뽑을 게 많아 고르는 데 애를 먹는 해가 있는가 하면, 고를 게 없어 채우기 바쁜 해가 있다. 솔직히 말하자. 경쟁이 볼만 했던 작년에 비해 금년의 해외 시장은 빈집이었다. 메인스트림의 터줏대감들도 주춤했고, 확고한 신인도 보이지 않았으며 컨트리처럼 언제나 수율을 유지하는 장르도 부진, 지난해를 달궜던 디스전과 같은 외적 장치도 없었다. 문제라기보다는 이런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럴수록 더 다양한 작품에 시선을 둘 수 있지 않나. 비교적 단순했던 한해, 이즘이 눈여겨 본 열 곡을 소개한다. 순서는 순위와 무관하다. (신동규)
드레이크(Drake) ‘Nokia’
정보가 아닌 상식이 된 것처럼 드레이크의 2025년은 불 보듯 불길했다. 힙합의 제전이 된 디스 전쟁에서 저항적 거성 켄드릭 라마는 히트 메이커 드레이크에게 치명적 굴욕을 안겼다. 언론과 대중은 왕들의 전쟁이라 했지만 이 격투에서 켄드릭은 ‘원탑’을 공고히 했고 ‘Not like us’에서부터 올해 시저와 함께 한 ‘Luther’까지 이어진 자이언트 히트로 드레이크는 팝에서 삭제될 듯한 위기에 처했다. ‘지금까지의 음악적 재능까지 묻힌 참패’, ‘사망한 패장’과 같은 극언들이 난무했다. 하지만 드레이크는 음악계에서 역사적으로 아티스트 복원의 소재는 다름 아닌 음악이라는 점을 증명했다.
랩과 R&B 사이, 싱잉과 랩 사이의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중간 지점을 파고드는 것으로 이름난 그는 이 곡으로 본연의 ‘사이의 미학’을 차분하게 재현하고 중독 비트와 후렴이란 자신의 상징에 충실하면서 ‘다시’ 올라섰다. 쾌락 추구의 파티 송인데도 왠지 모를 절제의 자유, 그만의 양식적 기쁨을 선사하는 래핑, 맥박의 가능성을 끌어올리는 플로우...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독자적 예술 영토에 깃대를 꽂으면서 그의 랩은 형태가 아니라 스타일임을 성공적으로 호소했다. 애플뮤직 차트에선 ‘Luther’를 꺾고 정상을 밟는 등 상반기엔 그와 동의어인 최강으로 포효했다. 말과 분노가 아닌 음악 에너지가 아티스트를 살린다. (임진모)
올해 최고의 힙합 뱅어 트랙은 장르의 본고지인 미국이 아니라 영국에서 탄생했다. 지금 가장 핫한 디제이이자 백인 프로듀서 프레드 어게인, UK랩의 최전방에 위치한 흑인 래퍼 스켑타의 퍼포먼스는 현재까지도 전 세계의 클럽을 뒤흔드는 중이다. 직관적으로 신난다. 도이치와 리코 내스티(Rico Nasty)의 ‘Swamp bitches’를 샘플링한 중독적 루프 위 얹어지는 드럼과 808 베이스, 스켑타의 날이 선 래핑은 반강제적으로 몸을 움직이게 만든다.
재밌는 걸 좇으니 직관적인 결과물이 만들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스트리머 겸 프로듀서 플랙보이맥스(PlaqueBoyMax)의 온라인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처음 ‘Victory lap’을 공개한 것도, 화이트 보드에 대충 휘갈긴 프로젝트 내용도 전부 익살스럽다. 어느새 5탄까지 발매된 사운드의 대중성은 검증할 필요조차 없다. 플레이보이 카티가 미국 전역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날아온 갑작스러운 펀치는 2022년 센트럴 씨의 ‘Doja’ 이후 영국 힙합의 입지를 더 확고히 굳힌다. (장대휘)
헌트릭스(HUNTR/X) ‘Golden’
이미 기록된 언어와 업적만으로 치하하는 것은 결례다. < 케이팝 데몬 헌터스 > 서사의 핵심이자 대표로 추대된 ‘Golden’은 가시적 성과를 세운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 신드롬은 서브컬처에 불과했던 K팝이 서구권 대중문화 권력 체계를 무너뜨린 통쾌하고 짜릿한 반란이었다. 실질적 파급력과 의미는 한 해 내내 지구가 피부로 느꼈다. 불과 반세기 전 주한미군 부대에서 싹을 틔운 한반도의 대중음악이 지금 세계 어느 곳에서나 들려온다. 빌보드부터 각 대륙의 작은 마을까지 평등하게 정복한 이 역사적 싱글은 그만큼 수치보다 문화적인 상징으로서 대우받아야 마땅하다.
