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드밀리 인터뷰
키드밀리(Kid Milli)
곧 데뷔 10주년을 맞는 키드밀리의 자취를 되짚어 보자. < AI, The Playlist >와 < Maiden Voyage >로 강렬히 새긴 첫인상, 거대한 센세이션이었던 ‘Honmono’와 < 쇼미더머니 7 > 출연, 한국 힙합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인디고 뮤직의 총아. 2020년대 연거푸 내놓은 < Cliché >와 < Beige >는 그가 트렌디할 뿐만 아니라 앨범을 치밀히 구성할 줄 아는 래퍼란 사실을 신 전체에 공표했다. 일련의 활동 속에서 유행을 이끌고 또 붕괴시키며 쌓은 이름은 이제 흐릿한 흔적이 아닌 깊은 자국으로 남았다.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뛰어넘고 있지만 조금도 고삐가 느슨해지지 않았다. 방송에서 비추어지는 모습만을 보고 가벼운 아티스트라 생각했다면 큰 오판이다. 지난 시간을 하나씩 돌이키는 대화 속에서 느낀 진심은 그의 모든 작품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한데 아로새긴 항해록 안에 담긴 무게를 모두가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여러 페스티벌과 공연, 촬영 등 키드밀리의 이름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요즈음이다. 어떻게 지냈는가?
몇 달 동안 놀았다. (웃음) 외주가 들어오기도 했지만 개인 작업이 아닌 이상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세션, 프로듀서분들과 5월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약속해 두어서 착수한 지 몇 주 되었다.
최근 떠오르는 래퍼 몰리 얌의 싱글에 피처링을 보탰다. 무엇을 계기로 함께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몰리 얌에게 먼저 연락이 왔다. 앨범을 준비하며 이런저런 활동을 계획 중이라고 얘기해 주었는데 사실 그전부터 숏폼 컨텐츠를 통해 알고 있었다. 외국 래퍼들의 SNS를 통한 자기 PR을 국내에서는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 궁금하던 찰나에 등장한 아티스트기에 여러모로 궁금한 점이 많았다. 직접 만나 보니 진지하고, 비전 있고, 자신만의 철학을 지닌 사람이더라. 정말 열정적이라는 생각에 많이 도와주고 싶었다.
이전부터, 그리고 최근 ‘랩 하우스’ 공연에서도 < Cliché 2 >를 제작하는 중이라고 밝혀 왔다. 기다리는 팬들을 위해 작업 과정이나 진행 상황에 대해 귀띔해 줄 수 있나.
아직 데모곡을 쌓아놓은 후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단계다. 둘 다 훨씬 바빠져 이전처럼 자주 작업하지는 못했다. 내가 먼저 타입 비트에 랩을 하고 드레스 형이 아카펠라를 베이스로 작업하는 방식이 여전히 잘 맞아 굳이 바꾸지 않았다. < Cliché > 때는 너무 진지했다는 게 형과 나의 공통적인 의견이라 짧은 곡부터 시작해 큰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균형을 맞추고 있다.
작년에만 두 장의 합작 앨범을 냈다. 제작자의 입장에서 두 앨범을 비교한다면?
< Rad Milli >는 라드 뮤지엄 형이 음악하는 방식을 좋아해서 시작한 프로젝트다. 코드 구성이나 녹음 방식, 사운드 연출에 있어 내가 아는 알앤비 가수 중 제일 맥시멀리스트에 가까운 사람이기에 그런 과정을 배우고 싶었다. 유윌노우의 대희(DAEHEE)와 형이 자주 같이 작업하는데 편곡이 굉장히 세세하더라. 데모를 받은 후 악기 선택부터 모든 요소를 어우러지게 하는 단계까지 함께하며 프로덕션 면에서 많이 배웠다.
반면 < + >는 정말 가볍게 진행했다. 빅나티가 힙합에 열의를 가지던 때다 보니 그에게 주도권을 주었고 난 대중적인 작법을 익히고 싶었다. 다만 그 반응이 호평보다 악평에 가까웠으며, 자만할 만한 시점에 이를 통해 적절한 자극을 받았기에 결과적으로 많이 배웠다는 생각이다. 얼마 전 나티를 만나 그러한 피드백이 오히려 좋았다고 말하니 동의하더라. 앞으로 어떻게 음악을 해나갈지 알려준 앨범이라 나쁜 기억만 남지는 않았다.
발매 당시 합작 앨범들을 마무리 지은 후에 음악을 공부할 계획이라고 언급했다. 어떠한 방향이며 이 과정에서 영향을 받은 사항이 있는지.
