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차례 예상을 빗나갔다. < Sour >와 < Guts >에 이어 보랏빛 배경의 네 글자 타이틀 트릴로지를 완성하는 대신 올리비아 로드리고는 분홍빛 드레스를 입은 채 열 단어의 문장을 들고 복귀했다. 음악도 그렇다. 첫 싱글 ‘Drop dead’가 신스팝 요소를 흡수한 것으로 보아 프로듀서 댄 나이그로를 공유하는 채플 론과 동기화되나 싶더니, 앨범 전체에서는 살짝 다른 결로 포스트 펑크의 비중을 높였다. 베팅이 전부 무력화된 이런 경우도 흔치 않다.
공식적으로 앨범은 두 사이드로 나뉜다. 제목 순서를 뒤집어 첫 트랙부터 ‘Purple’까지는 ‘Girl So In Love’, 후반부는 ‘You Seem Pretty Sad’로 묶이는 식이다. 중심 소재는 당연히 사랑이다. 전반부가 온몸을 짓누를 정도로 막대한 감정을 예찬한다면 뒷부분은 현재진행형 관계 속에서 감지하는 불안감과 해로움을 조명한다. 다만 코로나19의 답답함을 분노 서린 기타 리프로 치환하며 팝 펑크 리바이벌 아이콘 칭호를 얻어낸 전적과 달리, 신보에서 그는 감상에 촉촉이 젖어 있거나 혹은 초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음악적 뿌리도 1990년대에서 1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간다. 결국 올리비아 로드리고마저 1980년대 레트로 흐름에 뛰어드는 운명인가 하고 생각하게 되지만 이 또한 순수한 취향의 전시다. 핵심 모티브는 존경하는 밴드로 언급하며 듀엣 라이브 음원까지 발표했던 큐어로, 정 가운데 위치한 동명의 곡은 물론 보컬 로버트 스미스를 ‘What’s wrong with me’에 초빙한 걸 보면 그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다. ‘Maggots for brains’와 ‘U + me = <3’의 기타 톤에서도 변화한 시대적 배경이 확연하다.
앞서 발표한 두 앨범과 정서적으로 선을 그었으나 < Guts >에서도 뉴웨이브 풍 기타 팝 ‘Pretty isn’t pretty’를 수록했으니 단절적인 변화는 아니다. 쟁점은 새로워진 해석 방식이다. 지난번의 시도가 정신적 성찰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였다면 이번에는 감상적인 로맨스 세계관의 일부로 통합되었다. 주요 모델 중 하나였던 위저도 마찬가지로, 얼터너티브 기타 리듬이 아닌 < Pinkerton > 수록곡 ‘Tired of sex’의 신경질적인 신시사이저를 ‘My way’에 집어넣는 식으로 변주를 줬다. 과거 사랑 때문에 미쳐버린 소녀였던 그는 이제 순전히 사랑 그 자체에 미쳐 있다.
싱어송라이터로서 물오른 역량은 그러나 오히려 사랑의 지분을 덜어낸 순간에 담겨있다. 어쿠스틱 기타 스트로킹에 맞춰 속삭이듯 스산한 목소리로 자아의 흔들림을 노래하는 ‘The cure’는 폭발을 동반했던 자기혐오와 불안이 이제 역으로 내부의 심장을 집요하게 후벼 파는 광경을 비춘다. 심리 자체야 Z세대 뮤지션들의 공공재나 다름없고 점진적으로 세기를 올리는 작법은 전작의 피날레 ‘Teenage dream’과 유사하지만 오롯이 짜임새만으로도 모든 비교군을 돌파하기에 충분하다. 쟁쟁한 히트곡을 제치고 그의 커리어에서 중요한 이정표 반열에 오를 정도의 무게감을 지닌 곡이다.
히트 싱글 ‘Vampire’의 공략법을 되풀이한 ‘Stupid song’ 정도 외에 대다수 발라드 트랙은 여전히 지지부진한 감이 있고, 연해진 세기로 성숙함을 표출하겠다는 발상도 이미 숱한 팝스타들이 택했던 길이다. 그 자체로 별다른 지각변동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끝자락에서 별안간 옛날 마돈나 타입의 댄스를 감행하는 ‘Expectations’ 같은 곡은 벌써부터 그의 다음 행보를 궁금하게 만든다. 가식 없이 팝의 규칙 안에서 계단식으로 넓어지는 아티스트의 세계를 보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수록곡-
1. Drop dead [추천]
2. Stupid song [추천]
3. Honeybee
4. Maggots for brains [추천]
5. U + me = <3 [추천]
6. My way [추천]
7. Purple
8. The cure [추천]
9. Begged
10. What’s wrong with me (With Robert Smith)
11. Less
12. Expectations [추천]
13. Cigarette smok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