거대 미디어와 외국 자본의 손을 잡은 혼혈이긴 해도 우리 음악과 문화를 존중했다. 영어와 한글의 동등한 병기, 도시를 내달리는듯한 연주, 이 모든 것을 한 데 분출하는 고음 카타르시스까지. 수요자에 따라 외피를 팝으로 성형한 순혈 K팝과는 다른, 우직하고 순수한 접근에 세계의 감동과 극적인 인정이 이어졌다. 장르의 본질을 굴절 없이 투과한 ‘가장 본연의 K팝’이라 가능했던 일. 정복기를 돌아보며 ‘Golden’은 경쟁자들에게 당당히 묻는다. ‘팝’이라 불리는 그대들은 올 한 해 진정 ‘대중적’이었고 시대를 감각했는가. 그 지위를 획득한 올해의 싱글은 유일하다. (손민현)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 & 시저(SZA) ‘Luther’
한 해를 기념하는 확실한 징표가 켄드릭 라마를 가리킨다. 디스전을 포함해 힙합 신을 점령한 작년의 전투는 본편, 차트 성적을 거머쥔 올해의 서사는 번외편에 가깝다. 결말은 그가 단독으로 선 슈퍼볼 하프타임쇼에서 이미 예견되었다. 확고하게 표출된 정체성과 해석을 유발하는 상징의 연속으로 약간의 장벽이 세워졌던 대부분의 러닝타임에 반해 시저와 합을 맞춘 장면은 모두를 포용하고 감화시켰다. 압도적인 무력을 뽐낼 절정 전 잠시 숨을 고른 덕분에 ‘Luther’는 더 넓게 가닿았고 결국 파급력에 힘입어 정상으로 날아올랐다. 최고의 자리에서 터뜨리는 또 다른 낭만적인 축포였다.
화제성이 도약을 촉발했다면 13주라는 장기 집권의 원동력은 직관성이다. 곳곳에 밴 루더 밴드로스의 중후한 멋이 1980년대의 추억을 되살리고 음률을 감미롭게 물들이는 두 아티스트의 호흡이 달콤한 알앤비를 빚어냈다. 듣기 편한 사랑 노래인 데다 개개인의 인기로 흥행이 보장된 조합이었으니 대중을 장악하기엔 여러모로 충분했다. 뾰족한 히트곡이 부재했던 이번 봄은 왕좌의 주인이 묘연했고 언제든 자리가 대체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불안정한 정국을 정리한 켄드릭 라마와 시저는 탄탄한 지지 기반을 바탕으로 2025년 빌보드 최상단에 가장 오래도록 트랙을 새겼다. (정하림)
레이디 가가(Lady Gaga) ‘Abracadabra’
광기의 화신이 뛰놀던 댄스 플로어가 다시 빨갛게 점등한다. ‘Bad romance’부터 따라다닌 열렬한 추종자들은 과거의 재림을 반겼고 유흥이 고팠던 현대인도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한데 모였다. 애시드한 전자음이 흘러나오자 군중은 도취되고 이내 중독적인 'Abracadabra'라는 주문이 전파되니 이에 속절없이 매료될 뿐이었다. 방문 목적이 어떻든 난립하는 비트 앞에선 모두가 평등해진다. 돌아온 거장이 가장 자기다운 정체성만으로 파편화된 취향을 결집한 성과는 올해 충분히 기록될 만하다.
