드가 잡혔고 내 색깔도 정해진 거죠.

1집과 2집 대박 이후 3집부터는 가파른 하향세로 접어듭니다. 물론 '미워서 미워질 때', '너와 함께 있는 이유', '에필로그' 등 준 히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초기의 광풍에는 비교가 안됐지요. 본인은 급락의 이유를 뭐라고 분석합니까?
3집부터는 개인적인 욕심이 강해졌어요. 갑작스런 명예와 성공에 무감각해지면서 내 색깔을 버리고 실험으로 내달렸죠. 그때는 그 위험을 전혀 몰랐어요. 익을수록 잘 관리해주어야 했는데 채 익기도 전에 너무 빨리 내 색깔을 버렸던 겁니다. 오랫동안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죠.

2집의 결정적 대박인 '희망사항'은 어떻게 봅니까? 보통 발라드로 뜨면 네 다섯 정도의 앨범은 인기가 유지되는데, 변집섭씨의 경우 3집부터 하향의 조짐이 나타난 것은 발라드 아닌 재미를 내세운 이 곡도 원인이 된 건 아닐까 봅니다. 한마디로 색깔이 갈렸고 노래가 많이 나오면서 이미지가 너무 많이 소비됐다는 거죠.
'희망사항'을 전 부록처럼 여겼고 그래서 앨범 마지막 곡으로 수록했죠. 콘서트에서 재미있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애초 광훈이형은 '이런 건 나중에 라이브에서 재미삼아 하라'고 앨범수록은 반대했어요. 제가 고집을 피웠죠. 지금 생각하면 그때 형 얘기를 들었어야 했어요. 하지만 그땐 그런 얘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겁이 없었죠.

내 인생의 곡은 뭔가요?
(웃으며) '희망사항'이라고는 할 수 없고. '홀로된다는 것'이죠. 멋모르고 부른 노래지만, 그래서 지금 들으면 허점이 발견되지만 저를 있게 한 곡임에는 틀림없죠. 근래는 3집의, 역시 하광훈씨가 쓴 곡 '이 시간 이후'도 맘에 듭니다. 싫어서 버린 곡인데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드니까 좋아지더라구요.

변진섭씨를 가수로 만든 음악은 뭡니까?
학창시절에는 팝송을 많이 들었죠. 결정타는 중3때 들은 엘튼 존(Elton John)의 '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 '였습니다. 멜로디에 포로가 돼버렸죠. 빌리 조엘(Billy Joel)의 ' Honesty '도 잊을 수 없구요.

서울 상도동에서 1966년에 태어난 그는 여전히 둘리처럼 귀여운 외모를 하고 있지만 어느덧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서울 양재동 소재의 사무실에서 인터뷰하는 동안 아빠를 닮아 귀여운 다섯짜리 아들 재성이가 들어와 재롱을 떤다. 그는 수중발레 교사인 이주영씨와 2000년에 결혼, 재성과 재준(3살) 두 아들을 두고 있다. '믿으니까, 알아서 해주는 사람'이라고 아내자랑을 하는 순간 만면은 미소로 가득했다.

고참으로서 요즘 후배가수들에 대해 한마디 해달라고 했더니 처음에는 '뭔가 단언할 만큼 내가 도가 트지 않았다'며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입을 뗐다. “후배들이 너무 쉽게, 너무 빨리 앨범을 만드는 것 같습니다. 하나의 스케줄을 이행하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그러면 음악에 입체감이나 혼이 깃들 수 없죠.”

그는 바닥을 헤매는 음반시장을 걱정하면서 변화가 너무 빨라 은근함이 너무 없다고 했다. 그가 새 앨범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은 바로 그 은근함 아니었을까. 새 변진섭의 정체는 막연한 새로움이 아니라 그 은근함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작은 움직임이 지속되는 것을 바란다!'는 본인의 말과도 상통하고 있었다.
임진모(jjinmo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