악기 연주가 궁금했다. 음계가 있는 악기들은 칠 수 있는 목소리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랩을 제일 좋아하는 입장에서 내 목소리에 가시적이고 다방면적으로 접근하고 싶었다. 가령 기타 이펙터를 거는 것만 해도 보컬 믹싱과 비슷하니, 그런 과정을 통해 소리를 내는 방식에 있어 넓게 다가가 보려 한다.
‘Wet’ 발매 후 찍은 영상에서 슈프림과 에이펙스 트윈의 협업 의류를 입고 있었고, 스타일로폰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영상이 담긴 게시물도 있었다. 단편적인 정보들이지만 최근 들어 전자음악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후 작업물이나 행보와 관련된 언급일까?
아직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정도다. 요즘엔 UK 개러지나 드럼 앤 베이스, 시부야 케이와 하우스 쪽을 찾아 듣는데 너무 하드하지 않은 장르가 마음에 든다. 전자음악에 있어서는 취향이 확고한 편이다. 요즘 그런 스타일을 시도하는 게 재밌고, 그래서 아미네(Aminé)의 신보 < 13 Months of Sunshine >도 좋게 들었다.
< Beige > 발매 2주년을 눈앞에 뒀다. 제법 시간이 흐른 뒤 느끼는 소회가 어떤지.
2년이나 흘렀다는 사실이 아직도 어색하다. 영감이 제일 메말랐던 시기 만들었기에 처음에는 솔직히 왜 좋아해 주시는지 와닿지 않았다. (웃음) 갈피를 잡지 못한 상태에서 철저히 기술자의 관점으로 접근했고, 내면의 연약함을 가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강한 모습을 연출했던 앨범이다. 이제 와서 돌아보니 내 커리어에 꼭 필요한 단계였다고 느끼며, 지금은 많이 사랑하고 또 자랑스러운 작업물이 되었다.
당시 유럽 투어를 함께 진행했다.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었을 텐데 외국으로 진출하려던 계기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진출이라는 거창한 목표보다는 현실을 직접 보고 싶었던 쪽에 더 가깝다. 어떤 사람들이 내 음악을 듣는지, 그리고 해외에서 나는 어느 정도인지 항상 궁금했다. 외국 신은 피드백과 정보 공유가 국내보다 빠른 편이고, 퍼포밍에 대한 이해도도 높으며 공연의 유형 역시 다양해 많은 것을 느꼈다. 관객이 생각보다 많을 때와 적을 때 모두 있었지만 그 수와 상관없이 좋더라.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어디든 존재한다는 사실이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엔믹스 ‘Sickuhh’에 참여해 랩 전반을 컨트롤해 주었다. 타인의 랩을 디렉팅하는 경험은 어떠했는지.
정말 재밌었다. 탑 라인을 만든 적은 있지만 내가 쓴 가사를 남이 부르는 경험은 또 처음이었다. 한 번 해보니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더 적극적으로 임하려 한다. 개인적으로 대필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 꼭 K팝이 아니라 밴드나 같은 래퍼더라도 서로 의사가 일치한다면 참여할 의향이 있다.
최근 록 페스티벌을 관람하는 모습이 자주 보였으며, < Rad Milli > 앨범은 알앤비 색채에 가깝고 < Cliché > 작업 후에는 드레스와 K팝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계획도 세운 걸로 안다. 주 분야인 랩 외에도 다채롭게 도전해 보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지.
열망은 있지만 어쨌든 내가 해야 할 건 랩이다. 힙합은 장르 자체의 사이클이 빠른 만큼 항상 새로운 것을 보여주어야 하니까 일단은 거기에 집중하고 있다. 훗날 플레이어로서의 수명이 다할 때야 적극적으로 도전하지 않을까. 부업 느낌으로 종종 병행도 하지만 결국 나는 래퍼고, 사람들이 내게 기대하는 것 역시 힙합이니 본업을 더 열심히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장르 특유의 짧은 음악적 수명 탓에 고민하는 이들이 많다. 전성기에 선 시점에서 바라보는 자신의 미래는 어떤가?
나이에서 오는 한계는 기술이 좋아질수록 많이 보완될 거라 생각한다. 주변에서는 육체적인 노화보다 정신이 늙는 것에 대한 경계나 압박감을 크게 느끼는 것 같다. 매번 새로운 요소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장르라 더 그렇다. 물론 이센스 형처럼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지키며 인정받는 래퍼도 있지만 주류는 항상 트렌드에 민감하니 뒤처지지 않으려 경계 중이다.
눈여겨보는 트렌디한 아티스트가 있는지.
해외에선 데이비드(d4vd)의 음악을 즐겨 듣는다. 국내 신의 변동을 일으킬 래퍼로는 에피와 몰리 얌을 주목하고 있다. 각각 하이퍼팝을 고유한 정서로 풀어내고 자신을 효과적으로 프로모션한다는 점에서 다른 인디펜던트 아티스트들에게 큰 영향을 줄 것 같다. 물론 음악도 정말 좋고.
