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모어의 리드 보컬 헤일리 윌리엄스는 누구보다 독보적인 방식으로 솔로 커리어를 꾸린다. 팬데믹 시기 선보인 첫 정규작 < Petals For Armor >는 세 장의 EP로 나뉘어 공개했고 이듬해 < Flower For Vases / Descansos >는 아무 예고 없이 기습 발표했다. 레이블을 떠난 후 인디 아티스트로서 처음 선보이는 새 프로젝트는 한술 더 뜬다. 홈페이지 무료 다운로드와 17개의 개별 싱글 발매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각자마다의 플레이리스트가 여럿 생겨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8월 말, < Ego Death At A Bachelorette Party >는 노래 하나를 더해 18곡의 앨범으로 완성되었다. 최종 결정된 공식 시퀀스는 꽤 상징적이다. 시작은 데뷔 전인 2003년 참여한 크리스찬 만화의 사운드트랙 ‘Jumping inside’에서 후렴을 발췌한 ‘Ice in my oj’, 대단원은 숨겨두었던 트랙 ‘Parachute’. 양 극단에 심어놓은 테마가 암시하듯 앨범은 유명세라는 그늘로부터의 도피 시도, 그리고 동료이자 연인이었던 테일러 요크와의 결별을 다룬다.
늘 솔직한 작사가였음에도 이번 작품에서 헤일리 윌리엄스의 가사는 유독 날 것 그대로다. 슈퍼스타 모건 월렌을 ‘인종 차별주의자 컨트리 가수’로 비꼬는 타이틀 트랙도 그렇지만 추정에만 머물던 이별을 공인한 극후반은 사실상 다큐멘터리다. 관계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깨졌음을 알리는 ‘Parachute’는 구체적인 대화 시점(‘리우데자네이루에서 돌아오는 비행기’)까지 언급하며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헤매던 지난날을 추억한다. 패닉 상태에 빠진 팬덤이 단체로 SNS 게시글과 행적을 복기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팝이 가십과 작가주의를 숭상하는 지금, 음반의 고백이 깊이 다가오는 것은 헤일리 윌리엄스처럼 폭풍의 눈에 놓였던 이도 드물기 때문이다. 파라모어를 개인 성공을 위한 발판으로 쓴다는 부당 의혹 속에 숱한 밴드 멤버 교체를 겪어야 했던 그였다. 모계에 걸친 압박감을 토로하며 자신을 죽여달라 간청하는 ‘Kill me’와 ‘버티기 위해 남성적인 음악을 들으며 여성성을 죽여야 했다’는 ‘Hard’의 처절한 넋두리는 여성 뮤지션과 프론트맨, 그리고 그 이전에 오로지 헤일리 윌리엄스라서 나올 수 있는 문장이다.
‘Misery business’, ‘Ain’t it fun’ 등의 히트곡으로 드러냈던 멜로디 주조 실력은 흉터를 헤집는 언어에도 앨범을 감정의 뭉텅이가 아닌 완성된 ‘음악’이 되게 한다. ‘Mirtazapine’이 분출하는 록 에너지와 중반부의 어쿠스틱 편성, 또는 그 둘이 만나는 1990년대 여성 얼터너티브 싱어송라이터 풍 ‘Glum’ 등 어떤 사운드를 취하든 선율이 살아있지 않은 곡을 찾기가 더 힘들다. 그 결과 다수가 고민하는, 단타로 치는 싱글과 긴 호흡을 유지하는 앨범의 동행도 손쉽게 해결되었다. 그저 좋은 곡이 모여 좋은 음반을 만든 것이다.
지난 헤일리 윌리엄스의 독집들은 파라모어에 대한 일종의 반발이었다. 드문드문 팝적 센스를 보여줬으나 장르 차원의 접근이 우선함에 따라 적나라한 내면 해부와 별개로 늘 약간의 거리감이 있었다. < Ego Death At A Bachelorette Party >는 다르다. 팝스타의 지위를 거부했던 자가 마침내 이뤄낸 타협 아닌 화합. 아이러니하게 이것이 그의 상처에 금칠을 덧대며 찬란한 스타 파워를 부여한다. 수없이 부딪히고 무너지는 고통의 과정 끝에 음악가 헤일리 윌리엄스의 자아는 죽음 대신 새 생명을 얻었다.
-수록곡-
1. Ice in my oj [추천]
2. Glum [추천]
3. Kill me [추천]
4. Whim [추천]
5. Mirtazapine [추천]
6. Disappearing man
7. Love me different [추천]
8. Brotherly hate
9. Negative self talk
10. Ego death at a bachelorette party [추천]
11. Hard [추천]
12. Discovery channel
13. True believer
14. Zissou
15. Dream girl in Shibuya
16. Blood bros
17. I won’t quit on you [추천]
18. Parachute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