음악을 넘어 무대가 남긴 여파도 대단했다. 뮤직비디오의 기묘한 안무를 무대 위에서 그대로 재현하는가 하면 과장된 새빨간 드레스와 함께 오페라 하우스 그 자체로 분하는 형상은 레이디 가가만이 연출할 수 있는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이렇게 과격한 퍼포먼스에도 흔들림 없는 가창력이 뒷받침되어 시각적 유희와 한 장르의 아이콘에게 거는 기대감까지 완벽히 충족시켰다. 단순화의 시대에 가하는 규모의 반격. 가수의 본질에 충실하면서도 팝의 맥시멀리즘을 전면에 전시한 싱글로 그의 지위는 급변하는 트렌드 속에서도 여전히 공고하다. (정하림)
올리비아 딘(Olivia Dean) ‘Man I need’
‘Golden’의 곧은 고음 뒤에 가려진 소울의 역습. 선대와 마찬가지로 소포모어 징크스를 역(逆)으로 깨며 영국 소울 디바 역사에 다음 챕터가 열렸다. 2000년대 에이미 와인하우스와 2010년대 아델에 이어 21세기 첫 사반세기를 마무리하는 2025년 올리비아 딘이 2집 < The Art Of Loving >과 그 대표곡 ‘Man I need’로 계보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OST, 컨트리, 기성 가수들의 곡이 죽치고 앉아 신선함이 죽어 있던 올해 선명한 흔적을 남겼다는 것만으로도 고무적이다.
대형 팝스타가 주춤하고 원하는 음악을 즐겨듣는 태세의 반대급부로 갈수록 다양한 신예들이 등장하고 있다. 몇 해 전 팝과 록으로 폭발했던 올리비아 로드리고와 정반대로 올리비아 딘은 소울, 알앤비, 재즈를 구사하며 디안젤로도 떠나 슬픈 금년의 신 기수로 떠올랐다. 폭넓은 호평을 받은 이 싱글 또한 그의 간판 장르처럼 시대를 뒤집는다. 연애를 기피하는 요즘 ‘내게 필요한 남자’라는 직설적 표현으로 잘파세대의 숨겨진 마음을 대변하며 ‘음악계에 필요한 본인’을 증명했다. (임동엽)
레이(RAYE) ‘Where is my husband!’
한 편의 코믹 필름! ‘내 남편 도대체 어딨어’라는 문장 후미에 물음표 대신 느낌표를 접착한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다. 슈프림스가 엿보이는 1960년대 걸그룹으로 분한 레이는 머리칼을 흔들며 비어 있는 약지를 가리키는 구애의 퍼포먼스로 좌중을 휘어잡는다. 우습거나 우스꽝스럽다는 뜻은 아니니 오해 마시라. 속사포에 가까운 신세 한탄으로 재기를 뽐내다가 과거와 현재를 적절히 섞은 장르와 ‘나 자신을 먼저 사랑하자’라는 결말까지 챙기며 노련하게 주인공 역을 소화한다.
점차 음악만으로는 승부를 내기 어려운 현 시대에서 보기 드물게 순수한 재미를 선사한다. 바이럴 홍수 속 차고 넘치는 자극적 소재, 챌린지, 밈을 걷어낸 유머, 재치 그리고 메시지는 오랜 무명 기간 갈고닦은 실력의 산물이다. 게다가 2025년 팝에서 실종된 중독성을 명예로이 회복하여 먼 나라 한국까지 닿았으니 올해의 팝송으로 뽑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신예 아닌 신예, 레이에게 우리는 기대가 아닌 확신을 갖는다. (임선희)
롤 모델(ROLE MODEL) ‘Sally, when the wine runs out’
즉흥성을 머금은 라이브 퍼포먼스는 틱톡 시대 바이럴 흥행의 온상이다. 작년 화제의 챌린지가 각종 공연마다 그날의 ‘애플 걸’을 카메라에 잡은 찰리 XCX의 ‘Apple’이었다면 올해 그 자리는 싱어송라이터 롤 모델이 차지했다. ‘Sally, when the wine runs out’을 부르며 관객을 무대 위로 초빙하는 ‘샐리’ 타임에 각종 유명인이 하나둘 가세하며 리스트를 풍성히 채운 덕분이다. 신세대 팝스타 트로이 시반, 올리비아 로드리고, 코난 그레이, 루이스 카팔디, 나일 호란, 찰리 XCX, 심지어는 배우 나탈리 포트만까지 동참했다.
