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올해의 국내 앨범

by IZM

2025.12.13


화려한 이슈와 별개로 음악을 향한 열정의 불씨가 꺼진 적은 없으니, 음악가의 열렬한 창작 혼과 이를 완성된 앨범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근본적 열망은 여전히 뜨거웠다. K팝에는 드디어 자전적 서사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오랜만에 개화한 아티스트의 몸짓도 찬란했다. 기타를 짊어멘 밴드와 포크 신은 세대 불문 다양성의 축제를 벌였고, 힙합과 알앤비에선 질적 성장이 한창, 하이퍼 팝을 팝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신예 등장까지. 화려한 각개전투의 양상을 묶은 2025년 대표 앨범, 순서와 순위는 무관하다. (손민현)



고고학 < Vol.07 > 

신인이 쏟아져 나오고 오매불망 기다리던 중견도 속속들이 복귀한 밴드 신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여전히 뜨거웠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해진 시장 속에서 관찰되는 생존 전략은 크게 세 가지다. 손쉽게 흥얼거릴 선율로 다가가거나, 대체 불가능한 분위기를 구축하거나, 쉬이 따라 못 할 극한의 테크닉을 전시하거나. 작업물에 번호를 붙이며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온 밴드 고고학은 이들의 일곱 번째 간행이자 첫 정규작 < Vol.07 >에 이르러 이 3요소의 황금비를 발견했다. 어렵지 않은 첫인상에 이끌려 책을 펼치면 이내 무서운 흡인력이 독자를 사로잡는다. 편안하고 강력하다.


낯익은 키워드들의 절묘한 집합체다. 밴드라는 외피를 벗고 보면 알앤비에 가까운 멜로디 라인과 그 위에 덧씌워진 신세대의 잿빛 감성은 오늘날 인디의 조류를 충실히 서술하고, 익숙함에서 매너리즘이 고개를 들 즈음엔 정신이 아득해지는 변주를 통한 기교가 그 여지를 철저히 제거한다. 빈틈없는 플롯으로 ‘광야‘의 우주적 공간감에서 ‘감’의 산뜻함까지 아우르니 왠지 모를 기시감도, 불쑥 찾아오는 생경함도 모두 고고학만의 음악이 된다. 차별화에 심취한 시대, 커다란 육각형을 그리며 이룬 성취가 더욱 반갑다. (박수석)



산만한시선 < 산만한시선 2 >

증폭과 쪼개기에 몰두한 시장, 밴드와 인디를 동의어로 받아들이는 기이한 풍경 속 언플러그드의 힘이 다시금 고개를 든다. 이들의 성취는 외치기 바쁜 세상 속 독백의 예술과 마주한 것에 있다. ‘성두빌라’에서 ‘강릉아산병원’으로, ‘은십자가’에서 ‘짐승의 끝’으로, 끝내 ‘개의 심장’으로 부르는 ‘사랑’의 ‘노래’로. 해석과 설득의 경계를 휘저으며 고정된 심상에 갇히지 않고, 블루스를 비롯한 장르 배합과 창법의 변주를 통해 선명한 곡선을 그렸다. 이곳에 슬쩍 김민기, 함춘호, 김일두, 씨 없는 수박 김대중과 같은 선배들의 손길을 덧대자 열여섯 곡에 달하는 두께의 명분마저 뚜렷하다. 


미러볼과 팡파르에서 달아난 젊은이의 안식처를 자처한다. 동갑내기 포크 듀오 송재원과 서림의 시선은 언젠가부터 당연하게 생각하는 총천연색 영화를 닮은 세상을 경계하며 흑백의 다큐멘터리로 향했다. 극장은 항시 누군가의 동경과 이상으로 가득 찬 다종다양의 빛깔로 채워졌지만, 우리네 현실은 대체로 투박하고도 정적인 단편 혹은 독립영화와 가까웠다. 손에 익은 것들의 초월에 투신하는 미래지향 일변 가운데 일기를 쓰고 뒤를 돌아보는 두 사내의 산문집. 가끔 비뚜름하고, 평이해 보여도 좋다. 모든 물가에 파도가 치진 않듯 지금의 자리에서 본질을 노래하는 솔직함만으로 충분하다. (신동규)



