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의 시작을 견인한 뉴웨이브의 물량공세에 권태를 느낀 대중은 기계음에 매몰되지 않고 사람 냄새 가득한 소리를 다시금 떠올렸다. 그 결과 포크 음악이 재부상하며 조금이나마 유행의 겉치레를 거둘 수 있었고, 인종과 성별에 관계없이 어쿠스틱 기타 하나만으로 세상을 노래하는 젊은 음악가들이 속속 이름을 알렸다. 2년 전 컨트리 가수 루크 콤즈(Luke Combs)의 커버로 빌보드 싱글 차트 2위까지 올랐던 ‘Fast car’의 원곡자 트레이시 채프먼과 함께 당시 중심에 섰던 이가 바로 수잔 베가다.
1987년 발표한 소포모어 앨범 < Solitude Standing >은 명실상부 그의 대표작이다. 물에 젖은 듯 수분감 가득한 목소리로 아동 학대의 현실을 꼬집으며 3위의 성과를 기록한 ‘Luka’와 발매 당시에는 호응이 적었으나 1990년 영국의 전자음악 듀오 디엔에이의 리믹스로 역주행에 성공한 ‘Tom’s diner’가 이곳에 실려있다. 후자의 경우 국내에서도 사랑받은 폴 아웃 보이의 ‘Centuries’나 조르지오 모로더와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호흡으로 클럽 등지에서 히트한 재해석본은 물론 최근 아이브의 ‘Attitude’에 샘플링되는 등 세대를 잇는 영속을 뽐내고 있다.
첫 음반이 발매된 지 꼬박 40년이 되는 날 의도적으로 내놓은 열 번째 작품 < Flying With Angels >는 상기한 시절 그의 모습을 그대로 머금고 있다. 명함과 같은 음성으로 현재를 노래한다는 소신이다. ‘Speaker’s corner’는 정치적 신념과 그 무게감을 다룬 1986년 싱글 ‘Left of centre’와 같은 맥락 위에서 사회의 절대다수, 보통 인간의 공존을 제창하는 한편 언론의 자유를 바라보는 양단의 반응 사이 민중의 혼란을 부르짖는다. 영국 록 밴드 스미스의 ‘Stop me if you think you’ve heard this one before’을 연상케 하는 밝은 울타리로 포장한 무거운 알레고리는 기억 속 수잔 베가의 그것과 동일하다.
‘코로나19에 잠식된 풍경, 바삐 움직이는 구급차 / <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의 갱단, 설치류의 삐거덕거리는 소리 / 우리가 그것과 무엇이 그렇게 다른가’. 풍자의 노랫말을 앞세운 ‘Rats’와 지난한 체력전을 계속하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직격한 ‘Last train to Mariupol’, 밥 딜런의 1966년 곡 ‘I want you’의 문장을 비틀어 새 시대의 연대를 소망하는 ‘Chambermaid’까지 수잔 베가는 처량할 정도로 차분한 음색에 단단한 이상을 포갠다.
공감, 이해, 연대, 평화 그리고 사랑. 열 곡을 통과하는 여정 속 어두운 단어의 빈도만큼이나 많이 실린 낱말의 면면이다. 실연자의 실제적 성향을 떠나 아직 음악이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믿음과 그간 걸어온 길을 되돌아 자신의 입지를 행동으로 옮긴 담대함, 메시지 간의 명도 차를 직관적으로 표현한 음악 등 각각의 요소를 규합해 가치의 중대를 그린다. 물론 뻔하고, 반복적인 트랙도 존재하나 그렇지 않은 곡이 선물한 감동의 크기가 그보다 크다. 변함없는 수잔 베가가 반가운 동시에 마찬가지로 달라지지 않은 세상이 아픈 형국. 닳도록 들었을 교훈일지라도 꼭 필요한 이야기가 한데 모였다.
-수록곡-
1. Speaker’s corner [추천]
2. Flying with angels
3. Witch
4. Chambermaid [추천]
5. Love thief
6. Lucinda
7. Last train from Mariupol
8. Alley
9. Rats [추천]
10. Galw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