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더 인터뷰
더더(THETHE)
벌써 30주년을 앞두고 있다. 더더가 유명해진 데에는 박혜경의 힘이 컸지만 ‘더더하면 박혜경이지’라는 말도 이제는 옛말이 됐다. 팀에 합류한 지도 10년을 훌쩍 넘긴 프론트우먼 이현영은 활동하며 느낀 가장 큰 보람으로 음악을 하고 있는 그 자체라 소회를 밝혔다. 이 감사함과 열정으로 현재 밴드의 목소리 기준을 새로 세우는 중이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자우림, 체리필터와 달리 보컬이 여럿 바뀐 탓에 음악적 방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힘들었을 김영준은 그럴수록 돛에 줄을 더욱 세게 잡아맸다. 덕분에 롱런하기 힘든 국내 대중음악계에서 작년 11월 < The Mast >를 공개하며 정규작으로만 십 단위에 들어서는 기염을 토했다. 바람을 타고 앞으로 나아간 만큼 지나온 기록이 남아 있을 항해 일지를 함께 펼치며 길었던 여정을 이즘과의 인터뷰를 통해 풀어헤쳤다.

앨범 단위로는 3년 만이지만 그동안 싱글을 꾸준히 발매해 왔다. 활발한 활동의 원동력이 있다면?
김영준: 앨범이 중요했던 예전과 달리 요즘은 공백기를 최소화하고자 싱글들을 발매하고 있다. 다들 하니까 따라갈 수밖에 없더라. < The Mast > 같은 경우는 선공개 곡으로 정체성을 확립하는 동시에 리와인드 작업까지 하다 보니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원래는 옛날부터 계획한 프로젝트다. 이제는 젊을 때처럼 빠릿하지가 않다 보니 음반을 준비할 때마다 작업 기간이 길어진다. 몇 년을 잡고 대비하지 않으면 결과물을 원하는 시기에 낼 수 없겠다는 생각에 이현영이 합류했던 8집 < Anybody Here >부터 구상을 시작했다.
이현영이 보컬로 합류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이제는 더더를 대표하는 목소리가 아닌가. < The Mast >를 작업하며 보컬로서 기분은 어땠나.
이현영: 박혜경이 나갔을 때 오디션을 봤었고 그때 김영준을 처음 알게 됐다. 비공개 테스트였어서 더더가 록 밴드였는지도 몰랐다. 원래 댄스 가수 쪽으로 준비하고 있었고, 기획사에 들어가면서 잊고 있다가 2003년쯤 번호가 남아 있어 연락했던 것이 연으로 이어졌다. 활동을 하면서 힘들었던 부분에 조언을 구하고자 전화했다고 말하니 록에 관심이 있냐고 물어보더라. 그렇게 더더에 들어온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이제는 좀 편안하다.
편안하다는 게 음악적인 면을 말하는 건가?
이현영: 음악적인 면도, 활동적인 면도 그렇다. 더더의 보컬이라는 존재가 너무 거대했다. 큰 산을 넘어야 했으니까. 대중은 1, 2집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으니 ‘더더하면 박혜경이지’라는 말을 항상 들었다. 처음 1~2년은 정말 힘들어서 트라우마로 남을 정도였다.
이현영을 보컬로 낙점한 이유는?
김영준: 원하는 컬러를 갖고 있었다. 마치 이펙트가 걸려 있는 듯한 목소리가 정말 인상적인데 이런 부분 때문에 1999년 처음 만났을 때도 기억에 진하게 남았다. 에너지 넘치는 보컬을 분출하기 위해 마마레이디도 오랫동안 활동했던 거다. 특히 최근 10집의 ‘Fireman’에서 잘 드러난다. 지금에야 더더의 음악에 자연스럽게 묻어나지만 익숙해지기까지 10년이 걸렸다. 마마레이디에서 펑크의 진성을 주로 사용했다 보니 더더에서 필요한 가성 창법으로 바꾸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다.

< The Mast >로 정규 10집이라는 금자탑에 도달했다. 그간의 음악적 소회가 궁금하다.
김영준: 나의 정체성은 락카페 우드스탁에 있다. 문지기로 시작해 3년 차부터 디제이를 했고 총 4년을 일했다. 그게 모든 시작점이었다. 감각, 정체성, 흐름, 관계 등 정말 다양하게 배웠다. 노래를 잘 틀어야 가게 매상이 올라가니까 하루 6시간을 플레이하면서 감을 익혔다. 당시에는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많았던 시기라 외국 손님과 교감하다 보니 음악을 대하는 자세가 크게 바뀌었다. 내가 좋아하는 6070만 틀고 얼터너티브, 그런지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다가 점점 취향이나 방향성을 찾아나갔다. 이런 경험이 더더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 The Mast >가 더더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김영준: 우리에게도 ‘이정표’가 될 수 있는 음반이다.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무리해서 계속 음반을 내고 여기에 모든 열정을 쏟아붓는 것이 더더다. 음악적인, 문화적인 요소들에 있어서 내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런 어려운 부분에 대해서 항상 반문하지만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하지라는 생각으로 나아가고 있다. 불만 없이 함께해 주는 멤버들에게는 늘 미안하다.
