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범 이미지
West End Girl
릴리 알렌(Lily Allen)
2025

by 한성현

2025.11.15

이혼 앨범이다. 그것도 아주 적나라하고 비참한. 2018년 < No Shame >의 상업적 부진 이후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릴리 알렌은 연극배우 커리어를 시작하는 동시에 < 기묘한 이야기 >와 마블 세계관의 ‘레드 가디언’으로 유명한 연기자 데이비드 하버와 웨딩을 올렸다. 결혼 생활의 기쁨은 비록 얼마 지나지 않아 붕괴했으나 흐르는 눈물은 곧 창작의 펜촉을 채우는 잉크이기 마련. 오랜 슬럼프를 딛고 7년 만에 깜짝 발표한 < West End Girl >은 거짓과 배신으로 얼룩진 논픽션 연극의 객석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사전 싱글 공개를 배제한 만큼 신보는 열네 트랙 통으로 긴 호흡을 느낄 것을 사실상 강제한다. 줄거리를 따라가 보자. 타인과 자유롭게 성관계를 갖자는 남편의 ‘오픈 릴레이션십’ 제안을 떨떠름하게 받아들이는 프롤로그 ‘West end girl’로 시작해 ‘Tennis’에서 주인공은 그가 다른 여성과 정서적 교감도 나눴음을 깨닫는다. 심적 고통에 끊었던 술까지 다시 마시게 되는 ‘Relapse’를 거쳐 무표정한 원망과 힐난의 종장 ‘Fruityloop’에 도달하기까지. 앨범은 단 하나, 이혼과 그 여파만을 집요하게 파고들기에 바쁘다.

첫 곡의 들리지 않는 반대쪽 통화 내용과 여러 불륜 상대를 통칭하는 이름 ‘매들린’을 제외하면 작품에는 어떤 암시도 없다. 연예 기사를 수놓은 온갖 독설과 조지 W. 부시를 저격한 ‘Fuck you’ 같은 트랙으로 유명했던 캐릭터를 고려하더라도 가사는 그간의 발언 수위를 아득히 능가하는 수준이다. ‘Ruminating’의 메아리치는 ‘아주 대단한 대사야(What a fucking line)’, ‘Tennis’의 매서운 추궁 ‘매들린이 누구야?(And who’s Madeline?)’ 같은 날카로운 문장 사이 남편이 사용했을 각종 성인용품 목록과 이별 후 데이팅 앱에서 사용한 자신의 가명 ‘Dallas Major’가 대수롭지 않게 등장한다.

러닝타임 내내 높은 몰입도를 유지하는 장치가 단순 직설적인 대사만은 아니다. 스펙터클의 배치와 연출 면에서도 각본은 영리하다. 혼란스러운 정신을 토로하는 ‘Ruminating’과 ‘Relapse’의 보컬 이펙트는 익숙한 기법이라 할지라도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며, 난데없는 총성이 ‘Madeline’의 서부극을 체험형으로 만드는가 하면 ‘Pussy palace’의 차가운 분노는 무대에 오싹한 드라이아이스 연기를 주입한다. 가정법원 진술서만이 아니라 제목처럼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상영될 만한 뮤지컬 사운드트랙이 되기에 충분한 앨범이다.

갈수록 팝은 가십의 세계가 되어가고 있다. 누가 더 자극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판매하는지 경쟁하는 가운데 원조 격인 릴리 알렌은 최소한의 베일만을 남겨둔 리얼리즘으로 귀환했다. 긴 공백을 만회하는 차트 성과는 어쩌면 충격요법의 여파일 수도 있고, 그의 증언도 따지고 보면 한쪽의 일방적 목소리다. < West End Girl >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교훈을 남길 뿐이다. ‘자전적 음반’이라는 수식어를 원한다면 이제 이 정도의 전투 자세는 갖춰야 한다고.

-수록곡-
1. West end girl
2. Ruminating [추천]
3. Sleepwalking
4. Tennis [추천]
5. Madeline
6. Relapse
7. Pussy palace [추천]
8. 4chan stan
9. Nonmonogamummy (With Specialist Moss) [추천]
10. Just enough [추천]
11. Dallas Major
12. Beg for me
13. Let you w/in
14. Fruityloop [추천]
한성현(hansh990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