소울 딜리버리 < New Wave >
국내 흑인음악 생태계 한켠에 새로운 물결이 친다. 정해진 악보를 따르지 않는 비정형과 가사 없이도 영혼을 동화시키는 비언어의 파동. 이 다양성을 해설할 과업은 소울 딜리버리가 맡았다. 소울을 넘어 펑크(Funk)와 재즈의 정취가 담긴 파도에선 예측 불가능한 선율이 일렁인다. 복잡한 생각 없이 자연스레 리듬을 타게 되는 ‘자유로’에서 정신없이 음계를 오르내리는 ‘Heatwave’에 다다르면 요동치는 잼의 즉흥성이 가열된다. 완전한 몰입 아래 본능적인 움직임이 여느 때보다 흥겹다.

언어로 해설하지 않아도 다가오는 직관성과 정체성의 조화는 너그럽고도 화목한 공감을 불러냈다. 네 사람이 합일한 곳에서 ‘New wave’의 트럼펫, ‘Oldmanstreet’의 마림바 등 악기가 더해지자 표현에 강세가 붙었고 감정선은 한층 다채로워졌다. 이 온전한 소리의 공간에서 변주로 묘사되는 위트, 뿌리를 둔 문화에 대한 진심, 모두를 포용하는 넉넉한 마음을 마주한다. 음악이 가진 원초적인 연대의 힘이 구획과 고자극의 시대에서 유려하게 빛났다. (정하림)



식케이 & 릴 모쉬핏 < K-Flip+ >
내심 우리는 이런 음악을 고대했다. 도파민 치솟는 자극적 성질의 얘기가 아니다. 진짜 필요했던 것은 ‘해외 수준이다’라는 흔한 칭찬에 깃든 사대주의 해소. 분명한 출처를 감안하더라도 오랜 세월에 걸쳐 독자적 신을 구축한 힙합 진영 입장에서 ‘우리나라에 이런 음악이?’와 같은 감탄이 불편해지는 요즘, < K-Flip+ >는 그 지점을 파고든다. 간단하다. 레이지와 트랩이라는 수입산 틀 위에 김사월의 포크와 실리카겔, 칵스 등 인디 록, 이디오테잎의 전자음악, 심지어 김현정의 댄스곡마저 샘플로 부어 로컬 음악 농도를 극대화한 것이다.

사전 지식 없이도 즐길 구석은 무수하다. 레퍼런스 관해 날 선 질문을 받아온 식케이의 전적과 KC 레이블 컴필레이션으로 닦아온 기반, 샘플의 국적 같은 맥락은 몰아치는 킬링 트랙 행렬 앞에서 부차적 요소다. 원본을 마구 비틀고 쪼갠 릴 모쉬핏의 비트 위 넘실대는 팝의 감각에 몸을 맡기고 있으면 ‘국산’과 ‘트렌드’라는 수식어가 알아서 평형을 이룬다. 에픽하이를 참조한 ‘Lov3’로는 한국 힙합이 더 이상 어딘가의 하위 분파가 아니라는 주장까지 더했다. 많은 변화의 시작이 될 작품. 진짜 뒤집힌 것은 ‘K’가 아니라 우리의 고정관념이다. (한성현)


에피 < E >
올해 국내 힙합은 여러 수작이 탄생했고 메인스트림에는 < K-Flip+ >가, 언더그라운드에는 < E >가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다. 에피는 세대교체와 함께 변화한 향수의 소재를 부드럽게 또는 날카롭게 어루만진다.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를 정확히 겨냥한 앨범은 복각에 그치지 않고 재구성, 2020년대 사운드와의 결합으로까지 확장했다. 디지털 세대의 노스탤지어. 한 장의 정규가 지니는 파급력은 신예 아티스트의 영리한 구성으로 젊은 세대에게 강한 소구력을 지닌다.

