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 인터뷰
김종서
국산 메탈 걸작으로 칭송받는 시나위 2집 < Down & Up >는 김종서 이름 석 자를 한국 록 역사에 아로새겼다. ‘겨울비’와 ‘대답 없는 너’ 같은 록발라드로 1990년대 대중가요의 대변자로 부상했으며 ‘아름다운 구속’은 발표 30년에 다다른 지금도 후배 뮤지션과 대중들에 의해 소환되고 있다. 본진인 록에 발라드와 힙합 등 다채로운 스타일의 “하이브리드 미학”으로 카멜레온처럼 변화한 디스코그래피는 "음반 예술의 천착"이란 일생 목표를 가리켰다. 굵직한 대표곡 이외의 상상 이상으로 다채로운 음반 수록곡을 챙겨야 하는 이유다.
음악가로서 대부분 굵직한 항목을 성취한 그의 눈은 미래를 응시했다. 원곡과 확연히 다른 질감의 신작 ‘달팽이’로 대중의 사랑을 다시금 포획한 그는 소극장 콘서트 < 모두의 김종서 >를 진행했던 작년처럼 올해도 공연의 해가 될 것임을 선포했다. 각종 음악 경연 프로그램에서 거둔 또렷한 성과는 철저한 자기 관리의 산물이며 콘서트의 고품질과도 상통한다. 프로듀서로서 곡과 음반 만들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그는 정규 10집을 향한 의지도 내비쳤다. 그 순간의 눈빛에 마음속 강한 신뢰감이 번졌다. 전신이 음악으로 가득 차 있는 김종서임을 알기에.

2025년 1월에 나온 신곡 ‘달팽이’의 반응이 좋다. 이적이 원래 자기 곡을 잘 허락 안 해주는 것으로 아는데 곡을 어떻게 받아낸 것인가?
가사와 선율이 준 감동에 발매 연도인 1995년부터 좋아했던 곡이다. 약 10년 전 이적에게 리메이크 얘기를 꺼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작업을 미루다가 작년에 다시 전화를 건 끝에 승낙을 얻어냈다.
패닉의 ‘달팽이’와는 확연히 달랐다.
노랫말의 전달로 방향성을 잡다 보니 고음과 클라이맥스 없는 편곡이 되었다. 행간의 의미가 중요한 노래라 끝 음과 호흡을 신경 썼다. 평소 익숙한 방식이 아니다 보니 녹음이 여러 차례 이어졌고 목에 약간의 피로도가 쌓인 상태에서 툭 내려놓고 부른 녹음이 외려 맘에 들었다. 심리적으로 지친 듯한 노래의 화자를 표현하기에 적합했다.
‘별이 빛나는 밤’과 ‘In my life’, ‘번외수사’ 같은 근작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은 무엇인가?
짧은 시간 작업한 것에 비해 결과물이 잘 나온 2019년도 ‘거북선’을 들고 싶다. 음향과 전체적인 곡 방향성 측면에서 원하는 대로 나왔다. < 복면가왕 >에서 터치드 윤민이 부른 덕에 인기도 높아졌다.
2023년 MBN에서 방영한 레전드 뮤지션 경연 프로그램 < 불꽃밴드 > 출연 소회를 듣고 싶다.
결과와 무관하게 말 그대로 즐기러 나간 프로그램이다. 예전에 활약했던 밴드들이 재등장해 관객과 시청자들에게 추억을 선물했다. 이러한 콘텐츠가 더욱더 확장되었으면 한다.
마찬가지로 2024~2025년 이어진 가요 전설들의 시리즈 콘서트인 < 1 to 10 >의 네 번째 에피소드에 참여했다.
‘그녀를 만나는 곳 100m 전’ 부른 가수 이상우 형님이 선후배 가수들을 한데 묶는 큰 역할을 했다. 아마 올해도 이어지지 않을까 한다.
2024년 10월 19-20일 홍대 구름아래소극장에서 펼친 < 모두의 김종서 > 등 공연에 열중했다.
그러고 보면 가수 김종서 이름으로 처음 공연한 곳도 대학로 소극장 “충돌”이었다. 이미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둔 들국화가 소극장 투어를 지속하는 모습을 보며 작은 무대에서 관객들과 교감하는 게 얼마나 특별한 일인지 느꼈다. 올해도 공연장 규모와 관계없이 팬들과 호흡하는 시간을 늘리려고 한다.
