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함이 빚어낸 아름다움, 제임스 블레이크 내한 공연
제임스 블레이크(James Blake)

UK 덥스텝의 총아에서 팝의 중심이 된 제임스 블레이크의 디스코그래피는 그야말로 변화무쌍하다. 충격적이었던 세 EP < The Bells Sketch >, < CMYK >, < Klavierwerke > 뒤로 15년간 내놓은 6장의 정규 앨범은 그의 넓고 깊은 음악 세계를 그대로 투사한다. 공교롭게도 그는 행보의 분기점마다 한국을 방문해 왔다. 셀프 타이틀 발매 이후 헤드라이너를 맡은 2012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 < Overgrown >을 통해 알앤비로의 방향 전환을 이뤄낸 2014년의 단독 공연, 메인스트림 힙합의 손을 잡은 < Assume Form >과 홀리데이랜드 페스티벌 2019까지. 그리고 여섯 해가 지나 다시금 조우의 시간이 다가왔다.

왼쪽부터 에어헤드, 미스터 어시스터, 제임스 블레이크
근작 < Playing Robots Into Heaven >는 제임스의 모든 노하우가 집약된 작품이다. 출발점인 UK 덥스텝부터 투스텝 개러지와 웡키를 아우르는 너른 장르 위로 목소리를 능란하게 조절하는 광경은 그가 어느새 원숙한 베테랑으로 거듭났음을 체감하게 만들었다. 이날도 마찬가지로 음반과 동명의 마지막 트랙으로 시작했지만 전체적인 세트 리스트는 커리어 전반을 총망라한 편에 가까웠다. 좌측에 위치한 에어헤드(Airhead)가 일렉트릭 기타와 모듈러 신시사이저를, 중앙의 미스터 어시스터(Mr Assister)가 드럼을 연주하는 분배 아래서 세 음악가는 서서히 그리고 정교하게 요소 하나하나를 구현해 냈다. 제임스 자신도 ’노트북만을 이용하는 일반적인 전자음악 공연과는 다르다‘고 밝혔듯 극도로 정갈한 짜임새였다.
제임스 블레이크라는 아티스트의 재능을 두 가지로 나누어 보자. 첫 번째로는 단연 압도적인 프로듀싱 능력, 다음으로 데뷔 당시의 센세이션에 가려졌던 뛰어난 보컬이 떠오를 것이다. ‘Overgrown’으로 포문을 연 후 ‘Fall back’과 ‘Loading’을 잇는 구간에서 목소리를 하나의 악기로 활용하는 프로듀서로서의 강점이 빛을 발했다. 상이한 색채의 ‘Mile high’를 디제이 세트처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전환 또한 그의 뿌리를 실감케 하는 장면이었다. 더욱 극적인 편곡이 돋보였던 ‘Tell me’와 ‘Voyeur’도 빼놓을 수 없겠다. 약간의 실수가 커다란 불협화음을 낳을 수 있는 전개였지만 이들은 오래 합을 맞춘 세월만큼 그 견고함을 끝까지 유지했다. 중간 드럼 박자가 미묘하게 밀려 생겨난 유일한 어긋남마저도 한 번의 눈 맞춤을 거쳐 잡아낼 정도로 말이다.
이어 훌륭한 보컬리스트의 면모 역시 여러 레퍼토리로 드러내 보였다. 히트 넘버 ‘Retrograde’와 적극적으로 떼창을 유도한 < Friends That Break Your Heart >의 수록곡 ‘Say what you will’은 신시사이저와 육성이 발맞춰 어우러지며 환상적인 감흥을 자아냈다. 한편 두 밴드 멤버가 잠시 쉬어간 ‘Godspeed’와 ‘Vincent’에서는 오롯이 제임스의 목소리와 키보드만이 빈 공간을 꽉 채웠다. 둘 다 팬데믹 초기 그의 자택에서 진행했던 인스타그램 라이브에서 처음 선보였던 커버로, 보컬 본연의 맛을 살리는 단출한 구성에서 원곡과는 다른 감동이 와닿았다. 수많은 팝스타가 그를 찾는 이유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지점이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중반부에 자리한 ’Stop what you’re doing’ 리믹스와 ‘Like the end’가 방점을 찍었다. 각각 2009년과 2024년 발매해 경력의 양 끝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순수한 클럽 뱅어와 라디오헤드 풍의 아트 록이라는 스타일 면에서도 그러하다. 완전히 상반된 자극으로 순식간에 몰입을 끌어 내는 노련함의 발현이었다. 무대의 일등 공신이었던 조명도 눈앞이 아찔해지는 섬광을 내뿜으며 환희에 빠지는 것을 도왔다. 넋을 놓고 감상하는 쪽에 가까웠던 관객석의 분위기도 이때만큼은 마치 클럽 플로어 혹은 페스티벌에 가깝게 달아올랐다.
미공개 곡 ‘Trying times’와 많은 팬이 고대했을 ‘The Wilhelm scream’으로 막을 내린 후에도 제임스는 바로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앞쪽으로 나와 정중히 인사한 그는 관객들이 챙겨온 음반과 머천다이즈, 심지어 티켓에까지 계속해서 사인을 남기며 교감을 나누었다. 30분가량의 급작스러운 즉석 팬 미팅이 열린 셈이었다. 내한한 뮤지션들이 으레 외치곤 하는, 다시 공연할 수 있어 즐겁고 조만간 돌아오겠다는 말이 단순한 겉치레로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었다. 또 스트리밍과 AI 음악의 불공정에 맞서는 투사 제임스 블레이크가 아닌, 자신의 작품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감사를 전하는 한 행복한 예술가를 목격했던 순간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