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금요일, 방탄소년단이 약 4년간의 공백을 깨고 다섯 번째 정규 앨범 < Arirang >으로 돌아왔다. 슈퍼스타의 복귀에 전 세계의 눈과 귀가 한국으로 몰렸다. 불을 지핀 건 발매 이튿날 광화문 일대에서 예정된 공연이었다. 2만 2천 여장의 무료 표가 팔렸고, 서울시는 최대 30만 명 수준의 인파가 밀집될 것을 예상했다. 정부는 테러 경보를 ‘주의’ 단계로 격상했으며 현장에는 경찰·소방 공무원 등 통제 인력 만 오천여 명이 투입됐다. 증권가는 월드 투어를 포함한 이번 음반 활동으로 3조에 육박하는 매출을 전망, 여기에 관광에 따른 소비 진작을 더한다면 그 이상이 될 가능성을 내다봤다.
방탄소년단이기에 가능한 규모였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좋지 않은 여론이 한쪽을 뒤덮었다. 과잉 관리를 주된 논지로 삼은 사회적 합의 부재의 측면과 보여준 퍼포먼스는 물론 작품의 완성도 자체에 의아함을 표하는 두 가지 양상이 이면에 자리 잡은 것이다. 공권력을 동원해 거리를 통제하는 일은 당연지사 버스와 지하철은 종일 무정차 및 우회 통과를 지속했다. 인근 회사 직원들이 상부로부터 연차 혹은 반차를 강요받았다는 민원이 속속 전해지는가 하면 이틀간 종로구 일대의 모든 택배 업무가 중단되었으며 근처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망라한 다수의 공연예술장의 휴관 조치, 건물 입장 통제, 검문, 지하 편의 시설 사용 규제 등 갖가지 제한이 동시에 이뤄졌다.
치안 유지 목적으로 공무원이 차출되거나 미화를 위해 세금이 사용된 점은 적지 않은 규모의 군중이 밀집되기에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상반된 여론에 불씨를 당긴 건 무대 지척의 한 호텔에서 이날 결혼이 예정되어 있던 부부의 이야기였다. 부지 선점 이전부터 미리 예약해 둔 예식을 이제 와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지자체나 소속사로부터 협조 혹은 양해 요청도 받은 바 없었다는 사실이 들려왔다. 결국 경찰력을 투입해 하객을 운송하고, 청첩장 소지 유무 등 소지품 검사 이후 입장을 진행했다. 시작도 하기 전부터 오가는 입씨름에 일찍이 피로감이 일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한편 하이브는 공연 터로 광화문을 일주일간 빌리는 데 3천만 원, 경복궁과 숭례문을 사용하고 촬영하는 데 6천만 원, 총 1억 원 남짓의 비용을 치렀다.
‘BTS 대단한 거 다 아시죠?’ 식의 고자세는 국가를 무대로 하룻밤의 쇼케이스를 진행케 할 마패로 기능했다. 일제히 국익을 논했다. 조 단위의 경제 효과와 세계 순회를 동반한 이번 활동이 국내총생산의 몇 퍼센트를 끌어올릴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그 대척에 선 시민들의 불편은 뒷전이었다. 출처 모를 뉴스가 앞뒤를 다퉜고, ‘강제성’과 ‘경제성’이라는 고자극의 단어가 머리글을 따라다녔다. 실제로 이번 공연이 가진 의의와 그 수익성은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상징적이다. 그러나 그 이익을 위해 누군가의 자유와 권리를 임의로 조절할 수 있는가는 엄연히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적확한 기준 없이 이 정도의 몸집과 위세라면 중앙 주도하에 얼마든 통제하여 광장을 내어줄 수 있다는 전례가 생긴 것이다. 국가는 어떤 이유로든 개인의 의지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정의에는 줄을 서면서 ‘방탄소년단이니까 괜찮다’라거나 ‘이들이니까 하지 누가 또 하겠냐’라는 식의 논지는 비난에 가까운 비약이다.

