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시대가 놓아버린 천재, 장덕ㅣ신동규의 시대연결

장덕

by 신동규

2026.04.14

모든 음악은 시대를 전제하고, 모든 시대는 저마다의 유산을 남깁니다. 그렇게 남겨진 수많은 축복은 대중으로부터 명곡, 명반 등의 칭호를 부여받고 끊임없이 호출되며 세대를 이어왔습니다. 시간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담겨있기 때문일 겁니다. 협소했던 과거는 다양한 보기를 제공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음악을 진정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만큼 많이 들리기도 했고, 찾기도 무지하게 찾았습니다. 


오늘날은 어떤가요. 너무 많은 선택지가 되레 역사의 선물이 현재에 닿는 것을 방해하는 건 아닌지 고민해 봅니다. 제아무리 지난날의 영광이 빛난다 하더라도 찾는 이가 없다면 계속되지 않겠죠. < 시대연결 >은 말 그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우리 가요의 전설들을 모아 세대 간의 시제를 연결하는 데 힘을 보탭니다. 글은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맞춰 쓰일 것이며 ‘아, 이 정도는 알아야 하나보다. 한 번 들어볼까?’ 정도의 호기심을 끌어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겠습니다. 다섯 번째 주인공은 시대가 놓아버린 천재, 장덕입니다.



1960년대는 전문 작곡가의 시대였다. 이미자에게 ‘동백 아가씨’를 선물한 백영호나 이수미의 대표곡 ‘여고 시절’을 쓴 김영광, 패티김이 부른 ‘서울의 찬가’의 길옥윤 등이 떠오른다. 신중현, 박춘석, 손석우, 이봉조 등 자신의 ‘사단’을 구축해 영역을 공고히 했던 이들도 빼놓을 수 없다. 유명 작곡가에게 곡을 받아 앨범 크레디트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이 곧 가수의 꿈이던 시기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풍조는 희미해져 갔지만, 1980년대까지도 경향은 존재했다. 이치현이 이끌던 벗님들은 그렇지 못한 가난한 음악가로 비치기 싫어 1979년 첫 음반에 본명과 가명을 번갈아 두며 정체를 숨기기도 했다. 

싱어송라이터라는 단어는 고사하고 그러한 개념과 필요성조차 떠올리지 못하던 때였다. 여기에 성별의 장벽까지 더해졌다. 여성으로서 직접 곡을 쓰고, 부르고, 앨범을 만들어 TV 무대에 나간다는 것은 오늘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척박했다. 물론 역사 속 여성 싱어송라이터가 없었던 건 아니었으나 그 자체로 인정받는 일은 드물었으며 사회 분위기 상 이의 불리함을 깨닫거나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다. 1980년대 독보적 인기를 구가하던 이선희 또한 같은 이유로 1996년 열 번째 앨범에 닿아서야 자신의 이름을 음반에 올릴 정도였다. 장덕이 특별한 까닭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서울시립교향악단에서 첼로를 켰던 아버지와 서양화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장덕은 예술가의 피를 물려받았다. 다섯 해 먼저 태어난 오빠 장현도 있었다.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쳤고, 일찍이 음악에 빠졌다. 하지만 균열이 찾아왔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맞이한 부모님의 이혼 선언이었다. 어린 자식들의 기죽은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던 어머니는 남매의 음악 재능을 기억하고는 미8군 무대로 둘을 올려보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장덕은 이미 자작곡을 쓸 정도였다. 신선한 구성과 개성으로 인기를 얻은 남매에게 구애가 잇따랐고 그렇게 방송계로 흘러갔다. 

‘최연소 남매 듀엣’이라는 수식이 두 사람 앞에 붙었다. TBC의 한 청소년 쇼 프로그램에서 장덕이 직접 쓰고 부른 ‘꼬마 인형’과 ‘일기장’이 소개되었고, 위 두 곡은 임예진 주연의 영화 < 여고 졸업반 >을 만든 김응천 감독의 차기작 < 푸른 교실 >에 실려 인지도를 얻기도 했다. 음반 계약을 맺은 남매는 팀명을 현이와 덕이로 바꾼 뒤 ‘사랑한다고 말해주오’와 ‘친구야 친구야’가 담긴 앨범을 선보였다. 십 대 음악가 장덕은 분야를 넓혀 연기자의 길로도 나아갈 만큼 다재다능했다. 

