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그의 채널에 있는 네 편의 뮤직비디오, 아니 4화까지의 시트콤을 보고 오자. 혹자는 눈물을 쏟고 자아를 나누는 감쪽같은 속임의 연기보다 누군가를 웃게 만드는 코미디 연기가 훨씬 어렵다고 말한다. 우린 칼을 대는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인상을 쓰고, 고달픈 설정일수록 마냥 애처롭다. 그러나 웃음은 그 어떤 우스꽝스러운 모습에도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되레 기괴할 뿐이다. 위 지론이 맞다면 박문치의 첫 번째 정규 음반 < 바보지퍼 >는 높은 난도의 그것을 성취한 결과물이다. 그가 가진 개구쟁이 이미지와 흘러간 시대의 무언가를 택해 자기 명찰로 바꿔버리는 익살에 익숙하다고 생각했으나 이토록 ‘대놓고 웃겨보겠습니다’ 식 접근은 놀랍다. 핵심은 억척스럽지 않다는 점. 연출의 승리, 음악의 공적이다.
그 시절 시트콤을 사랑했던 까닭은 그들이 우리와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옆 동네에서 벌어질 법한 일들, 조금은 특별한 사건, 장대한 세계관과는 어울리지 않는 등장인물. 음악으로 이를 표현할 수 있다면 어떨까. 박문치는 이곳에서 시작했다. 에피소드의 출항을 알리는 ‘Put your zip up!’은 최엘비의 래핑에 힘입어 힙합 그룹 45알피엠의 ‘즐거운 생활’을 연상케 하고, 조유리의 직선적 보컬과 왁스의 ‘오빠’를 결합한 ‘Code: 광(光)’이 뒤따른다. 대중이 기대하는 존박의 알앤비 무드를 그대로 복원한 감동 클리셰 ‘Love theme’까지 단시간만에 회차마다 등장하던 단골 소재를 소리로 그린다. 각 곡마다 확고한 레퍼런스가 있으니 자기 입맛대로 버무려 따라가면 그만. 유치와 재치의 한끗 차 경계를 호쾌하게 비켜 갔다.
무자비한 길이에 진절머리 났던 익숙한 목소리의 광고를 그대로 가져와 작정하고 폭소를 노린 스킷 트랙, 이를 지나 등장한 ‘불청객’의 개입은 절정이다. 박문치가 걸어온 음악적 행보를 떠올릴 때, 앞선 곡들은 약 20년 내에 위치하며 비교적 가깝다. 극 흐름상 선명한 대비를 위해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여타 아티스트의 손길이 아닌 자신이 속한 박문치 유니버스의 몫으로, 장르 또한 고유의 인상에 맞춰 1990년대 초반 국내 가요 속 점차 얼굴을 내민 베이스 중심의 뉴웨이브 사운드를 선택, 어쩌면 빛과 소금의 음악에 탯줄을 대고 있는 듯 반갑다. 노련하다. 파티 힙합 기조의 오프닝이 있다면 엔딩곡도 중요한 법, ‘한 편짜리 작품’을 전제한 의도에 발맞춰 크레딧을 넘기듯 모든 출연진과 함께 부른 패밀리 넘버 ‘Good life’는 대미를 수놓는 간결하고도 떳떳한 방식이다.
앨범 단위로의 높은 완성도를 지녔다고 말하는 작품은 크게 두 성격으로 나뉜다.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의 몸처럼 움직이는 유기성에 집중하거나 각각의 뚜렷한 싱글을 한데 모아 이질감 없이 배치한, 이른바 명절 종합 과자 선물과 같은 형태를 마련하는 것이다. 양자를 호평의 영역 속 각 극단에 두고, 수작이라 불리는 수많은 열매는 이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도 이곳에선 그 자체로 매력적이지만, < 바보지퍼 >는 다르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평형 상태. 비디오 요소의 어깨를 빌렸으나 이를 제하고도 온전한 음악으로 승부가 가능하다. 철학도, 예능도 하나의 테마이자 소재일 뿐 결국 어떻게 자기 색을 구현하는가에 모든 게 달렸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만, 지금처럼만 내달린다면 웬만해선 박문치를 막을 수 없다.
-수록곡-
1. Put your zip up! (Feat. 최엘비) [추천]
2. Code: 광 (光) (Feat. 조유리)
3. Love theme (Feat. 존박) [추천]
4. Bah! (Feat. 이진아, 스텔라장)
5. 바보지퍼 광고 (75”)
6. 불청객 (Feat. 박문치 유니버스) [추천]
7.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8. Good life [추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