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쉽고도 깊게, 이치현과 벗님들ㅣ신동규의 시대연결
이치현과 벗님들
모든 음악은 시대를 전제하고, 모든 시대는 저마다의 유산을 남깁니다. 그렇게 남겨진 수많은 축복은 대중으로부터 명곡, 명반 등의 칭호를 부여받고 끊임없이 호출되며 세대를 이어왔습니다. 시간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담겨있기 때문일 겁니다. 협소했던 과거는 다양한 보기를 제공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음악을 진정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만큼 많이 들리기도 했고, 찾기도 무지하게 찾았습니다.
오늘날은 어떤가요. 너무 많은 선택지가 되레 역사의 선물이 현재에 닿는 것을 방해하는 건 아닌지 고민해 봅니다. 제아무리 지난날의 영광이 빛난다 하더라도 찾는 이가 없다면 계속되지 않겠죠. < 시대연결 >은 말 그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국내 전설들을 모아 세대 간의 시제를 연결하는 데 힘을 보탭니다. 글은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맞춰 쓰일 것이며 ‘아, 이 정도는 알아야 하나보다. 한 번 들어볼까?’ 정도의 호기심을 끌어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겠습니다. 네 번째 주인공은 우리 가요 이지리스닝의 대명사, 이치현과 벗님들입니다.

무지막지한 속도와 굉음, 따라 부를 엄두조차 나지 않는 음역대, 딱 달라붙는 바지, 금발의 헤드뱅잉. 록 밴드를 떠올릴 때, 대다수의 대중이 가진 이미지들이다. 특히 1980년대로 접어들어 뮤직비디오 시장이 급격히 몸집을 불리고, 영미권 헤비메탈 밴드의 비주얼 인기몰이가 주요한 이유로 작용했다. 우리 내부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조하문의 보컬로 1980년 대학가요제 은상을 차지한 밴드 마그마와 전국대학가요 경연대회에서 금상을 거머쥔 김수철의 밴드 작은거인의 역작 < 일곱 색깔 무지개 >는 서구의 로큰롤과 우리 가요를 적절히 교배하며 1980년대 한국 록의 시작을 알렸다.
최우섭의 전기 기타가 일품이었던 밴드 무당의 두 작품까지 이들이 다진 초석은 머지않아 마주하게 될 한국 메탈의 골든 에라를 위한 씨앗이었다. 그렇게 1986년 발매된 시나위의 데뷔 앨범 < Heavy Metal Sinawe >는 국내 최초의 헤비메탈 음반이라는 값진 칭호 속 신대철과 임재범이란 이름을 세상에 알렸고, 2집 < Down & Up >에선 김종서 신드롬의 시작을 선언했다. 김태원의 부활 또한 같은 해에 첫발을 뗐으니 이는 곧 이승철의 출발을 의미했다. 이 밖에도 작은 하늘과 H2O의 1집, 백두산 2집이 1987년 나란히 소개됐으며 이듬해에는 외인부대와 카리스마가 등장해 맥을 이었다. 1985년에 발매된 들국화의 데뷔 명반은 헤비메탈의 범주는 아니었음에도 대중이 갖는 인상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1980년대 중반 파고다 극장에 눌러앉은 마니아들은 당연지사 록이라는 단어 앞에 포크나 컨트리 등의 장르를 붙이지 않고 바라본 일반 시민의 인식이 서두에 언급한 장치적 요소에 가까운 것은 자연스럽다. 이쯤에서 이치현과 벗님들의 ‘당신만이’와 ‘다 가기 전에’를 들어보자. 그들의 음악은 분명 록이다. 다만 시나위의 질주도, 들국화의 야수성도 없으며 송골매의 하드 록에 비하면 차분하다. 이들은 대중이 음악가의 선까지 올라오길 바라는 게 아니라 자신이 대중의 눈높이까지 내려가길 자처했다. 연주 중심적의 고고한 태도 속에서도 낮은 난도로 좌중을 아울렀고, 록의 서정성을 꿈꿨으며 로큰롤이 꼭 시끌벅적할 필요는 없다는 소신에 기대 고급화 전략을 펼쳤다.