남녀노소 노래에 맞춰 흥겹게 춤추다 가는 모습은 술김에 짧은 사랑을 나누는 가사가 그렇듯 인스턴트 세상의 시대정신과도 닿아 있다. 숏폼의 소비 방식을 따르는 한철 유행가? 그렇다 한들 소프트 록의 단란함과 컨트리 기타를 두루 섞은 이 상큼한 팝 트랙을 거부하기는 힘들다. 쇼핑몰에서 막춤을 추는 뮤직비디오처럼 장소 불문 내적 댄스를 즉각 봉인 해제시킨 2025년의 필 굿 앤썸! 긴 무명 시절을 보낸 인디 뮤지션을 대형 페스티벌에 올린 노래, 과장을 조금 보태 SNS를 연구하는 신진 음악가들의 ‘롤 모델’이 될 만하다. (한성현)
솜버(sombr) ‘Back to friends’
한국형 팝스타는 유례없이 고고한 역사를 자랑한다. 찰리 푸스를 필두로 코난 그레이, 맥스, 라우브, 벤슨 분 등 영상 콘텐츠의 부상과 함께 특히 미혹의 남성 아티스트도 그들만의 영역을 견고히 다지고 있다. 올해의 수혜는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솜버가 받았다. 흐름을 따져보면 감미로운 팝을 뽐낼 것 같지만 스타일은 완전 딴판이다. 포스터 더 피플, 고티에를 대표로 하는 2010년대 초반 그 시절 인디 감성을 이용해 돌고 도는 유행을 영리하게 써먹는다.
독립 뮤지션이 살아남기 힘든 아이돌 중심의 국내 시장에서 솜버는 해외 팝이라는 테를 두른 덕에 접근하기 용이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자체 레이블을 세울 정도로 개성을 추구하지만 이러한 부분을 선제적으로 어필하지 못한 것과 별개로 ‘Back to friends’를 비롯한 ‘Undressed’ 같은 곡이 국내외 가릴 것 없이 입소문을 타며 입지를 다졌다. 숏폼이 정착한 이제 바이럴된 곡이 히트하는 것이 아니라 히트할 노래가 바이럴되는 시점에 접어들고 있다. (임동엽)
테이트 맥레이(Tate McRae) ‘Sports car’
견고했던 침대 위 노트북 시대의 팝에 균열을 낸 건 역행을 포착한 육체미였다. 솔직함을 무기로 감정을 공략한 Z세대 주자들 사이 감각 자체로 압도하는 전략은 발레 슈즈를 쥐었던 이력 덕분. 뮤직비디오의 좁은 세트장이든, 댄서를 대규모로 호령하는 라이브 무대든 테이트 맥레이의 안무는 ‘보이는 음악’의 흡인과 직관을 되살렸다. 우연? 그보다는 타이밍 조절이다. Y2K 유행의 중심에서 재현한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관능미나 숏폼 화면으로도 보이는 아레나 공연에서의 숙련된 움직임 등 적기를 겨냥한 용의주도함이 무뎌진 촉각을 세웠다.
계승의 핵심은 ‘어떻게’다. 묵직한 비트와 날카로운 신시사이저, 속삭이는 보컬은 2023년 ‘Greedy’로 드러낸 스타성의 초석이 2000년대의 팝 유산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가사 속 욕망의 은유는 당대 아이콘의 정체성을 흡수해 퍼포먼스의 쾌감을 증폭시켰다. 차이도 분명하다. 대상이 아닌 주체로서 시대적 맥락을 반영했다는 것. 맥시멀리즘의 낌새가 반가운 요즘 그를 기다리는 것은 디바의 칭호다. 댄서 커리어를 가진 싱어송라이터, 귀한 프로필에서부터 이미 결론은 났다. (남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