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프로듀서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상 이름값으로 그래미 올해의 음반 트로피를 받아 간 < Midnights >부터 새어 나온 지루함에 대한 불평은 오랜 파트너 잭 안토노프를 향했고, 31곡을 전부 듣기조차 곤혹인 < The Tortured Poets Department >에서 반발은 극대화되었다. 눈치 하나는 잽싸게 살피는 인물답게 신보의 셀링 포인트를 < 1989 >의 일등공신 맥스 마틴과 셸백의 참여로 내걸었으나 실상은 참담하다. < The Life Of A Showgirl >이 보여주는 것은 곧 한 뮤지션의 고갈되어가는 창작력이다.
새 앨범을 두고 테일러 스위프트는 화려한 비주얼과 함께 ‘팝’으로의 복귀를 암시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텁텁한 음색과 먹먹한 드럼, 맥없이 고꾸라지는 멜로디 모두 전성기에 비해 한참 떨어지지만 ‘The fate of Ophelia’는 그나마 메인 싱글로서 신경을 쓴 티가 나는 편이다. 오래 가지는 못한다. 난데없이 드세지는 ‘Elizabeth Taylor’의 후렴은 굉장히 당황스럽고, 어쿠스틱 기타로 < Red > 이전 커리어를 반추하게 하는 ‘Opalite’가 간신히 수습을 마치자마자 팝은 바로 퇴장. 나머지는 다시금 흐느적거리는 음악의 행렬이다.
< Lover > 당시 피어난 위기론을 아티스트로서의 인정 욕구로 뒤엎은 < Folklore >를 기점으로 테일러 스위프트는 진지한 아티스트 이미지를 얻어내며 왕좌에 올랐다. 이것이 독이 든 성배였을까, 조악한 퀄리티를 정의감 마케팅으로 무마한 재녹음 시리즈의 성공 이후 그의 음악은 고착화되고 있다. ‘Father figure’나 ‘Wi$h li$t’를 보자. 가창력으로 승부하는 가수는 원래도 아니었으나 좁은 음역의 한계로 음정이 조금이라도 높아지는 즉시 가성으로 처리하는 작법의 답습이다. 내용 면에서도 그렇다. 공감 능력이 특히 발달한 팬이 아니고서야 ‘Ruin the friendship’의 로맨스는 목적어가 현 약혼자인 미식축구 선수 트래비스 캘시, 1975의 보컬 매튜 힐리, 혹은 그의 옛 런던 보이 배우 조 알윈이든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칼을 간 순간이 있기는 하다. 찰리 XCX를 공공연하게 저격한 ‘Actually romantic’이다. 그러나 대형 스타의 옆에서 느끼는 열등감을 격렬한 전자음으로 토해낸 ‘Sympathy is a knife’와 달리 1990년대 인디 록 기타를 노래방 반주처럼 편곡한 트랙은 호승심을 원동력으로 삼기엔 이제 그가 너무 둔해졌다는 현실을 폭로한다. 실제 뒷이야기는 모르지만 음악으로만 본다면 고뇌, 분노, 좌절의 복합 심리를 단순 시비로 응수하는 가사가 거만하고 유치할 뿐이다. 적으로 규정한 상대를 온 힘을 다해 깔아뭉개다가 불리해질 때는 여성주의 카드를 꺼내며 피해자 신분을 호소하던 수법도 통하지 않는 판이 있다.
대단원의 인사가 무색하게 테일러 스위프트는 이 음반에서 딱히 쇼걸도 아니고, 그가 논하는 삶도 기껏해야 부유한 친구들을 옆에 낀 채 벌이는 패거리질이나 성생활이 대부분이다. 자아 비대증이 정점을 찍은 ‘Cancelled!’의 비장한 현악 세션은 차라리 약과다. 곳곳에 교성을 심어둔, ‘허벅지를 여는’ 애인을 향한 남근 찬가 ‘Wood’는 민망함에 소름이 밀려올 정도다. 허황된 비유를 일삼는 자신의 작사법을 직접 패러디하며 대세 사브리나 카펜터를 따라잡으려 하나 대상이 특정되어 있으니 유쾌함 대신 옆자리 전화 통화로 전해 듣는 너스레 같은 불쾌함만이 가득하다.
사실 앨범을 둘러싼 온갖 왈가왈부는 아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빌보드 싱글 차트 줄 세우기에 연이어 성공하고, 아델의 기록을 깨기 위해 숭배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첫 주 41종의 버전을 발매하는 이의 눈에 대체 무엇이 더 들어오리요. 팬덤의 고혈을 쥐어짜며 환경 문제를 촉발하든 그 어떤 것도 상관없다. 음악이 충분히 쌓이지 않았고 콘셉트가 뜬구름 잡는다 한들 빠르게 컴백을 준비, 당장의 숫자만 남겨놓으면 그만이다. 그렇게 테일러 스위프트는 갈수록 K팝을 닮아간다. 그것도 매우 수치스러운 쪽으로.
-수록곡-
1. The fate of Ophelia [추천]
2. Elizabeth Taylor
3. Opalite [추천]
4. Father figure
5. Eldest daughter
6. Ruin the friendship
7. Actually romantic
8. Wi$h li$t
9. Wood
10. Cancelled!
11. Honey
12. The life of a showgirl (Feat. Sabrina Carpenter) [추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