임원식 감독의 영화 < 내 마음 나도 몰라 >나 1970년대 하이틴 영화 붐을 이끌었던 석래명, 문여송, 김응천 감독의 합작 영화 < 우리들의 고교시대 >에 주인공으로 낙점되는 등 장덕은 1980년 이전까지 약 열 편의 스크린 활동을 뽐냈다. 오빠 장현 또한 박태원 감독의 작품 < 선생님 안녕 >에서 임예진과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이렇듯 대중문화의 일선에서 이름을 알려가던 중 하나의 분기점이 찾아왔다. 

우연히 만난 송창식에게 중학교 시절 만든 곡 ‘소녀와 가로등’을 들려준 일이었다. 그는 머지않아 열리는 제1회 MBC 서울가요제에 도전할 것을 권유했다. 조언을 받아들인 장덕은 타미 킴의 제안으로 출전을 결심한 신인가수 진미령에게 곡을 건넸다. 이 대회는 작곡자가 직접 지휘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는데, 이제 갓 고등학교에 진학한 소녀가 무대 위로 올랐을 때 대중은 보통내기가 아님을 직감했다. 대상은 길옥윤이 쓰고 혜은이가 부른 ‘당신만을 사랑해’의 차지, 장덕은 기념 음반에 자신의 곡이 실린 것으로 만족해야 했으나 수상 결과와 달리 이 곡은 곧바로 큰 사랑을 받으며 장덕과 진미령 양쪽 버전 모두 라디오에서 무수히 흘렀다. 

이듬해 서울가요제는 서울 국제가요제로 탈바꿈했고, 장덕은 오빠 장현이 부른 ‘더욱 큰 사랑’으로 다시 한번 얼굴을 알렸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다음 해에는 ‘머무는 곳 그 어딜지 몰라도’로 유명한 박경희에게 ‘사랑이었네’를 선물하며 3년 연속 출석의 기록을 세웠다. 마지막 대회에서는 수상에도 성공했다. 그사이 앞서 언급한 곡들을 모은 현이와 덕이의 첫 정규 앨범이 세상에 나왔고, 장덕은 ‘첫사랑’을 내걸며 홀로서기에도 도전했다. 전곡을 작사 작곡하며 그룹과 솔로 활동 모두에서 인정받은 그는 배우와 연주자로도 성과를 남기며 1980년 이전까지 유독 그의 이름만 볼드체로 쓴 듯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장덕은 어렸고, 연약했다. 인기가 커질수록 우울한 날도 많아졌다. 사생팬에게 시달리는 정도야 예삿일이었고, 유년기부터 앓아온 불안 증세가 밤낮없는 일정에 심해지고 있었다. 결국 그는 이 바닥을 떠났다. 어머니를 찾아 미국 유학길에 나섰다. 대학에 입학해 음악 공부를 하고, 현지 한인회에서 결혼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정서적 안정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결혼 생활은 끝이 났고, 향수병이 그를 더 괴롭혔다. 아버지와 오빠를 향한 그리움도 고통이었다. 홀연히 귀국한 장덕은 다시 음악계로 돌아왔다. 네 해 만에 발표한 두 번째 앨범이었다. 

‘날 찾지 말아요’ 정도는 방송에서 종종 흘렀으나 공백기 이후 달라진 대중의 온도가 살갗에 닿았다. 1984년 세 번째 앨범 발매에도 하락세는 더욱 가팔랐다. 여기저기서 하이틴 스타를 찾던 1970년대 말과 성인이 되어 돌아온 1980년대 중반의 문법은 판이했다. 친구나 가족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그렇게 우울감을 키워가던 그때 오빠 장현이 손을 내밀었다. 웅크려있지만 말고 현이와 덕이를 재결성하자는 것이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남매는 7년 만에 묵혀둔 이름을 꺼내 들었다. 결과는 역전 만루홈런. 머리곡이었던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가 단숨에 십 위권 내로 파고들며 장덕의 잃어버린 호흡을 되찾아주었다.

