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딛고 살아 있는 이름, 배호 탄신 84주년 기념행사

배호

by 신동규

2026.04.27


지금으로부터 55년 전, 가수 배호가 ‘마지막 잎새’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향년 29세의 젊은 나이,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과 함께 가요대상을 차지한 지 3년이 채 되지 않은 겨울이었다. 굴곡진 현대사의 복판에서 혁명을 갈구하던 청춘은 포크와 로큰롤을 붙들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기성 세대로부터 주류로 인정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자와 남진, 나훈아로 기억되는 트로트 진영과 최희준, 패티김, 한명숙 등이 일선에 섰던 스탠다드 팝 신이 양 축을 담당했다. 듣는 이는 비슷했으나 두 세계는 쉽게 섞이지 않았다. 새로이 등장한 학사 가수는 바다 건너에 관심을 가졌고, 그 대척의 별들은 정통을 외쳤다. 배호의 영광은 두 장르의 벽을 허물었다는 점에 있었다. 


전성기를 직접 목격한 사람이라면 배호가 당시 가요계에 퍼뜨린 이전과 다른 감정의 결을 잊을 수 없다. 남인수와 현인의 히트작을 쓴 작곡가 박시춘은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가수"라고 찬사했다. 그런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반세기하고도 다섯 해가 지났지만, 그가 남긴 음악성과 평생토록 곱씹을 추억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기에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그의 탄신일과 제사일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수십 년째 챙기고 있는 이들이 있다. 고인의 대표곡 ‘돌아가는 삼각지’의 노랫말처럼 ‘떠나버린 그 사랑을 그리워하며 / 남몰래 찾아왔다 돌아가는’ 이들. 배호사랑연합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최근에는 추모기념관 건립까지 준비 중인 그들을 따라 경기도 양주의 묘소에선 올해도 어김없이 탄신 기념행사가 열렸다.


1942년 4월 24일. 서수남과의 콤비로 사랑받은 하청일, 이수미에게 '여고시절'을 선물한 작곡가 김영광과 같은 날 태어난 배호의 생신제를 지내기 위한 자리였다. 꼭 연합회의 일원이 아니더라도 가수나 배우, 기업인, 평론가 등 각계 인사들이 얼굴을 비췄다. 샛바람 하나 없는 더운 날씨 속에 시작한 식은 간소한 제례를 시작으로 대표의 모두 말씀과 헌정시 낭독을 거쳐 고인의 음악을 합창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다 같이 부른 곡은 명실상부 대표곡 ‘돌아가는 삼각지’였다. 직접 챙겨온 통기타를 꺼내 또 다른 유명곡 ‘안녕’을 띄우는 등 추모기념관 건립을 논의하는 부차적 순서까지 모든 일정은 엄숙한 분위기를 벗어나 음악인 배호를 곁에 두고자 하는 마음으로 마치 동창회와 같은 유쾌함 속에서 진행되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정용호(배호 의제), 김명곤(배호사랑연합회 회장),
장용성(한 살 터울 소꿉친구), 황건(배우)

몇 사람에게 당신의 삶 속 깊이 침투한 배호라는 인물에 관해 물었다. 평소 독립운동사에 관심이 많았던 정용호 씨는 “한 잡지에 실린 배호의 이야기를 읽고 아버지가 광복군 출신임을 알게 되었는데, 부자가 일찍 세상을 뜨면서 유족들이 어렵게 살고 있다는 소식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고 회상했다. 수소문 끝에 ‘돌아가는 삼각지’를 쓴 작곡가 배상태로부터 집 주소를 알아낸 그는 홀로 남은 노모와 오빠의 사망 이후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여동생을 돌보기 시작했다. 새 아들을 자처해 집안의 대소사를 보필한 끝에 배호의 의제로 인정받았다. 산소 앞 세워진 ‘두메산골’ 노래비 뒤편, 직계 가족과 같은 선상에서 ‘의제’ 수식이 붙은 그의 이름을 볼 수 있다.

약 삼십 년 세월 동안 기념행사를 진행해 온 배호사랑연합회의 현 회장 김명곤 씨는 "쉰이 넘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배호를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투병 중이던 시기, 아들이 가져온 라디오에서 배호의 ‘파란 낙엽’을 처음 들었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는 김 회장.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목소리가 있느냐며 순간 고통을 잊어버렸다는 그는 회장으로 부임한 오늘날까지 20년간 배호와 조직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면서 임기를 다할 때까지 최선을 다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했다.

이날 만난 저마다의 배호들 가운데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그와 유치원을 함께 다녔다는 한 살 터울의 형 장용성 씨의 추억담이었다. 김구 선생을 돕던 배호의 아버지가 가족을 데리고 중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왔을 적에 서로의 어머니가 같은 교회를 다녀 자연스레 유년기를 같이 보내게 되었다는 그는 창신동의 한 동산을 놀이터 삼아 뛰놀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동네 어른들이 노래 한 곡 해보라시면 배호는 빼는 법도 모르고 곧잘 불러 3환씩 벌어왔다. 그 돈으로 사 먹던 알사탕이 지금도 생각난다”고 덧붙였다.

한편 배우 황건 씨와 배호의 만남은 어머니로부터 시작되었다. “술기운이 올라오실 때면 꼭 이 곡을 부르셨는데, 어린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 울지도 않아요’라는 노랫말만이 떠오를 뿐 누구의 곡인지도 몰랐다”고 설명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재즈 음악가 지인이 배호의 노래가 참 좋다며 같이 공연을 만들어보자고 권해 들어보니 기억 속 묻어뒀던 그 곡이 바로 배호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고선 놀랐던 순간이 선명하다고 전했다. 그렇게 시작된 프로젝트는 바이올리니스트 아내까지 합세해 작년 < 그 밤, 배호 >라는 헌정 무대로 매듭을 지었다. 

인사를 나눈 모든 이가 일제히 입을 모아 바란 건 관심이었다. 19음계까지 주무를 수 있는 타고난 음역이나 노래마다 변화하는 음색 조절과 같은 음악 재능은 물론 꾸밈없는 감정 이입과 신장염에 시달려 제힘으로 걷기조차 어려운 상태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무대에 오르려는 열정과 그 태도까지 배호는 단순히 대한민국이 사랑했던 그 시절 최고 인기 가수로 남기에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렇게 남기고 간 이백 여곡 또한 자기 틀에 갇히지 않으려 노력했던 절박함이 낳은 세기적 보물. 세대와 시대의 구분 없이 언제든 통용될 수 있는 유산의 대물림을 위해선 다름 아닌 우리들의 애정 어린 눈길이 필요하다.
신동규(momdk77825@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