한 발 뒤에서 바라보자.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고, 사회적 합의가 원만히 이루어졌다고 할 때, 거둬들인 이익에 있어 우리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가. 꼭 그렇지도 않다. 방탄소년단만큼 일회성 공연으로 이렇게 큰 관광 특수를 안길 가수도 당장 없겠다마는 넷플릭스와 손잡고 전 세계 190여 개국에 동시 생중계되어 수천만 명이 한국발 콘텐츠에 눈을 맞췄다는 의의 속 실질적으로 발을 붙일 영역은 적다. 현장에서 창출된 즉시 수익을 제한다면 거대 자본에 어깨를 빌려 근래 부쩍 공을 들이고 있는 넷플릭스의 동시송출 시장 확장 노선에 하이브의 잘 팔리는 상품을 더한 노골적 전략의 단초로 비칠 뿐이다. 오늘날 K팝의 흥행 수준으로 비춰볼 때 앞으로 펼칠 오리지널 랜드마크 공연의 레퍼런스로 삼기 위한 계획적 동반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의 이미지나 시민 의식처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도 뺄 수 없겠으나 이 부분을 논하자면 사회적 합의의 미약함과 다시 부딪히게 된다. 문제는 공연을 마친 후의 인상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는 점이다. 일부 과장하여 예시를 들어보자. 서울 시내의 한 건물을 통째로 들어내고 그곳에서 4강 진출권이 걸린 월드컵 경기가 열린다고 할 때, 마찬가지로 어딘가에선 누군가의 불편이 발생할 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납득할 만한 경기력을 보여주고, 직접적 피해가 일어난 사안에 대해 적절한 보상이 이뤄진다면 합의의 오차를 떠나 그 결정에는 대체로 호의적일 가능성이 높다. 이건 국제 경기고, 국가대표이기에 가능한 상황이라고 생각한다면 오늘날 방탄소년단의 체급을 대하는 각계각층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음은 쉽게 알 수 있다. 즉 그럼에도 내용이 무결했다면 시작도 하기 전에 불거진 잡음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기회는 희미해졌다. 무대는 실로 이만한 사회적 비용을 감수할 만큼이었는지, 또 어째서 이곳이어야만 했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리더 알엠의 갑작스러운 부상 소식과 같은 멤버들의 컨디션 관리는 차치하고, 오늘만을 기다려온 아미들의 보랏빛 물결은 활용조차 되지 못했으며 미숙한 카메라 움직임 및 연출, 몰입을 저해하는 넷플릭스의 라이브 음향, 풀 세션의 부재 등 조건이 어쨌든 맹목적 애정을 전송할 팬이 아니라면 당위를 찾기 어려웠다. 하물며 마이크 웍 또한 “우리 이번에 앨범 냈어요. 음악 좋죠” 식의 되풀이뿐이었다. 그 자리에서 곡에도 등장하는 김구 선생을 언급하며 민족의 한을 떨쳤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한 시간에 모든 환경을 맞춘 물리적 한계까지 더해져 국민성 고취의 발판이 아닌 인기 보이 그룹의 과열된 쇼케이스 현장으로 전락한 것이다.
멤버들을 향한 건강한 비판은 음악적 해석과 표현의 측면에서 다뤄야겠으나 그 이외의 모든 요소는 계획 단계부터 관례상의 철저한 이익 구조를 통해 급조한 사례로 갈무리될 공산이 크다. 무대 기획과 실물 건축, 안전 점검 단계를 유튜브 스트리밍을 통해 보여주고, 정부는 물론 산하 기관이 현장에서까지 적극적으로 얼굴을 비추며 국가적 행사로 낙인을 찍었다. 이 틈을 놓칠 리 없는 정치권은 젊은 층에는 선한 이미지 각인을, 중장년층에는 애국심 격려를 명분으로 분주했다. 당초 25만 명을 웃돌 것이라는 예측과 달리 동원 인력까지 포함하여 6만을 내외로 한 비교적 적은 숫자가 현장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과도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한 듯한 인식은 분명하며 낭비로의 접근보다는 어쩌면 네 해 전의 이태원 참사를 상기한 웅크리기 방도의 단면으로 비치기도 한다.

대중이 음악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떠한가. 세계가 열광하는 K팝의 저력이 물론 자랑스러우나 오래전부터 우려하던 자국민에 대한 냉대가 이보다 더 한국적일 수 없는 제목의 작품에서도 역설적으로 등장했다. 아리랑이라더니 정작 우리말은 없다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까운 일본의 흐름만 바라보아도 시장의 시선이 내수에 있냐는 문제에서는 결이 다르다. 가요에도 좋은 노랫말이 많지만, K팝에 한정해서 볼 때는 동의하기 어렵다. 애초 수익을 기대하는 거의 모든 기획이 외국인을 표적으로 삼기에 의미는 뒷전이다. 설령 그 안에 읽지 못한 고귀한 뜻이 서려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맞춰진 것이냐 묻는다면 대체로 그렇지 않을뿐더러 꼭 맞는 문법으로 전달되고 있지도 않다. 한글을 모르는 사람이 쉽게 반응할 수 있는 발음과 강세에 치우치는 가운데 자국의 청취자는 조금씩 배제되어 간다.