모처럼 웃음을 볼 수 있었다. 1986년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해로 작곡가 장덕의 앞서간 감각을 볼 수 있는 이은하의 명곡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이 크게 히트했고, 몇 주 뒤 자신도 솔로 활동을 재개하며 ‘님 떠난 후’를 발표했다. 성인 취향의 포크 음악을 바랐던 오빠와 달리 실험과 도전에 목이 말랐던 동생은 디스코 기반의 곡을 내세우며 댄스와 전자음이 점차 등장하던 시기와 발을 맞췄다. 대중도 강하게 화답했다. ‘님 떠난 후’는 이듬해 가요톱텐에서 5주 연속 1위를 차지할 정도로 큰 사랑을 받았으며 외에도 ‘이팔청춘의 고백’, ‘어른이 된 후의 사랑은 너무 어려워’ 등이 애청되었다. 그해 라디오에서 가장 많이 들린 여성 가수 중 하나였다.


나름 선방했던 ‘이런 게 아니었는데’를 이어 아기자기한 율동으로 인상을 남긴 ‘얘얘’가 뒤따랐다. 특히 이 곡은 얼마 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 폭싹 속았수다 >에 실려 반가움을 더했다. 솔로 음반을 내며 꾸준히 활동하던 장현도 동생을 강하게 밀어 주기 위해 매니저를 자처했다. 회사를 세우고, ‘경아’의 주역 박혜성을 영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늘은 이 둘의 행복을 가만두지 못했다. 입병으로 찾아간 병원에서 오빠 장현이 설암 3기를 판정받은 것이었다. 혀 대부분을 잘라야 수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할 수 있었지만, 그는 말조차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에 수술을 거부했다. 

얼마 후 선보인 여섯 번째 앨범 < 예정된 시간을 위해 >가 인기를 끌었다. 1990년대를 맞이해 오랜만에 연기에도 도전했으나 악화한 병세에 끝내 오빠 장현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병간호에 집중했다. 그러나 장덕이 누굴 도울 처지는 아니었다. 오히려 같이 치료받아야 했다.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의 그는 약 없이는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게 모든 걸 내려둔 채 버티던 장덕은 다수 약물 복용에 의한 쇼크로 세상을 떠났다. 본인 활동과 병간호뿐만 아니라 작곡 의뢰와 음악 외적 행보까지 감당할 수 없는 과로가 끝내 그를 데려간 것이었다. 투병에 말도 할 수 없던 오빠는 동생의 비보를 듣고는 종이에 슬프다는 문구를 적으며 소리 없이 통곡했고, 반년 후 동생의 길을 따라 걸었다. 

시대를 앞서갔다는 표현을 상투적으로 쓰곤 한다. 요절한 인재들이 으레 그렇지만 장덕은 특히나 이와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성인이 되기 전부터 그의 감각은 당시 사회가 규정해 둔 틀을 넘어서고 있었고, 그 완성도는 고지식한 사람들의 혀 차는 소리를 덮을 정도로 높았다. 대중음악을 떠나 예술 전반에 대한 이해가 풍부했으며 유행을 읽을 줄 알았다. 미국에서 돌아와 맞이한 두 번째 전성기는 변화의 핵 속에서 이제야 물을 만난 것으로 보였으나 모두가 세상의 울타리를 논할 뿐 갈수록 좁아만 가는 그의 마음 반경은 외면당했다. 천부적인 선율 생산 능력과 나이를 넘나드는 언어 감수성은 역설적으로 평생 그를 따라다닌 외로움에서 비롯된 결정체였으니 장덕은 우리가 기억으로 품어야 할 또 하나의 천재다. 
신동규(momdk77825@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