지금 와서 8년 전 정규 1집 < AI, The Playlist >를 자평해 본다면?
참 애썼구나. (웃음) 돈이 부족해서 믹싱과 편곡을 직접 하고, 뮤직비디오 촬영 역시 친구에게 맡겼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Why do fuckbois hangout on the net’을 통해 이름을 알렸는데?) 당시 빈스 스테이플스(Vince Staples)의 < Big Fish Theory >를 듣고 얼마 없는 인맥 중 테크노를 잘 만들면서 랩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람을 찾다 보니 이수호가 눈에 들어왔다. 원래 8개의 비트를 받았는데 마음에 드는 게 없어 고민하던 중 그가 폐기했던 파일을 되살려 가져온 것이다. 수호 입장에서는 반강제로 발매한 셈인데, 결국엔 가장 성공한 곡이 되었다.
과거의 애쓰던 키드밀리와 지금의 키드밀리는 어떻게 다를까.
그때는 랩으로 성공할 거라는 목표가 확고했기에 피곤함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앞으로만 달렸다. 오히려 많은 것들을 얻고 나니 이전만큼 부지런하기가 어렵다. 스케줄을 소화한 후 작업실에 돌아오면 너무 피곤해 시간을 제대로 내지 못하고, 한창 미래에 대해 생각할 나이인 만큼 고민도 많다. 음악 말고도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들이 늘어났다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만의 색채를 지키며 어떤 멋진 곡을 만들지 틈틈이 고심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키드밀리만이 가지고 있는 개성이란 무엇인지 스스로 정의해 달라.
플로우 하나하나를 허투루 짜지 않으려 한다. 불협화음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신기한 래핑을 들려주고 싶다. 그러한 시도가 데뷔 초기에는 ‘끊어치기 플로우’같은 별명으로 불렸고, 요즘은 플러그인을 다양하게 만져 색다른 사운드를 내 보고 있다. 모두가 하는 고민이겠지만 나는 더욱 꼬아서 접근하는 편이다. < Rad Milli > 앨범의 ‘Need u’에서 그런 방향성이 잘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가사 역시 재미없는 라인을 피하는 편인데, 참신함에 집착하다 보니 오히려 표현이 굳어져 밸런스를 잡는 중이다. 평소의 말투를 랩의 영역으로 옮기되 작사 면에서 최소한의 규칙은 지키고자 한다.
근래 방송인 침착맨 및 파김치갱 멤버들과 함께하는 일이 잦다. 키드밀리에게 그러한 힙합 신 밖에서의 활동은 어떤 의미일까?
전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과거 때문인지 시끌시끌한 분위기에 마음이 더 끌린다. 친한 친구를 만나는 쪽에 가까워 놀러갈 때마다 즐거운 마음이고, 매번 잘 대해 주셔서 늘 감사하고 행복하다.
은퇴에 대한 암시를 꽤 여러 순간 해왔다. 제법 오랜 생각이라 언급했고 많은 팬이 아쉬워하기도 할 텐데, 지금은 생각의 변화가 있는가.
과거엔 그 시한을 정해 두었는데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요즘은 당장 내일 끝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음악뿐만 아니라 인생에 있어 계획을 세우기보단 그때그때 바뀌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작년 음악적 수명을 길게 가져가고 싶다고 밝힌 적 있다. 이를 위해 스스로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결국 자기 자신과 맞닿은 음악을 해야 하지 않을까. 또 최대한 어린 친구들과 많이 교류하려 한다. 과거에는 피처링을 부탁해 놓고 감사 인사도 없으면 혼자 삐쳤었는데 요즘은 대가 없이 돕고자 하는 마음이다. 받았던 만큼 후대에 돌려주어야 하고, 내가 얻어가는 점도 많으니.
마지막으로 이즘 공식 질문이다. 인생 앨범, 곡 혹은 아티스트를 꼽아 달라.
랩을 시작하는 계기가 된 앨범은 빈지노 < 24:26 >, 스윙스 < Upgrade II >, 에이셉 라키 < Long.Live.A$ap >, 그리고 트래비스 스캇의 < Rodeo >. 인생 아티스트는 드레이크고 디스코그래피에서 < Honestly, Nevermind >를 제일 좋아한다. 디스전에서는 졌다고 생각하지만 (웃음) 그만큼 모든 분야를 잘하는 사람이 없지 않나. 디깅을 많이 하고 새로운 장르를 빠르게 가져오는 걸 보며 많이 배운다.
정리: 박승민
진행: 임진모, 염동교, 정기엽, 신동규, 박승민, 이재훈, 장대휘
사진: 신동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