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스트림 팝의 손을 잡은 후로도 제임스 블레이크의 독집은 열화되지 않은 채 고유한 위치를 유지한다. UK 덥스텝의 신성으로 화려히 등장한 이래 비욘세와 프랭크 오션 같은 스타가 그를 찾았으며, 완연히 흑인음악으로 전진한 < Assume Form >은 현시대 힙합을 상징하는 래퍼들의 크레딧마다 그의 이름이 자리하게 했다. 보다 많은 선택지를 쥔 젊은 베테랑은 근작 < Playing Robots Into Heaven >에서 돌연 < CMYK > 시절의 유산 되짚기를 택했다. 과거와 미래 양쪽으로 너른 영역을 개척한 상황, 혼란한 현대 사회를 그대로 반영한 듯한 제목과 커버 아트의 < Trying Times >는 더욱 오래되고 내밀한 곳을 향한다.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통틀어 가장 기원에 가까운, 장대한 교향곡에 실려 저 위를 바라보자는 말을 따뜻이 건네는 피날레 ‘Just a little higher’가 곧 새로운 지향점과도 같다.
신시사이저를 켜켜이 쌓는 솜씨를 발휘한 ‘Walk out music’과 순식간에 어두운 무드를 형성하는 연출력이 돋보인 ‘Death of love’가 도맡는 초입이 기존의 강점을 드러낸다. 이어 배치한 ‘I had a dream she took my hand’는 반주를 단출히 두어 육성 하나로 밀어붙인다는 승부수가 맞아떨어진 곡이다. 정작 20세기 중반 두왑의 향취가 짙게 밴 샘플 ‘It was only a dream’은 불과 7년 전 발매되었으며 반대로 댄서블한 클럽 튠 ‘Rest of your life’는 1970년대 더스티 스프링필드의 소울에서 그 아우라를 빌려왔다. 심지어 고전적인 기악의 발라드 ‘Didn’t come to argue’ 속 목소리는 이리저리 변조되어 있다. 익숙한 접근법을 취하면서도 결코 쉽고 단순히 가지 않겠다는 의지다. 긴 허밍으로 고조된 감정을 즉시 모니카 마틴의 구간으로 연결하고 드럼을 투입해 과잉을 피하는 구성도 그렇다.
전자음악의 외피를 뒤집어썼을 뿐 극도로 인간적인 넘버 사이의 완충 지대가 숨을 돌리게 한다. 구획을 가르는 ‘Trying times’와 ‘Make something up’은 초기 라디오헤드 풍의 얼터너티브 록을 자신만의 색채로 구현한 산물로, 2024년 싱글 ‘Like the end’부터 시작한 탐구를 말쑥하게 다듬은 결과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면서도 뛰어난 보컬이 한층 부각된다. 디지 라스칼의 그라임을 비튼 ‘Days go to’와 근래의 날 선 힙합 프로듀싱 감각을 살린 ‘Doesn’t just happen’은 분위기를 환기함과 동시에 애상적인 후반부에 편히 몸을 맡기게 돕는 장치다. 동일한 맥락에서 당황스러울 정도로 간결한 옥의 티 ‘Obsession’ 역시 일종의 인터루드로 기능한다는 쓰임새를 가지니, 클라이맥스 이후 힘이 빠진다는 전작의 한계를 정중앙의 변주로 해결함으로써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꾸준히 스스로를 증명해 온 제임스 블레이크지만 < Trying Times >의 창작 과정은 유독 순탄치 않았다. 대형 아티스트들의 송 세션에 연거푸 참여하는 와중에도 ADHD를 비롯한 정신 건강 문제가 그를 괴롭힌 탓에 한참 전 완성한 곡이나 다른 프로젝트에서 튕겨져 나온 트랙을 한데 모아야 하는 수고가 뒤따랐다. 본래 예(Ye)와의 합작 < War >에 수록할 예정이었던 ‘Rest of your life’와 ‘Through the high wire’, < Vultures 2 >의 ‘River’ 데모 버전을 연상시키는 ‘Days go by’, 이미 여러 차례 라이브로 선보인 ‘Death of love’가 대표적인 예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조각은 작품 안에서 천연히 빛나며, 그는 이번 앨범이 자신의 작업물 중 제일 만족스럽다고 털어놓는다. 듣는 이 또한 여정 끝에 남은 여운을 고스란히 끌어안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는 때때로 불완전과 모조에서 참으로 큰 위안을 얻는다.
-수록곡-
1. Walk out music
2. Death of love
3. I had a dream she took my hand [추천]
4. Trying times [추천]
5. Make something up
6. Didn’t come to argue (With Monica Martin) [추천]
7. Days go by
8. Doesn’t just happen (With Dave)
9. Obsession
10. Rest of your life [추천]
11. Through the high wire
12. Feel it again
13. Just a little higher [추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