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룬 게 많으면 그것들을 다듬어야 하는 시기가 온다. 작년 말 이즘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듯 그가 본래 계획한 대학 시리즈 < MT >를 대신해서 이번 음반을 발매한 점도 이와 같다. 완성도 높은 작업물로 국내 힙합 신에서 뚜렷한 입지를 다진 래퍼 최엘비는 가꿔온 음악관을 정돈하고자 자신의 디스코그래피로 시선을 돌렸다. 깊은 내면 묘사와 보편적인 공감대를 이끄는 가사가 특장점인 그에게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선택지는 ‘나’였다.
신보의 중심 서사는 크게 두 가지다. 한국대중음악상 랩/힙합 음반 부문 수상작 < 독립음악 >(2021) 이후 래퍼로서 높아진 위상을 논하는 내용과 20대의 치기 어린 사랑을 담은 < CC >(2020)의 후속작 격인 연애 이야기다. 전작의 수록곡 ‘아는 사람 얘기’의 3인칭 서술로 연인에게 받은 상실감을 토로하는 첫 곡 ‘니여자’에 이어 어머니에게 명품을 선물할 정도로 달라진 인생을 3분 내외의 러닝타임에 압축한 ‘YSL’이 이를 예고한다.
특별한 음악적 장치나 화려한 기교 없이도 앨범은 높은 흡인력을 자랑한다. 현재의 그를 이끌어 온 원동력이 열등감에 있었음을 설파하는 ‘킹오브인프피’와 감춰왔던 치부를 꺼내 보이는 ‘찌질의 역사’에서 드러나듯 정직하고 담백한 래핑만으로 최엘비의 인간상은 선명하다. 음절 단위로 뇌리에 꽂히는 또박또박한 발성이 자기 고백적 성격을 띤 음반에서 확실한 승부처로 작용했다. 남진의 ‘님과 함께’를 서정적으로 재해석한 ‘전셋집’ 역시 그의 짙은 목소리가 읊는 스토리텔링이 두드러지는 지점이다.
객원들과의 호흡도 사랑이라는 핵심 소재를 감각적으로 이끌어 낸다. 그의 투박한 래핑과 알앤비 보컬리스트 으네(UNE)의 몽환적인 음색이 합을 이루는 ‘Her.’는 거친 질감의 전반부와 몽글한 분위기의 후반부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수행하고 앨범 막바지에 속도감을 조절하는 저드(jerd)의 피처링 또한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적재적소에 배치한 조력을 통해 유연한 흐름을 갖춘 만큼 두 가지 주제가 교차하는 ‘헨즈앞 / 망가’와 마지막 곡 ‘아마겟돈’까지 앨범의 주인공이 내뱉는 톤과 감정은 과잉되지 않고 음반 전체에 고르게 번져 있다.
15곡으로 채워진 이번 정규 4집은 마치 47분 길이의 한 곡처럼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트랙마다 번뜩이는 구간은 적지만 유려한 흐름을 따라가면 어느새 한 개인의 심경과 태도를 이해하고 몰입할 수 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구축한 자전적인 음악 세계는 간단하지만 깊이 있고 서늘한 동시에 따스함도 존재한다. 고강도 자극을 위해 시시각각 변모하는 한국 힙합 속에서 < Her. >는 최엘비의 뚝심으로 그 존재감을 증명했다.
-수록곡-
1. 니여자
2. YSL
3. 킹오브인프피 [추천]
4. 전셋집 [추천]
5. 징징
6. 찌질의 역사
7. I’m fine! (Feat. C Jamm, 최성)
8. Her. intro (Narr. 우정잉)
9. Her. (Feat. UNE) [추천]
10. 어… 어.. 어.
11. 위하여
12. 또르르… (Feat. 미현, 밍기뉴, 버벌진트, 웨스턴 카잇)
13. 헨즈앞 / 망가 [추천]
14. 물 (Feat. jerd) [추천]
15. 아마겟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