공연에서 자주 부르는 전인권의 ‘돌고 돌고 돌고’와 이번 ‘달팽이’ 등 리메이크가 잦다. 싱어송라이터 정체성이 강한 김종서라서 약간 의외로 느껴지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내 나이 또래 가수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가 많이 없고 한 가지 방편으로 경연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리메이크 작업이 불가피한 콘텐츠며 라이브 영상이 남긴 하지만 음원과 달리 휘발성 강한 점도 덜 부담스럽다. 젊은 아티스트들과 계급장 떼고 대결해 보자는 도전 정신도 있었다.
현재 KFN(국방 FM) < 김종서의 러빙유 >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 김종서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기본적으로 김기덕과 박원웅 등 라디오를 듣고 자란 세대에게 매체에 대한 애정이 크다. 1990년대엔 라디오에서 내 노래가 얼마나 나왔는지 수치가 중요하다 보니 매니저들이 음반을 라디오 방송국에 쫙 돌리고 다녔다. 그 당시에 디제이 제의가 몇 차례 왔지만, 워낙 음악 활동으로 바쁘다 보니 여유가 안 되었다. 그렇게 인연을 못 맺다가 최근 KFN에서 연락이 왔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주며 청취자들과 소통하는 게 큰 재미고 아무래도 연출이 개입되는 TV와 달리 내 진솔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낼 수 있다는 측면이 매력적이다.

1987년도 시나위 2집 < Down & Up >은 지금 들어도 연주와 사운드가 훌륭하다. 이 음반에 대한 자부심도 클 것 같은데.
헤비메탈을 하기 녹록지 않은 시기였는데도 짧은 시간에 우리들의 젊음을 여기에 불태웠다는 생각에 뿌듯하다. 무언가 이 땅에 할 수 없는 음악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음반 작업이 무척 행복했다.
현재 영화음악가 달파란으로 활약 중인 강기영(베이스), 필생의 음악적 동반자 김민기(드럼) 사이의 음악적 연구가 깊었고 유학파 엔지니어의 공력이 더해져 1987년 상황으로 보면 나오기 힘든 밀도 높은 작품이 탄생했다. 신대철은 물론이고 강기영과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김민기의 연주도 대단했다. 나만 빼고 다 잘한 것 같다. (웃음)
음악적 관점 차이로 시나위 3집 참여가 무산되었고 한동안 향후 솔로 활동을 위한 곡 작업에 매진했다. 갑작스러운 신대철의 연락에 송파구 문정동 부근 우드스탁이라는 클럽에서서 리허설을 참관했다. 오경환이 드럼을 치는 가운데 날렵한 몸매에 긴 머리로 얼굴을 가린 베이스 기타리스트가 눈에 띄었고, 개성 넘치는 연주에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신대철의 리허설 초대도 은연중에 밴드 재가입을 권유하는 듯했고 결국 다시 시나위에 들어와 < Four >를 작업했다. 당시 서태지의 음악적 공헌은 베이스 연주에 그치지 않았다. 코러스 쌓기를 비롯한 각종 음악적 아이디어가 4집에 반영되었다. 기존 멤버들의 내공에 새로운 활기가 추가된 꽤 완성도 높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시나위 시절 가장 만족스러운 트랙은 무엇이었나?
‘빈 하늘’에서 당시 추구하던 보컬을 원없이 구사했고 샤우팅도 마음대로 내지른 것 같다. ‘해 저문 길에서’도 아끼는 곡이다. < Down & Up >에 모든 에너지를 분출했다.
로버트 플랜트와 지미 페이지, 스티븐 타일러와 조 페리처럼 기타리스트와 보컬리스트의 관계는 특별하다. 그간 작업했던 기타리스트 중 음악적으로 가장 잘 맞았던 이는 누구인가?
단연 신대철이다. 개인적으로 블루스 기반의 기타리스트를 좋아하며 신대철의 블루스 연주는 톤과 필링에 있어서 천의무봉의 경지다.
1990년대 초중반 환경보전 캠페인 < 내일은 늦으리 > 시리즈가 큰 인기를 끌었다.
