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읽다 멈춘 곳에 꽂았으나 오랜만에 펼쳐본 탓인지 지나온 페이지가 기억나지 않는다. 앞부분부터 다시 살피기에는 책이 너무 두꺼워져 그조차도 쉽게 택할 수 없다. 딱 잘라 여기서부터인지 분간하기도 어렵다. 꾸준함으로 획득한 ‘국민가수’ 칭호에 취해버린 탓일까. 아니면 직접 열연하여 인기를 끈 드라마 < 폭삭 속았수다 >의 아날로그 후광을 이으려는 조급한 야심 때문일까. 물론 둘 다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바라보는 시각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결국 견고하지 못한 음악 속 갈피를 잃은 시리즈의 정체성에 있다.
본질은 선택과 해석 그리고 소개다. 더구나 대중은 세 단어 앞에 숨은 ‘아이유만의’란 수식을 응시한다. 누구보다 부담스러울 환경도 프로젝트의 발자취가 분명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를테면 조덕배의 어투를 대체한 ‘나의 옛날이야기’, 양희은의 문법을 대신한 ‘가을 아침’, 교체보단 화합을 택한 김창완과의 ‘너의 의미’는 음악의 무게를 줄인 만큼 전달의 밀도를 높여 현세대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아울러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와 ‘여름밤의 꿈’에서는 원곡을 품은 말끔한 재해석이 돋보였고, 동시에 김광석이나 김현식, 정미조, 산울림 등 우리 가요의 지반을 확인하며 작품의 중심을 다잡았다.
그것은 곧 젊은 거장의 아우라를 체득한 아이유만의 언어였다. 비록 < 꽃갈피 둘 >이 전작에 비해 보컬 뽐내기에 치우치며 각색의 비중이 옅어졌다 하더라도 그만큼 확실한 가창과 선정의 매력이 남았기에 맥을 이을 수 있었다. 조건의 빈틈 속에서도 그 의도와 결과가 적절히 교차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은 그렇지 않다. 그간의 문법도, 새로운 제스처도 자취를 감췄다. 연작 중 현재 시제에 가장 가까운 선곡 내 원품은 고사하고 실연자까지 지워낸 애석함만이 얼굴을 비춘다.
‘Never ending story’처럼 세대를 아우르는 메가 히트곡은 그 자체로 안정감을 담보하나 재구성의 여지가 부족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재조립 의지 없이 내재된 기억과 동일한 잔상으로 일관한다. 더구나 그 주인이 이승철 아닌가. 원치 않았을 비교 또한 이제는 감수해야 할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강렬한 원색의 ‘네모의 꿈’과 ‘Last scene’ 역시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유영석의 생기와 조원선의 맵시를 따라가기에 급급하다. 그사이 자리잡은 ‘10월 4일’도 서태지의 감각으로 ‘소격동’을 되새길 뿐이다. 이곳에 원슈타인의 음색, 이상순의 연주, 수민과 슬롬의 편곡이 들어설 공간은 없다.
한창 주가를 달리고 있는 얼터너티브 K팝 그룹 바밍타이거와 발을 맞춘 ‘미인’은 Z세대를 겨냥한 전자음 질감에 매몰된 모양새로 원곡을 거둔다. 곡 끄트머리에 등장한 멤버 소금이 눈길을 끌지만 이렇다 할 특점 없이 힘을 받지 못한다. 오히려 이를 제외한 다섯 곡이 ‘아이유의 노래방’과 다를 바 없는 허영의 경계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니 ‘미인’이 도드라져 보이기까지 한다. 만약 이 곡이 마음에 들었다면 일찍이 바밍타이거를 좋아했을 공산이 크다. 그 이상의 연령층에는 닿지 못할 접근과 완성도로, 이는 곧 꽃갈피 이어짓기의 잃어버린 골자를 증명한다.
지금껏 한해도 쉬지 않고 달려온 그에게는 선배들의 명곡을 소생시켜야 한다는 책무도, 오늘날 실력 좋은 후배들의 이름을 알려야 할 사명도 없다.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보이는 건 멈춤을 잊어버린 성급한 속도만이 남은 탓이다. 만약 상기한 의무감에서 비롯된 결정이었다면 타성에 젖어 채비도 안 된 채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과 다름없다. 복고 드라마의 노골적 후속이라는 고까운 소리를 구태여 들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쉼표의 의미는 다르게 연주하라는 뜻이 아닌 다음 박자를 위해 호흡을 가다듬으란 말과 같다. 새 숨이 필요한 상황. 아이유에게 양이 중요한 시기는 이미 지났다.
-수록곡-
1. 빨간 운동화
2. Never ending story
3. 10월 4일
4. Last scene (Feat. 원슈타인)
5. 미인 (Feat. Balming Tiger)
6. 네모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