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범 단위로의 높은 완성도를 지녔다고 말하는 작품은 크게 두 성격으로 나뉜다.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의 몸처럼 움직이는 유기성에 집중하거나 각각의 뚜렷한 싱글을 한데 모아 이질감 없이 배치한, 이른바 명절 종합 과자 선물과 같은 형태가 그것이다. 양자를 호평의 영역 속 각 극단에 두고, 수작이라 불리는 수많은 열매는 이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도 이곳에선 그 자체로 매력적이지만, < 0집 >은 다르다. 치우치지 않는 평형 상태. 양적 공세가 시선을 빼앗는 경향이 있으나 결국 저마다 완성도에 집중한다. 내포한 철학도, 명성을 얻기 이전의 곡을 다시금 품는다는 테마도 하나의 소재일 뿐 음악가로서의 정체성과 로커로서의 현재 위치를 적확히 파악한 결과가 빛나는 것이다.
세 장의 정규 음반 끝에 그는 올해로 열 살을 맞은 유명세 이전의 작업물을 택하는 한 바퀴의 순환을 끌어안으며 이를 < 0집 >이라 공식적으로 표명한다. 남다른 애정 탓에 유독 시선을 주지 못했던 초기작을 재편곡해 ‘뒤척이는 너울’을 기준 삼아 두 개의 파트로 나눠 양과 질, 나아가 자기만족까지 동시에 잡으려 한 시선이 선명하다. 그러나 따로 발매가 아닌 한데 모으자는 결정이 단일 작품의 스물아홉 곡이란 과감한 결괏값을 낳았으니 이는 필연적으로 기성곡과 새로운 음악 사이의 연결 고리를 느슨하게 만들 여지가 다분한 것도 사실이다. 각 영역의 시선이 다르다고 한들 같은 판에 담긴 형상이기에 갖는 태생적 한계인 셈이다.
전후의 목적과 이에 따라 갖춰야 할 요소가 더욱이 중요한 까닭이다. 앞선 반쪽은 편곡의 완성도를 기반으로 변화한 시대와의 적절한 융화가 필요하고, 뒤따른 조각은 시장을 이끌어가는 현세대의 바람을 충족할 만한 새로운 맛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작은 소기에 성과를 넘어 이승윤이라는 아이콘이 지금 우리 인디와 록 시장에서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지를 환기하는 일종의 세이브 포인트로 작용한다. 컨트리풍의 ‘그림자 위로’를 그대로 앞줄에 배치한 선택과 ‘하품만 나오네’로 잇는 결의 조화나 노랫말이 돋보이는 ‘반역가들’은 물론 특히나 새 단장의 힘을 강하게 받은 첫 파트의 후반부 전개는 < 꿈의 거처 >의 간결한 사운드스케이프를 그리며 선택의 폭을 뽐낸다.
과감하면서도 딱히 주체할 생각없는 능글맞은 끼가 가수의 스타성이라는 이름으로 꼭 맞게 포장될 수 있는 건 오롯이 음악성 때문. 진정한 의미의 신곡들이 가지고 있는 기저이자 저력이다. ‘뒤척이는 너울’과 ‘뒤척이는 허울’ 간이 주고받는 재치에 충분한 조명을 비추면서도 선두에 < 역성 >의 고뇌하는 낱말을 닮은 ‘무얼 훔치지’를 앞세우며 자신의 명함을 통기하려는 의도를 공고히 한다. ‘게인 주의’나 ‘가짜 꿈’이 가진 비주얼 록의 소스와 문을 닫는 ‘허튼소리’, ‘달이 참 예쁘다고’의 정돈된 음질은 그가 가진 스펙트럼의 일부이자 구태여 빼 오지 않은 남은 무기의 그림자다.
취향과 인정의 영역은 다르다. 긴 무명 생활과 급격히 커진 작금의 체급에도 그는 본인만의 록을 찾아 부단히 돌아다녔고, 대체로 그의 눈은 앨범 미학과 실연에 있었으며 짧은 유행보다는 긴 호흡의 안정을 반겼다. 자신의 단독 공연을 다른 동료들과 나누는 페스티벌로 꾸려 소비 연령층을 다각화하는가 하면, 한 발 더 나아갈 환경에도 그는 지하 클럽 공연장으로의 회귀를 택했다. 지난 밴드의 곡을 다시 담아 새출발의 뜻을 천명한 < 0집 >은 그래서 입맛에는 맞지 않을 순 있어도 박수를 치지 않을 순 없다. 록 신에 들끓는 바이럴과 숏폼화된 콘텐츠, 인디의 울타리를 희석하는 시대의 호흡 속 보수적 태도를 이야기하고픈 것은 아니다. 모든 일이 열성적 지지와 적극적 의사가 반영된 감행의 결과물이라 해도 이승윤과 같은 음악가의 부재가 사실인 상황이 ‘굳이 진부하자면’ 애석할 따름이다.
-수록곡-
1. 그림자 위로 [추천]
2. 하품만 나오네 [추천]
3. 이백서른두번째 다짐
4. 반역가들 [추천]
5. 오늘도
6. 가끔은
7. 천문학자는 아니지만
8. 어버버버
9. 들려주고 싶었던
10. 푸념
11. 지식보다 거대한 우주에는
12. 무얼 훔치지 [추천]
13. 뒤척이는 너울
14. 게인 주의 [추천]
15. 가짜 꿈 [추천]
16. 무명성 지구인
17. 우주 like 섬띵 투 드링크
18. 빗 속에서
19. 정말 다행이군
20. 관광지 사람들
21. 새벽이 빌려 준 마음
22. 구겨진 하루를
23. 뒤척이는 허울 [추천]
24. 없을걸
25. 날아가자
26. 새롭게 쓰고 싶어
27. 허튼소리 [추천]
28. 굳이 진부하자면 [추천]
29. 달이 참 예쁘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