시작은 1978년 제1회 TBC 해변가요제였다. 이치현이 직접 쓴 ‘그 바닷가’로 인기상을 받으며 시작을 알렸는데, 특히 이 대회는 걸출한 인물을 다수 배출해 냈다. 공동으로 인기상을 안은 활주로에는 배철수가, 휘버스에는 이명훈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우수상을 받은 블랙테트라의 구창모와 장려상을 받은 중앙대학교 그룹사운드 블루드래곤의 김성호는 물론 가수보단 방송인으로서 성공 가도를 달린 왕영은이 징검다리라는 팀에 속해 대상을 차지했다. 이치현과 벗님들도 그 자리를 당당히 지켰다.
훗날 ‘당신’으로 전성기를 맞는 김정수가 속해있던 밴드 라스트 찬스의 드러머 이순남이 합세해 3인조로의 본격 출발을 알렸다. 이때만 해도 유명 작곡가에게 곡을 받아 크레딧을 채우는 것이 당연하다는 오래된 풍토가 있었다. 벗님들은 그렇지 못한 가난한 음악가라는 인식이 싫어 이용균이라는 가명과 본명을 번갈아 뒷면을 채워야 했다. 그렇게 발매한 첫 작품의 ‘또 만났네’와 ‘그런 마음이었어’가 전파를 탔고, 순항을 알리는 듯했으나 잇따른 2집이 소속사 문제로 저조한 성적을 거두자 세 번째 앨범까지는 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으며 5인조로 재편해 환기를 꾀할 수밖에 없었다. 그간의 무명 생활을 견뎌준 아내에게 바치는 ‘당신만이’를 재수록했음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대학로에서는 알음알음 입소문이 퍼졌지만, 연이은 하락세를 이겨낼 정도는 아니었다.
결단이 필요한 상황, 이치현의 선택은 모든 것을 갈랐다. 그는 우선 방송을 떠났다. 지금은 당연하다고 말하는 실연자의 기본적 요구도 갖춰지지 않았던 시기였다. 가요 프로그램은 모든 밴드를 일일이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드럼과 베이스는 저 멀리 배경일 뿐, 마이크를 잡는 사람만이 맨 앞에 서니 연주 소리가 희미하고 박자는 밀렸다. 들려주는 게 아닌 보여 주기 식 녹화가 주를 이뤘다. 환멸을 느낀 벗님들은 그곳을 박차고 나갔고, 그런대로 반응이 있다는 대학로로 정면 돌파를 시작했다. 매체 친화적 그룹으로 존재를 알렸으나 오히려 그 이력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브라운관 안이 아닌 공연장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 뒤로 4년 동안 천 회 이상의 공연을 이어갔다. 1985년 발매한 네 번째 앨범은 벗님들 전성기의 시작이다. ‘추억의 밤’, 특히 이치현의 음색이 빛을 발한 ‘다 가기 전에’가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한국형 소프트 록의 선두에 섰다. ‘당신만이’ 또한 뒤늦게 만개해 대표곡으로 자리 잡았다. 이 곡은 훗날 김건모가 재해석해 또다시 생명력을 얻는다. 이듬해 발매한 5집은 그야말로 굳히기 한판이었다. 겨울을 겨냥했으나 그해 연말이 유독 따뜻했던 탓에 수개월이 흘러 여름에 꽃을 피운 가요톱텐 5주 연속 1위 곡 ‘사랑의 슬픔’이 이곳에 수록돼 있다. 이치현은 3집과 4집을 모두 작곡해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입지를 다졌고, 5집 또한 김준기의 한 곡을 제외하곤 모두 본인의 곡이었다.

대학로를 본거지로 큰 성공을 안고 다시 방송계로 돌아와 이제야 환대받은 그들이었지만, 영광은 막바지로 향하고 있었다. 핵심은 고등학교 동창인 멤버 김준기와 이치현 사이의 알력 다툼이었다. 결국 모두가 함께했던 ‘사랑의 슬픔’을 마지막으로 남긴 채 두 그룹으로 찢어지는 결과를 맞았다. 서로 그룹명을 그대로 가져와 이치현을 주축으로 한 벗님들과 김준기를 필두로 한 벗님들로 갈라진 초유의 일이었다.
1988년 저마다 앨범을 발매했지만, 결과는 이치현과 벗님들의 완승이었다. 그해 겨울부터 이듬해 초까지 가요톱텐에서 두 번째 다섯 주 연속 정상을 선물한 히트곡 ‘집시 여인’이 그 이유였다. 음반 판매량은 50만 장을 넘겼고, 1980년대 우리 가요를 대표하는 곡으로 자리매김했다. 애써 선의의 경쟁을 지내왔으나 김준기는 쓰라린 아픔을 안고 프로듀서로 선회했다. 레게 리듬을 집요하게 파고든 그는 임종환의 원히트원더 ‘그냥 걸었어’를 제작하기도 했다.
색색의 선글라스를 트레이드 마크로 한 이치현은 대중의 눈길을 자연스레 바꿨다. 애써 기타를 찌그러뜨리지 않아도, 또 고음에 기대 마니아층만을 겨누지 않아도 록이 우리 곁에 스며들 수 있음을 증명했다. 어쩌면 비슷한 시기, ‘Rosanna’와 ‘Africa’로 국내에서 인기를 끌었던 미국 밴드 토토의 인상과 맞닿아 있는 듯하다. 잘 다듬어진 소리와 언제 들어도 부담 없는 보컬, 한국 정서에 꼭 맞는 소재와 서구적 멜로디, 무엇보다 대중을 겨냥한 시선까지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 그의 음악은 1980년대 우리 가요계의 흔치 않은 보물로 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