반짝하고 등장한 라이징 스타에게 쏟아지는 열광의 배경에는 트렌디한 프로덕션이 존재한다. 작년부터 하입을 받기 시작한 해외 래퍼 투홀리스(2hollis)와의 작업으로 국내에도 인지도가 적잖은 킴제이가 그 공인(功人)이다. 하이퍼팝과 힙합을 절묘하게 혼합한 결과물은 ‘힙스터 감성’ 자극에 적격이었다. 이제는 하나의 유행으로 번진 사운드는 발매 직후 많은 이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러나 음악은 수용자를 기다리지 않는다. 이미 끝났다. 에피는 팔짱을 끼고 새 시대를 거부하는 이들에게 외친다. ‘20세기 출생들은 이제 좀 꺼져봐’. 원래 새 물결을 일으키는 것은 젊음의 소관이다. (장대휘)


엔믹스 < Blue Valentine >
오랫동안 기다렸다. 엔믹스에 대한 대중의 호불호는 ‘믹스팝’이란 올가미에 묶인 노래가 원인이었다. 자연스럽지 않고 불편한 조립식 음악에 매몰된 그들에게 많은 사람들은 멤버들의 실력의 낭비이자 능력의 부식이라며 안타까워했고 이런 지적은 시간이 흐를수록 줄어드는 음반 판매량에 대한 근거 있는 이유였다. JYP엔터테인먼트와 엔믹스의 불꽃 튀는 노력은 이 지점에서 점화됐고 절치부심한 멤버들은 첫 번째 정규앨범으로 모든 것을 증명했다.

< Blue Valentine >은 달랐다. 한 곡에서만 다채로움을 우겨 넣었던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각각의 트랙들에 다양한 스타일을 부여해 통일된 앨범을 구성했다. 올해 초에 공개한 어둡고 무거운 EP < Fe3O4: Forward >와의 대척점에서 효과를 극대화한 댄스팝, 라틴, EDM, 힙합, 레게, 재즈, 하이퍼팝, 일렉트로닉, 팝펑크 트랙들은 대한민국의 6인조 걸그룹 엔믹스의 위상을 상향조정했다. 이들의 변화는 성장이고 다양함은 진전이다. (소승근)


샘 리, 이근형, 이선정, 이성열, 찰리 정, 타미 킴 < 더 뮤지션 >
30년 이상 세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이선정, 이성열, 타미 킴, 샘 리, 이근형, 찰리 정이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모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지만 그들은 시간을 쪼개고 서로를 양보하면서 마침내 합을 이뤘다. 이들의 노력과 열정, 역사의 응축물은 음원과 공연 그리고 다큐멘터리 영화로 재생산되어 K팝의 근간에 자신들의 지분도 있음을 명확히 했다. 

청각적 자극과 시각적 볼거리를 쫓는 현재의 음악 소비자들에게 여섯 기타 장인들의 음악은 지루하고 밋밋할 수 있지만 그들의 손끝에서 나오는 소리의 울림통 안에는 기타와 음악에 대한 미련한 애정과 우직한 정성이 공존한다. 여러 번 반복해서 들어야 그 매력을 느낄 수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깊게 우려낸 사골처럼 기타 명인들의 연주는 우리의 지난 슬픈 기억과 행복한 추억을 환기한다. 조연이 주연이 되는 휴먼 드라마는 언제나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소승근)


임현정 < Extraordinary >
완벽을 향한 개인의 열망이 한국 가요 전체의 품격을 높였다. 드라마적 선율과 집착에 가까운 사운드 미학, 클래식과 팝의 경계를 포용한 가창의 조화가 보통의 기준치를 아득히 뛰어넘는다. 번데기 형태에 본인을 가두면서까지 밀어붙인 음악 고집의 명분은 오로지 자아실현이다. 대중음악인으로서 이율배반인 이 목표와 순수한 열정의 총체가 비상한 올해, 우리는 임현정 자신을 위한 우아한 날갯짓을 감상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고고한 움직임 이면에는 분명 자기 질책과 결단이 혹독하게 준동했을 테다.