본격적인 음악 얘기에 앞서 앨범 제목 ‘돛대’는 어떤 의미인가.
김영준: 음악을 이렇게 오래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지탱할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길잡이나 기댈 곳이 없으면 롱런 할 수가 없다. 믿음 하나로 가는 거다. 돛대가 없으면 배에서 아무 의미가 없지 않나. 우리 음악이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동시에 주변의 간섭에 흔들리지 않기 위한 우리의 ‘돛대’인 셈이다.
앞서 앨범 작업 기간을 길게 잡았다고 했는데 2022년 말 첫 공개한 싱글 ‘빙글뱅글’은 어떤 곡인가?
김영준: 만든 지 10년도 넘었다. 마마레이디 프로듀싱을 하던 와중에 베이시스트가 나가면서 연주자로도 합류했다. 팀플레이가 중요한 곡이라 사용하지 못하고 묵혀뒀다. 어찌 보면 나와 이현영이 합을 맞추고 서서히 맞아들어가는 과정의 시작점이지 않을까 싶다.
‘으라차차 대한민국’으로 최근 록 신에서 잊혔던 대한민국을 향한 찬가를 가져왔다. 이러한 응원을 전하게 된 계기가 무엇일까.
이현영: 전 레슬링 국가대표 심권호 선수의 재기와 건강 회복을 바라며 시작했다. 함께 유튜브 출연을 하게 된 후 그의 주제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유소년 감독도 하고 있었으니 시기도 적절했다.
유튜브도 그렇고 요즘은 확실히 이런 다양한 마케팅이 필요한 것 같다.
김영준: 초창기에 앨범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정말 여러 곳을 돌았다. 그러다 우연찮게 만난 회사에서 어려운 부분을 도와줬고 음반 제작을 위해 버클리 음대 출신의 전문가 2명도 연결해 줬다. 덕분에 당시에 매킨토시, 미디 등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배웠다. 자연스레 작곡에만 집중하게 됐고 기타 실력이 줄어들자, “야, 너 기타야, 작곡가야! 둘 중 하나만 해.”라고 따끔하게 조언했던 스승님의 한마디가 인생을 바꿔놨다. 안 그랬으면 지금도 기타는 엉망진창으로 치고 있었을 거다.

‘Maybe tomorrow’를 제외하면 모든 트랙이 3분 이상이고 ‘이대로’, ‘작은새 (Rewind)’는 러닝타임이 거의 6분에 달한다. 자연스러운 결과물인가, 아니면 숏폼 시대에 대한 의도적 반기인가?
김영준: 길이에 대한 것보다 먼저 원곡의 의도를 살리려고 노력한다. 그럼에도 짧게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 회사에서 따로 요청하지 않는 한 가급적 라디오 에딧을 넣지 않으려고 한다. 2분 30초 정도 하는 노래도 써보고는 싶지만 쉽지 않더라.
결국 러닝타임은 자연스럽게 나온 결과물인 것 같다. 김영준의 음악적 지향이 싱글보다 앨범에 가깝다는 뜻 아닐까?
김영준: 맞다. 어쨌든 대중음악 틀 안에 있으니 어쩔 수 없이 타협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4분 넘어가면 일단 방송이나 라디오에서 안 틀어주니까. 그래도 이젠 하고 싶은 음악을 할 수 있는 때라고 본다. 기타 솔로를 피해야겠다고 느끼면서도 욕심을 내서 넣기도 한다. 싱글 버전은 관객을 위한 편집이고, 앨범 버전은 나와 우리를 위한 편곡이다. 사실 솔로를 넣는 건 이현영 몰래 작업했다. (웃음) 과거에 하지 못했던 것들을 하고 있다.
이현영: 싱글 컷 될 당시에는 대부분 3분 전후였다. 앨범이 나오고 처음 듣는데 작업했을 때랑 완전히 달라서 놀랐다.
엔딩곡 ‘Maybe tomorrow’에서는 김영준이 10년 만에 보컬로 참여했다. 오랜만의 가창인 만큼 떨리지 않았는지.
김영준: 8집에서도 ‘Anybody here’를 부른 적이 있다. 꼭 노래를 하고 싶다기보다 내 목소리를 하나의 소스처럼 활용하고자 5년 전부터 기획했다.
