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트로의 신랄한 신시사이저와 드럼 앤 베이스 리듬부터 도발적이다. 동시에 끝없이 침잠했던 < Paingreen >과 솔직한 위안으로 귀결되었던 < Private Pink >와는 판이한 성격을 지님이 단번에 드러난다. 개인사의 아픔을 걸출한 작품으로 치환하는 이 음악가의 지난 발걸음을 기억하는 이라면 적잖이 당황할 첫머리다. 어두운 초록색과 따스한 분홍색의 뒤를 잇는 < Povidone Orange >, 그 톤은 온갖 감정을 하나의 형형한 빛깔로 정제해 냈던 전작들과는 다르게 상처 주변에 탁하게 엉겨 붙은 주황색이다.
솟아오른 불기둥이 남긴 온기는 방랑자들을 근처로 불러 모은다. 뻔한 해결책일지언정 다시금 역설해야만 하는 사랑(‘Love is the answer’)과 ‘괜찮아’라 연거푸 말하며 손수 발라 주는 빨간약(‘Povidone’)에서 비추어지는 정서는 여태껏 보아 왔던 모습 중에서도 제일 온화하다. 각각의 트랙을 연극같이 구성하는 솜씨를 발휘한 격려의 찬가 ‘짠’도 동일한 맥락에 있다. 탁월한 강약 조절로 전달한 위로들은 충격적인 시작이 무색하게 우리를 익숙한 편안함 안으로 끌어들인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환부를 깨끗이 소독하기엔 부족하지 않은가.
키보드와 건조한 투스텝을 절묘하게 오가는 ‘Broken hill’을 기점으로 시선이 내부로 이동한다. 이제 외부는 완전히 디스토피아로 규정되었고, 노랫말 ‘희망이라는 굴레’가 곧 현재 상황을 대변한다. 이어 스포큰 워드를 연상케 하는 ‘Utopia’를 채운 낱말들은 과거의 그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들이다. 뒤틀린 목소리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직설적이며, 허밍 사이로 진동하는 베이스가 본격적인 경로 전환을 예고한다. 시간을 초월한 소재를 담아냈던 이전과 다르게 필연적으로 동시대성을 담보하는 변모다.
교조적인 가르침 혹은 넋두리로 간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지름이 흡인력을 갖는 까닭이 그간의 발걸음에서 보인다. 많은 고민에 천착한 끝에 내면에서 해답을 찾아낸 자이기에 외려 불타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조소가 마음을 끌어당긴다. ‘먹고사는 것보다 중요한 게 어딨어요’와 ‘돈이 안 돼도 해’의 간극이 던지는 물음은 사실 아티스트 에이트레인뿐만 아니라 인간 신지환, 더 나아가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화두다. 이 무한한 굴레에 우리를 빠트린 그는 모두를 내버려둔 채 유유히 엔딩을 향해 걸어간다.
성경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일화를 옮긴 인터루드 ‘딸꾹질’과 연결되는 ‘Sell fish’는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환하게 빛나는 곡이다. 사람을 낚는 어부처럼 대중의 귀를 낚아채야만 하는 예술가의 숙명이 가사의 < 노인과 바다 > 모티프로 구체화되며, 동료 연주자들이 ‘더 피셔스’라는 이름으로 뭉쳐 빚어낸 환상적인 가스펠이 메시지와 발맞춘다. 이제 그의 가슴속에는 앞서 온갖 혼란을 불러일으켰던 외적 요인 대신 사랑하는 가족만이 가득하다. 다음 ‘낡은 사랑과 집에 두고 나온 늙은 개’ 역시 지극히 개인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마무리 ‘나도’는 < Paingreen >의 ‘그래 그렇게’만큼이나 애달프고 진솔하다. 이기적인 자아를 마주하고서야 ‘나도’ 같은 심정이었음을 긍정하며 ‘나 따위가 애 하나쯤 낳는다 한들 뭐 달라지겠어요’(‘Utopia’)의 냉소가 자취를 감추는 순간이다. 자신의 전부를 내어놓은 이 고백은 음반을 멋지게 매듭짓는다. 허나 이는 앞서 우리를 향했던 질문에 적용할 수 없는 그만의 대답이다. 도리어 각자에게 정답을 내리는 것은 오만한 행동이고 그는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 Povidone Orange >는 그렇기에 소독약의 역할을 다할 뿐이다. 따끔한 자극 뒤에 흉이 지더라도 우리는 스스로 치유해 내야만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에이트레인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수록곡-
1. 불기둥 (Feat. Rani Bober) [추천]
2. Love is the answer (Feat. 신설희)
3. Povidone (Feat. 단편선) [추천]
4. 짠 (Feat. 담예) [추천]
5. Distopia
6. Broken hill [추천]
7. Utopia
8. 돈이 안 되도 해 (Feat. Ben T Kadar)
9. 딸꾹질
10. Sell fish (With 더 피셔스) [추천]
11. 낡은 사랑과 집에 두고 나온 늙은 개
12. 나도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