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행을 좇기보다 자기 세계 구축에 힘쓴다. “’밤양갱’은 길을 걷다 천만 원을 주운 행운” 같은 거라며, 한 번 더 일어나길 바라는 건 과한 욕심이라 일축한 비비는 다시 태초의 욕망을 솔직하게 뱉길 택했다. 방앗간의 정겨운 내음을 방아 찧기의 에로틱한 은유로 변모시킨 ‘책방오빠 문학소녀’가 적절한 예시. 책에 대한 메타포를 ‘몸’에 이식하며 홍조를 띠게 만드는 그의 작사 기술이 걸출하다. 상투적인 소재로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작가주의 표현법이 < Eve: Romance >의 테두리를 휘감았다.
‘종말의 사과나무’부터 ‘왔다갔는교’까지가 사실상 타이틀 곡들이라 언급한 자신감을 품을 만했다. 내진설계가 탄탄한 건물처럼 흔들리지 않고 편안한 청취를 이끈다. 도입부터 직설과 외설을 끊임없이 토해내는 비비의 모습은 작년의 히트 싱글만을 기억한 이들에겐 의외일 수도 있으나, 꾸준히 듣던 청자들에겐 사랑스러운 복귀다. < 인생은 나쁜X >의 산뜻한 터치에 더 큰 여유를 준 첫 트랙부터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나 돌아왔어!”
잔잔한 기타 위에 유려한 편곡, 사실적인 가사를 덧댄 ‘홍대 R&B’는 아릴 만큼 강하다. 밝아 보이는 서울 하늘 아래 찌든 내 나는 공허한 그림자를 포착한 이 곡은 노래라기보다 다큐멘터리다. 어느 누가 어두운 현장감을 이토록 겁 없이 조명할 수 있을까. 비비는 동일한 밤을 다양하게 내비쳐 보는 시각 역시 갖췄다. 기류, 정취를 관찰한 초반 곡들과 달리 달에 집중하며 밝은 면을 일깨운 ‘한강공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등장한 슬픈 꿈을 시원한 시티 팝에 담은 ‘왔다갔는교’는 ‘밤양갱’과 다른 전체이용가를 재생하며 폭넓은 스펙트럼을 느끼게 한다.
힘을 과하게 싣지 않아 ‘나쁜X’만큼의 강렬함은 없어도 느슨한 자유가 존재하는 앨범이다. 박동 같은 리듬감의 비트에 안정된 매력이 있는 멜로디를 채운 ‘Sugar rush’ 그리고 K팝/힙합에서 독보적인 디테일을 자랑하는 프로듀서 프랭크(FRNK)가 만든 필드에서 뛰노는 ‘데레’ 등 뛰어난 트랙이 많다. 데뷔 EP부터 이전 정규작 < Lowlife Princess: Noir >까지 단편 소설처럼 전개를 일관성 있게 가져가면서도 퀄리티 모두를 놓지 않는 노련함이 해가 갈수록 쌓여간다. 양면적 구조의 두터운 14곡 사이 제공하고자 한 외설(猥褻)과 내설(內說) 모두 선명하고 또렷하다.
-수록곡-
1. 종말의 사과나무 [추천]
2. 홍대 R&B [추천]
3. 몸
4. Pygma girl
5. 책방오빠 문학소녀 [추천]
6. Sugar rush [추천]
7. 데레 [추천]
8. Burn it (Feat. DEAN)
9. Real man
10. 왔다갔는교 [추천]
11. 밤양갱
12. 한강공원 [추천]
13. 행복에게
14. 겨울 (미발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