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현실을 외면하고자 찾아온 새해를 반기는 대신 10년 전을 회상하는 현상이 유행으로 번졌다. 루피에게 2016년은 메킷레인의 ‘Weathermen’으로 큰 반응을 이끌어내며 순식간에 주목받는 신인으로 자리매김한 시기다. 이후 꾸준히 앨범 단위의 작업물을 발매했고 여러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 올해에는 심사 위원으로 참여할 만큼 성장했다. 2025년 후반기에 첫 파트를 공개한 후 국내에서 힙합이 다시 대중적으로 이목을 끄는 시점, 초호화 피처링단을 꾸려 완성본을 발매했다.
든든한 베테랑, 떠오르는 신예뿐만 아니라 제자와 일본에서 활동하는 래퍼까지 불러 모았으나 정작 이들을 이끌 선장이 보이지 않는다. 이미 트렌디한 사운드에서 합을 맞춘 경험이 있는 제이민(JMIN)과 비슷한 방식으로 다시 뭉쳤지만 팝을 지향해 캐치한 훅을 만든 루피와 다르게 제이민은 본인의 장점이 아닌 랩에 집중하며 둘의 방향성조차 갈렸다. 보컬을 활용해야 하는 레이(LEY)와 비오도 밋밋한 비트를 스쳐 지나간다. 거의 모든 곡에 피처링을 기용했지만 결국 확실한 인상을 남기는 조연은 등장하지 않았다.
새로운 스타일도 중심을 잡지 못한 원인이다. 그동안 특유의 레이백을 위해 발음을 흐리더라도 가사와 타격감은 전달되었지만 이번에는 극단적으로 멈블에 치중했다. 유일하게 해당 스타일로 여유로운 리듬을 만드는 데 성공한 ‘Dope’를 제외하면 이러한 변화는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티에스토와 에이바 맥스의 ‘The motto’ 차용 이유를 유추할 수 없는 ‘X mark’는 가사가 들리지 않는 특징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공격적인 킥과 베이스를 운용하는 해외 힙합에 영향받으며 사운드에도 변화가 이루어졌으나 플레이보이 카티의 ‘Radar’를 어설프게 뒤집은 듯한 ‘Come n go’처럼 단순히 가져오는 정도에 그친다.
루피를 생각했을 때 하나의 앨범과 버스(verse) 중 어느 것이 먼저 떠오르는가. 본격적으로 상승 곡선을 그린 ‘Gear 2’, 부드러운 그루브를 즐기던 ‘Good day’ 같은 순간들을 회상하며 다수의 의견은 후자로 향할 것이다. 사실 이번에도 홀로 나선 ‘Crown’ 정도는 기존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을 만큼 아티스트의 감각이 무뎌진 것은 아니다. 이처럼 훌륭한 래퍼라는 사실과 별개로 그를 대표할 작업물은 명확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서울과 LA 중 루피의 주소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수록곡-
1. Dope (Feat. Kid Milli) [추천]
2. X mark (Feat. Wuuslime)
3. Death note (Feat. Lil Mander)
4. Bad kuromi gal (Feat. NillNico)
5. 그래도 still lov3 ㅠ (Feat. Foggyatthebottom)
6. Pink spill (Feat. Shyboiitobii)
7. Crown [추천]
8. Take two
9. 아니 사실은 (Feat. JMIN)
10. Come n go (Feat. Raf Sandou)
11. Bite (Feat. tonosama wasabii)
12. You’d better (Feat. LEY)
13. Light (Feat. BE'O)
14. Dead man walking (Feat. BILL STAX)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