시작부터 완숙한 절정이다. ‘Good time’의 후련한 이별의 날숨은 해방과 자유를 가로지르는 상승기류 ‘Butterfly’를 매끄럽게 타고, 단숨에 ‘Talking of eternity’에서 미련의 정서로 치닫는다. 상대는 오로지 ‘나’뿐, 스스로를 향한 이토록 외로운 연애사도 드물 것이다. 무거운 주제와 고전 양식에 잠식당하지도 않았다. 현악 배경 위 록, 팝, 뮤지컬, 한국적 감성까지 가요의 틀에 녹여낸 대중적 크로스오버, 사랑은 봄비고 이별은 겨울비라던 낭만이 제련된 완벽한 사랑 노래의 근사치. 감정과 의지, 예술혼이 아름답게 공명한 작품이 대상과 시대를 비범하게 뛰어넘었다. (손민현)


제니 < Ruby >
“I am what you think about me(나는 너의 인식으로 정의된다)” - ‘Zen’ 中

이로써 우리는 더욱 제니를 규정할 수 없게 되었다. 으레 K팝 산업이 아이돌에게 채우는 투명 족쇄를 대담하게 끊고 당당히 얻어낸 자격과 같다. 금기에 가까웠던 여성의 주체성 또는 종교를 논하는 담론의 장을 열어젖히며, 일반적인 홀로서기의 예상 범주를 가뿐히 무력화한다. 끈질긴 반대 세력을 포함해 세간의 눈치를 보지 않는 자가 달리는 개척 영역이 무섭게 너르다.

여성을 위한 주문 ‘Mantra’가 판을 크게 뒤흔드는 ‘ExtraL’의 몸집을 키워 응집체를 건설했다면, 두아 리파, 차일디시 감비노, 도미닉 파이크 등과의 컬래버레이션으로 더 거대한 지평을 바라보기도 한다. 쉴 새 없이 움직이다 부동의 자세를 행하니, 선정(禪定) 상태인 ‘Zen’을 통해 현실에 그치지 않고 관조의 세계까지 파고든다. 제니는 더는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다. 끝없이 변주되는 비정형의 공간이자 누구든 그 여백에 스며들 수 있는 열린 호명이다. (임선희)


지바노프 < Misery >
얼터너티브 알앤비와 컨템포러리 알앤비라는 용어를 떠올린다. 외연과 특징이 모호한 개념이므로 엄밀한 정의보다는 단어가 지닌 방향성에 주목하는 편이 더 유효하다. ‘동시대적인’ 그리고 ‘대안적인’. 10년 동안 꾸준히 작업물을 축적해 온 지바노프의 정규 3집은 두 수식어를 모두 아우른다. 유려한 미성으로 필요 조건인 좋은 멜로디를 충족시킨 후 여러 악기를 펼쳐놓으니, 대중성의 < Good Thing >과 전위성의 < Void > 사이에서 끝내 스위트 스폿을 찾았다. 부드러운 선율의 ‘낯선 사람’부터 강렬한 요소들을 정밀하게 조립한 ‘Meet me at the dream’까지 이어지는 다채로운 스펙트럼이 그 증명이다.

견고한 뼈대 덕에 다양한 장치가 절묘하게 맞물린다. 타이틀 ‘Misery’의 섬찟한 이별 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낸 서사와 치밀한 스킷 활용은 작가주의적 성향을 여실히 드러낸 예시다. 특히 ‘오늘은’ 말미의 두터운 일렉트릭 기타를 뒤틀어 간결한 반주의 ‘날씨 탓’과 연결하는 전개, ‘Thinkin’ bout u’ 도입부의 브라스가 만드는 순간적인 낙차가 각별하다. 팝적 미감을 기반에 두면서도 적절한 지점에 강세를 넣어 자연스레 양쪽의 매력을 즐길 수 있다. 친숙함과 이질감의 공존을 비춰낸 < Misery >는 훗날 2025년 서울의 알앤비를 떠올릴 때 하나의 길잡이별로 반짝일 것이다. (박승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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