신해철과 그의 소속사 대영 AV 주도로 기획된 작품이고 나는 1, 2, 3회에 참여했다. 요즘에는 매니지먼트가 확실하다 보니 가수끼리 친해지기 쉽지 않지만, 그 당시만 해도 사석에서도 교류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해철의 리더십을 중심으로 공일오비와 서태지와 아이들, 봄여름가을겨울 같은 음악가들이 뭉치게 되었다. 좋은 취지의 공연이라 아직도 회자하는 것 같다.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공연도 상당히 화제였고 MBC에서 방영도 했다. 나와 서태지가 아이들이 마지막 순서를 장식했는데, 머리 길이를 탐탁지 않아 하던 어느 관료에 의해서 방송국에 압력이 들어갔고, 결국 내 분량이 삭제되었다.
솔로 시절 기억에 남는 곡을 몇 작품 간추린다면?
‘겨울비’를 수록한 2집 < Petsdn 2 >에서 핑크 플로이드풍 프로그레시브 록적으로 접근한 4부 구성 ‘어머니의 노래’는 환경 파괴의 주범인 전쟁을 반대하는 메시지다. ‘Plastic syndrome’이 실린 4집 < Thermal Island >의 ‘Free style’은 서태지와 음악 파일을 주고 받으며 작업했고 그의 2001년 라이브 앨범 < 태지의 화(話) - Live Album 2000-2001 >에도 실린 우정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이다.
본 조비처럼 밴드 “김종서”로 5집에서 합을 맞춘 타미 킴(기타)-김민기(드럼)-김영진(베이스) 라인어이 그대로 간 6집 < Seeds >에 그대로 이어졌다. ‘서바이벌 게임’과 ‘중독’에 비해 대중적인 ‘Epilogue(에필로그)’ 는 고음을 바라는 팬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로맨틱한 노랫말에 스카와 비틀스를 결합한 ‘러빙유’가 실린 7집은 타워 오브 파워와 작업했던 혼섹션 연주자들을 초빙했다.
솔로 디스코그래피의 다채로운 스타일은 본인이 지향했던 바인가?
비틀스부터 아바와 핑크 플로이드, 레드 제플린을 함께 흡수하다 보니 나오는 음악도 자연스레 다채로울 수밖에 없다. 레코드는 “기록”의 의미도 있기에 비스티 보이즈나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처럼 당시 내가 취해 있던 음악을 음반으로 표한 기록물이기도 하다. 가진 색깔이 여러 갠데 그걸 하나의 틀에다 가두는 것도 모순적이기에 당시 내가 하고 싶던 음악을 했을 뿐이다.
2005년 < No. 9 >가 마지막 정규 음반이다. 가열한 활동으로 미루어 짐작해 언젠가 10집도 기대해 봐도 좋은가?
현실적으로 현시점에 정규 음반을 발표한다고 해서 초미의 관심사가 되진 않는다. 앨범에 들이는 비용과 체력도 고려해야 한다. 대중음악가로서 대중으로부터 수요가 있는 작품을 내놓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까 봐 걱정도 되지만 마음이 동하는 순간 작업에 임할 것이다.
음향에 천착하기로 유명하다. 왜 그토록 품을 많이 들인 것인가?
작가주의의 발로다. 하이햇 톤과 악기 배치 같은 세부 사항들까지 신경을 쓸 만큼 원하는 방향성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단일한 소리를 위해 고가의 장비를 사기도 한다. 종래에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다.
앨범 대부분의 곡을 만든 싱어송라이터다. 본인이 쓴 곡을 부른다는 건 어떠한 의미인가?
회사와의 상의를 통해 ‘날개’를 비롯해 몇 차례 타인의 작품을 받은 적이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예전에는 가수 김종서가 앨범을 낸다기보단, “프로듀서 김종서가 만든 앨범을 싱어 김종서가 노래한다”라는 뉘앙스였다. 정체성을 담은 음반 그 자체가 최우선이다 보니 타인에게 곡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지금도 프로듀싱이 가장 재밌다.
작업하는 재미가 가장 컸던 곡을 공유해준다면?