작년 10월 발매된 백예린의 세 번째 정규 앨범 < Flash And Core >나 여전히 차트 상단을 누비고 있는 키키의 ‘
404’에도 대중이 동일한 수준의 잣대를 들이미는가? 그렇지 않다. ‘
Dynamite’와 ‘
Butter’가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하던 시기에도 동일한 마음을 공유하는 한숨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방탄소년단이라고 꼭 일정 비율 이상의 한글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 다만 절대적·인식적 체급의 차이는 분명하다. 약 4년 만의 복귀전에서 그들은 이 격차를 인지해야 했다. 더구나 평소 접하는 빈도와는 무관하게 한국인의 DNA에 깊이 내재한 ‘한 맺힌 아리랑’이라는 상징과 정서를 가져올 심산이었다면 더욱 그렇다. 만약 < Arirang > 속 말장난이 이를 고려한 결과였다면 그것은 판단 착오이자 계산 실패다.
결국 방탄소년단의 ‘내한’ 쇼케이스였던 셈이다. K팝의 선전과 별개로 다양한 장르가 유기적으로 얽혀 시장을 누비고 있다면 이렇게 왈가왈부할 필요도 없겠으나 현재 90% 가량의 자본이 한류 시스템에 투자되고, 내부에서도 그 시선에만 혈안 된 모습이 안타깝다. 국악과 헤비 메탈의 크로스오버로 해외 각지에서 적잖은 찬사를 받고 있는 잠비나이나 엘튼 존이 응원을 전할 정도로 뚜렷한 활약을 보이는 부산 출신의 록 밴드 세이수미가 해외 투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국내에서 과연 그 백 분의 일이라도 환영받을 수 있을까. 거대 물줄기가 흘리는 몇 방울에 대중은 만족을 느끼고, 그마저도 품지 못하는 절대다수의 시민은 차분히 소외되어 간다. 수익성과 숫자놀음에 음악이라는 본류가 뒤처진 오늘의 상황을 과연 K팝이라 부를 수 있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방탄소년단의 아리랑은 의미를 퇴색한 채 일개 보통명사로 남는다.
국위선양과 외화벌이도 매우 중요한 사안이지만, 함께 살아가는 이 바닥의 지표로 기능할 수 있는 말과 우리만의 특색을 뽐낼 수 있는 소리가 우선적으로 갖춰져야 한다. 멀리서 바라본 < Arirang >과 광화문 공연은 그저 잘 가공된 추세 상품에 가깝다. 그 상업 논리에는 10대 혹은 그 전을 내외로 하는 어린 나이의 피와 땀과 눈물이 필수 공물이라는 사실이 당신은 달가운가.

그간의 유례없는 기록과 파장을 기억한다. 피나는 노력 끝에 봄날을 맞이한 일곱 청년의 성과 중심적 아성은 냉정한 잣대를 부를 수밖에 없다. 원치 않아도 얻은 만큼이나 감내해야 할 사항이다. 고로 방탄소년단은 자신 앞에 놓인 수치를 버려야 한다. 3년 9개월의 공백, 그것이 낳은 무게감은 끝내 우리가 보여줘야 할 것은 오롯이 대중음악의 영역에 있을 뿐, 그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쪽으로 귀결되어야 했다. 이러한 기점에서 가장 쉽고도 유리한 방향은 정체성을 건드리는 일이다. 소수가 소수에게 전하는 버팀목 이미지를 꾸준히 쌓아올려 왔기에 선택은 수월했을 것이며 복귀에 어울리는 형상으로도 제격, 분명한 결실을 맺지 않은 상태에선 쉬이 택할 수 없다는 나름의 자격성까지 인지했을 테다. 다시 말해 보여질 모습에 치우쳐 보여줄 여지를 놓친 격이다.
나아가 광장은 시민의 것이어야 한다. 이 짧은 문장을 당연하게 쓰기 위해 흘린 값비싼 눈물을 떠올린다면 응당 더 높은 수준의 합일이 필요했다. 이는 서울 시민은 물론 나아가 사회 전반이 이해할 정도의 선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한가운데 위치한 경복궁의 심장 근정전에서 출발해 흥례문과 광화문, 세종대왕과 성웅 이순신을 차례로 잇는 조선왕조 오백 년간 왕이 지나던 그 길에 방탄소년단이 최초로 섰다. 공연을 앞뒤로 순식간에 불타올랐던 여론도 무섭도록 빠르게 조용해진 가운데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럽다 부르짖는 문화가 결국 과정은 생략된 채 ‘결과’와 ‘성과’만을 중시하는 극단의 산물로 남은 건 아닌지 이참에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 넓지도 않은 부지에 수만이 모였다는데 어찌 된 일인지 공허와 허기만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