이현영: 왜 자꾸 내 자리를 넘보냐고 엄청 말렸다. 김영준의 목소리에 매력적인 브리티시의 색깔이 있다고 인정은 하지만 개인 앨범을 준비하기도 했고 거기에 더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더더와는 좀 동떨어진다고 얘기했다.
오랜 시간 활동 중인 대선배로서 최근 록과 인디 신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김영준: 리코딩 수준으로 볼 때는 굉장히 올라왔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정말 빠르게 발전했다. 예술가의 마인드나 마케팅 방식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창피한 퀄리티도 꽤 있었고 앞으로 세대교체도 힘들 것으로 생각했다. 근 2~3년 사이에 어떻게 이렇게 바뀌었나 싶을 정도로 나 역시도 놀랐다.
이현영: 맏이가 ‘이랑이(LeeRang_E)’라는 팀으로 음악을 하고 있다 보니 나도 젊은 친구들을 통해 많이 배우고 있다. 요즘 아이들 정서에는 이런 음악이 맞는 건가 하다가도 젊은 층에서도 1990년대 음악을 찾아 듣는다는 얘기에 희망을 품는다.

1집부터 10집까지 중에서 김영준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동시에 작가로서 인정하는 곡을 앨범마다 1개씩 골라주면 감사하겠다.
김영준: 우선 1집 < The More The Better >는 ‘만지지 마’. 첫 타이틀이었고 < 이소라의 프로포즈 >에서 틀어줘서 알려졌다. 다음은 < The One & The Other >의 ‘아무 소용없어’. 사라 맥라클란의 < Surfacing >에 있는 ‘Building a mystery’를 참고해 만들었다. 여러 파트가 한 번에 뭉쳐 하나의 하모니를 이루는 게 예술이다. 그리고 3집 < The Man In The Street >에서는 ‘I never’를 뽑겠다.
4집 < The The Band >는 작업이 참 힘들었다. 역변의 시간도 많았고 회사도 이때 문을 닫았다. 상을 받았는데 화환이 갈 곳도 없었다. 노래는 ‘You’가 기억에 남는다. 5집부터 이어가자면 < The Music >은 ‘I’m gonna miss you’, < Half The Time >과 < How Many Times >는 각각 동명의 곡을 소개하고 싶다. 이현영이 처음으로 합류한 8집 < Anybody Here >는 선싱글이 ‘I stay’였지만 그것만큼 ‘Baby I know’를 아낀다.
이현영: ‘Baby I know’는 음색 내기가 어려웠다. 10년을 날카롭게 다듬어놨더니 다시 부드럽게 부르라니. 반가성으로 힘을 빼면서 이것도 그나마 부드럽게 부른 거다. 녹음은 잘 됐지만 라이브가 쉽지 않았다. 음향 자체를 따뜻하게 잡아주는 게 중요한데 현장마다 사운드 전부 차가워서 곤욕을 치렀다.
김영준: 이어서 9집 < Have A Nice Day >는 ‘Do you know me’, 9.5집 EP < Dramatic Irony >는 개인적으로 ‘Black horse’를 좋아하지만 ‘Colors’를 추천한다. 2개월 전 나온 10집 < The Mast >에서는 같은 제목의 ‘The mast’를 선정한다.
이즘 공식 질문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인생 앨범, 곡, 아티스트를 편하게 말해 달라.
이현영: 7살 때 처음 노래를 하면서 김범룡의 ‘바람 바람 바람’으로 노래자랑에 나가 인기상도 받았다. 꼬맹이 시절이라 뭔지는 몰랐지만 이 곡에 엄청 꽂혔다. 이선희도 좋아했고, 이상은의 ‘담다디’를 들으며 자연스럽게 댄스 가수의 꿈을 꿨다. 이후 김영준을 만나 살면서 음악을 제일 많이 들었다. 오디션에서도 음악만 들려줬다. (웃음) 연습해 오라고 추천했던 것 중 셰릴 크로우의 ‘If it makes me happy’와 코어스의 ‘So young’이 기억에 남는다. 더더에서 가장 처음 불렀던 ‘I stay’도 뽑고 싶다.
김영준: 인생을 바꿔준 아티스트는 역시 메탈 밴드다. 샤크 아일랜드의 ‘Somebody’s falling’ 때문에 헤비메탈을 하던 시점에서 인생이 한번 확 뒤집어졌다. 프리티 메이즈 같은 경우는 꽃미남 밴드인데 이런 팀을 보면서 밴드에 대한 꿈을 키우고 록시트까지 넘어왔다. 브리티시 인베이전 시절에 와서는 브릿팝을 미친 듯이 찾아 듣다가 밴드 스미스와 모리시를 접하면서 ‘더더’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진행: 임진모, 임동엽, 한성현, 박승민
정리: 임동엽
사진: 한성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