정규 5집 오프닝 트랙 ‘추락천사’다. 밴드 구성원들과 다수 리허설 통해 디테일 하나하나 수정하는 과정이 아름다웠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아파트에 렌트비 들여가며 멤버들과 합숙하고 녹음했다. 1980년대 품었던 베니스 비치와 로스앤젤레스를 향한 동경을 일정 부분 이뤘으니 어찌 보면 꿈과 이상향의 도달과도 같았다. 단순히 장소에 대한 동경도 있지만 최상의 락 사운드를 도출할 수 있는 전문가들과의 작업 자체도 꿈만 같았다.
라디오 방송을 같이 진행하며 느낀 것이지만 헤비리스너이고 음악사에 관한 지식도 풍부하다. 음악가로서 플레잉만큼 리스닝이 중요하다는 지론인가?
1990년대에는 내가 하는 음악이 곧 경향성이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긴 시간이 흐른 현시기에 흐름이 계속 바뀌는 데 가만히 있으면 떠내려갈 수밖에 없다. 음악가로서도 추세를 매번 따라가기가 버거우나 최신 음악에 관심을 두어야 각 세대와 호흡할 수 있다. 그래도 최근에 복고 흐름이 돌아오는 것 같아 반갑다. 모던과 레트로가 섞여 있는 트웬티 원 파일럿츠를 즐겨 듣는다.
‘달팽이’를 비롯해 작금의 힘을 뺀 듯한 가창이 인상적이다. 경력의 시기별로 영감을 주는 보컬리스트가 다를 것도 같은데?
딱히 그렇진 않다. 물론 록과 메탈할 때는 레드 제플린의 보컬리스트 로버트 플랜트가 신 같은 존재였다. 다채로운 스타일을 아우르는 솔로 시기부터는 “프로듀서 김종서가 싱어 김종서에게 노래시킨다”는 앞선 이야기처럼 곡에 적합한 음색을 사용했다. 한 앨범에서도 보이스 컬러가 달라지는 이유다.
40년 음악가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고 뜻깊었던 순간을 회상해 준다면?
시나위 2집에 실린 내 노래를 라디오에서 그 노래를 처음 들었던 순간이다. 그때 당시로선 현실성 제로인 꿈 같은 이야기가 펼쳐졌다.
시나위나 카리스마 시절 구사했던 헤비메탈이 대중음악계에서 다시 비상할 수 있다고 보는가?
1980년대 중반엔 신기할 정도로 메탈 집단들이 우후죽순 등장했다. 지금은 해당 장르를 향한 주목도와 관심이 40년 전만큼은 아니지만 최근 사람이 연주하고 노래하는 밴드 형태의 음악이 다시 올라오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음악적 다양성 측면에선 외려 예전보다 더 풍성해졌다.
메탈 장르로의 귀환을 기대해 봐도 좋은가?
음악적 고향과도 같기에 얼마든지 그럴 생각이 있다. 보다 디테일하게 꿈꾸고 있는 사운드 방향성도 있지만 상기한 대로 마음의 준비와 환경의 조성이 필요하다. 현재도 공연 구성엔 록과 메탈 비중이 있는 편이다.
김종서 솔로 경력을 규정하는 단 한 곡을 꼽는다면?
대중가수로서 대중에게 가장 사랑받고 김종서 하면 떠올리는 단 하나의 곡이 뭐냐고 물으면 역시 ‘아름다운 구속’이다. 워낙 많이 불렀다 보니 한때 지겨웠지만, 지금은 감사한 마음이 크다. 뉴진스의 리바이벌을 통해 젊은 세대들에게 가닿은 점도 컸다.
김종서의 인생 아티스트와 음반이 궁금하다.
오랫동안 긴 꿈을 꾸게 한 아티스트는 역시나 비틀스다. 명반이 무척 많지만, 그중에서도 1967년 작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를 꼽고 싶다. 비틀스의 예스러움과 혁신이 공존한 < Rubber Soul >과 쓸쓸하나 멋들어진 < Abbey Road >도 못지않게 아름다운 작품이다. 동 세대 다른 밴드들이 범접하기 어려운 수준의 하이브리드 뮤직을 1960년대에 이미 구현해 냈다.
진행: 염동교, 신동규, 박승민
정리: 염동교
사진: 박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