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문화계의 일급 화두로 떠오른 '7080음악'의 선두 가운데 하나가 색깔이 들어간 큰 안경이 인상적이었던 이치현의 그룹 벗님들이다. 편안한 연주화음을 생명으로 한 벗님들은 밴드였지만 80년대 주요 경향인 발라드를 주무기로 내걸어 시대를 갈랐던 그룹이다.
1978년 해변가요제에 출전하면서 데뷔한 벗님들은 잦은 멤버 변화 속에서도 80년대 초반 '또 만났네'와 '당신만이' 등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꾸준히 애청되면서 서서히 인기지평을 넓혀나갔다. 제작비용이 부족해 천신만고 끝에 만들어낸 1984년 4집의 약진에 이어 벗님들은 2년 후인 1986년에 만든 다섯 번째 앨범으로 마침내 열망하던 대중적 성공을 맞이하게 된다.
원동력은 KBS '가요 톱10'에 5주간 1위를 차지한 히트작 '사랑의 슬픔'이었다. 팝 발라드의 진수라고 할 이 곡은 1982년 3인조에서 5인조로 라인업이 늘어나면서 소프트 록 스타일로 선회한 벗님들의 지향을 대변하며 팬들에게 안락한 하모니와 빼어난 멜로디를 선사했다. 신세대 인기그룹 클릭비가 이 곡을 리메이크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리더인 이치현의 일체 기교를 부리지 않은 순수한 보컬도 빼놓을 수 없다. 기타리스트를 고집한 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기를 창피해 했다지만 중저음 영역에서는 특유의 가녀린 미성으로 충분한 대중흡수력을 발휘한 것이다. 록을 꺼려했던 여성들도 마른 체구의 이치현이 들려주는 미성의 안전지대에는 기꺼이 합류했다. 지금 30대 말인 한 여성 팬의 한마디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때 이치현을 좋아하지 않은 여성이 어디 있었나요?”
듣는 사람에게 당대의 록그룹 들국화나 부활은 록 정통의 강성 사운드에 주력했다면 이들은 '지극히 가요적인' 패턴의 대중성에 역점을 두었다. 대부분 수록곡의 가사도 속물적인 사랑과 이별 타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카페의 키 작은 촛불이 눈물을 그칠 때면/ 우리들의 안타까운 이별인가요?/ 이 마음은 자꾸만 당신께 가고 있는데/ 이제는 말해주오 나에게 말을 해주오...' - '키 작은 촛불'
'새하얗게 눈 내리던 그날은 그대를 사랑했던 날/ 말없이 내미는 그대의 그 입술을/ 설레는 가슴은 그렇게 바라만 보았지...' - '그땐 외롭지 않았어'
근래의 록 시선에서 봤을 때 약점인 것은 분명했다. 때문에 1990년대 들어 록의 계보 찾기가 한창이었을 때 벗님들의 위치는 상대적으로 홀대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대의 현실을 고려할 때 그들의 상업적 지향은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누가 뭐래도 1980년대 음악대중의 추억을 아로새긴 주역 가운데 하나였다.
이치현의 고집으로 머리곡이 된 '사랑의 슬픔'(다른 멤버들과 주변에서는 모두 '그땐 외롭지 않았어'이 타이틀곡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 히트하자 다른 곡들도 잇따라 전파와 인기차트를 점령했다. 이 앨범으로 그들은 만성적인 그룹불우시대를 후련하게 마감했다.
그들은 1987년 일간스포츠의 골든디스크를 수상한데 이어 KBS 10대가수로 선정되었으며, MBC FM 선정 그해 최고가수가 될 정도였다(그들의 음악은 라디오와 너무나 궁합이 잘 맞았다). 일본 동경 무도관에서 벌어졌던 동계올림픽 기금모금 공연에 참가하는 등 한국최고그룹 반열에 오른 것이다.
역시 수려한 멜로디의 '그땐 외롭지 않았어'를 위시해 '키 작은 촛불', '돌아와요', '잃어버린 계절' 등이 연이어 라디오전파를 타면서 사랑받았다. 주요 멜로디가 인상적인 곡 '잃어버린 계절'은 나중 일본가요 표절로 금지되어 아쉬움을 남겼다.
이 앨범을 만들 당시 벗님들의 멤버는 이치현(리드보컬), 김준기(퍼커션, 색소폰) 김태영(드럼), 오세홍(기타), 김경기(베이스) 김용식(키보드, 피아노)이었다. 김준기가 쓴 '그냥 이대로'를 제외한 수록곡 90%를 그룹의 지휘자 이치현이 작곡 편곡했다.
이치현은 순수성이라는 측면에서 4집을 최고작으로 치고, 대중들은 88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집시 여인'을 많이 기억하지만 벗님들의 정통성과 대중성을 아우르고 있다는 점에서 5집은 여전히 벗님들의 정점으로 남아있다.
게다가 이 앨범 이후 벗님들은 '성공 뒤 불화'라는 속설처럼 내분을 겪어 1988년에는 김준기 중심의 벗님들과 '이치현과 벗님들' 등 두 팀의 벗님들이 대치하는 험악한 풍경을 연출했다. 서라벌 고교 동창인 이치현과 김준기가 마지막으로 함께 한 앨범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남다르다.
최근 7년만의 공백을 깨고 새 앨범 를 발표한 이치현은 현대백화점 홀을 순회하는 컴백 공연에서 항상 첫 곡으로 '사랑의 슬픔'을 노래한다. 폭발적인 록을 하고 싶었어도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자신의 감성은 가늘고 감미로운 목소리의 발라드에 있었음을 인정하고 들어간 것이다.
-수록곡-
Side 1
1. 사랑의 슬픔(하지영 작사, 이치현 작곡)
2. 돌아와요(이치현 작사 작곡)
3. 잃어버린 계절(이치현 작사 작곡)
4. 키 작은 촛불(하지영 작사, 이치현 작곡)
5. 공원에서(하지영 작사, 이치현 작곡)
Side 2
1. 그땐 외롭지 않았어(이치현 작사 작곡)
2. 모습(이치현 작사 작곡)
3. 그냥 이대로(이치현 김준기 작사, 김준기 작곡)
4. 둘만의 느낌(이치현 작사 작곡)
5. 안녕(하지영 이치현 작사, 이치현 작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