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국내 음악계의 최대 행운은 절대 강자의 부재다. 뜻하지 않은 외부로부터의 침공 < 케이팝 데몬 헌터스 >를 제외하면 특별히 지배적인 수준의 히트곡이나 아티스트를 찾아보기는 힘들었고, 덕분에 한 해를 바라보는 시야는 더 넓어질 수 있었다. 신-구의 융합, 작가주의 아이돌의 태동, 인디에서의 성취 등 1년을 다각도로 돌아보려는 치열한 논의 끝에 정리된 2025년의 트랙을 소개한다. 순서는 순위와 무관하다. (한성현)
다영 ‘Body’
주요 멜로디와 리듬, 곡 구조의 팽팽함, 대중성까지 모든 것이 황금비율을 이룬 노래다. 2010년대 하우스와 EDM 스타일을 따른 ‘Body’는 고품격 댄스 넘버로 2025년의 뜨거운 여름의 열정을 가을까지 연장했고 걸그룹 우주소녀의 멤버 다영에게는 새로운 능력과 다양한 가능성을 인증한 터닝 포인트가 됐다. 직관적인 퍼포먼스와 입체적인 가창은 변신과 외연확장의 블루칩이 됐고 소속사인 스타쉽 엔터테인먼트는 이 변곡점을 능동적으로 활용해 예능인으로 선회하려던 다영을 아티스트로 되돌렸다.
‘매일매일’과 ‘너만이’를 제외한 모든 영어 가사와 미국 팝스타 스타일의 뮤직비디오는 글로벌 팬들을 향한 손짓이며 전 세계 K팝 팬들은 그 의지에 반응했다. 음악계에 한 획을 그을 정도로 월등히 뛰어난 곡은 아니지만 들으면 밝고 행복하며 신난다. 대중음악의 가치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실천한 ‘Body’는 순수하고 정직한 대중가요다. 이 곡으로 다영은 ‘소녀’에서 성숙한 ‘K팝의 숙녀’가 됐다. (소승근)
마크 ‘1999’
어느 때보다 K팝 아티스트의 개인 활동이 주목받은 2025년, ‘엔시티 최종 병기’의 솔로 타이틀은 그룹의 화려한 문법을 벗어난 팝이었다. 기존 이상의 시도만이 유의미함을 가질 수 있었고 퍼포머보다 스토리텔러에 가까울 정도로 개인을 드러냈던 경쟁작 사이 ‘1999’는 착색 없는 참신함과 친숙한 성실함으로 어필했다. ‘Golden hour’와 ‘200’의 표출을 희석해 무게를 덜어낸 가사와 흥겨운 멜로디, 마침 이를 포착한 ‘힙레 챌린지’의 유행까지. 마크를 만들어낸 무수한 음악과 경험은 그를 그룹 활동의 연장선이 아닌 확장의 지점에 두었다.
세기말의 펑키(Funky)를 소화하는 스물여섯의 패기가 신선하다. 힙합 비트와 현악기의 완급조절 위로 축포 같은 브라스가 경쾌한 에너지를 뿜어내고, 또렷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는 목소리는 K팝 내 가장 독보적인 올라운더의 여유를 설명했다. 네 개의 도시, 복수의 그룹, 상반되는 콘셉트, 자유와 완벽을 나들며 개척한 다양성에서 모든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해상도는 가장 높아진다. 세대를 거듭하며 트레이닝과 기획이 고도화되는 요즘, 능동적인 아티스트의 자기표현은 늘 짜릿하다. 그룹의 정체성과 같았던 이의 가장 자기다운 회고이기에 더 그렇다. (남강민)
송소희 ‘Not a dream’
전통을 수호하는 21세기 음악인들에게 독창적인 변용과 변칙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디스코 리듬에 몸을 맡긴 이날치와 펑키(Funky) 샤머니즘이란 합성어를 도출한 추다혜차지스 같은 이질적인 결합과 혁신의 소용돌이에서 송소희는 고요한 태풍의 눈으로 들어가 본질을 응시한다. 최소한의 현대적 편곡으로 빚은 꿈결 같은 공간에 높낮이를 빈틈없이 파고드는 고유의 창을 더하자 그 중심에서 응결한 신비로운 소리는 오늘날의 신세대가 주도하는 판놀음에 안착했다. 민요라는 협소한 영역에 머물던 국악 소녀가 직접 재단한 맞춤형 개량한복을 입고 독보적인 자태를 드러내니 시대와의 동행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한 개인의 서사를 넘어 음악에 내재한 보편성의 쾌거다. 인고 끝에 자유롭게 내지르는 발성은 불안과 고뇌 속에서 헤매는 현대인의 응어리를 풀어주었고 잊고 있었던 전통의 울림은 취향이 분절된 시대에도 국악이 늘 우리 곁에 자리했음을 일깨웠다. ‘너’가 아닌 ‘나’를 핵심에 세운 가사도 범용의 근간으로 이 곡이 펼쳐낸 광활한 초원에는 서로 다른 감상을 포개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만끽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모두가 향유하는 가요이자 한민족의 정서가 담긴 ‘Not a dream’은 장르 간 분별이 쉽지 않은 현시점에 당당히 내걸 수 있는 우수의 ‘K팝’이다. (박시훈)
신인류 ‘정면돌파’
인색한 표현, 메마른 감정, 손쉬운 가치평가, 얼어붙은 시장, 그리고 현실. 각자의 상흔을 짓누르며 고통에 신음하는 저조도의 비명. 그것이 청춘이라 자평하는 무질서한 소리 가운데 신인류는 인디 신의 조명이자 등불을 자처했다. ‘정답은 결국 그대 안에 있으니 우선 춤부터 추고, 함께 시를 짓자’라는 푸른 발상과 이를 그대로 본뜬 명랑한 연주는 세상과 친해지고 싶은 수많은 새순을 양달로 인도한다. 저마다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청춘의 고민을 긍정의 기운으로 끌어안는 음악과 안온한 마음가짐이 달갑다.
유행은 언제나 양산을 낳는다. 드디어 이 바닥에 새바람이 불었다고 외쳤던 순간도 해를 지나 좀처럼 형체가 흐릿하다. 크고 작은 페스티벌이 넘쳐나고, 슈게이징이나 펑크와 같은 장르가 조명받고, K팝 문법에 익숙한 층이 유입되는 등 문화가 변한 만큼 언제나 비관과 체념으로 귀결되는 우울 선언과 무조건적 젊음 장사, 곧 제 살을 깎는 기한 놀이에 안주하는 때도 많아졌다. 밝음이 매 능사는 아니겠으나 음의 전제는 양이다. 한데 모인 화음과 그 기상으로 ‘정면돌파’하는 신인류의 위풍당당 행진가. 본질에 가까운 가장 단정한 형태로 올해의 허기를 채웠다. (신동규)
올데이 프로젝트 ‘Famous’
‘벼락’ 스타덤이라 할 대중적 인지도 급상승은 거의 전적으로 애니의 소임이었다. 멤버 가운데 재계 11위 재벌의 딸이 있다는 사실만큼 완벽한 순기능 바이럴의 호재는 없다. (출신의 끝판왕?) 여기서 일찍이 승부가 났다. 그 덕에 ‘Wicked’는 빠르게 성장판을 열었고 극적 감각이 만연한 ‘Famous’에 와선 상승 기조를 극대화했다. 신인은 등장과 동시에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연예계 속설, 아니 진리의 실천이었다. 애니 말고 요인이 하나 더 있다. 그는 팀의 겉을 맡은 애니와 달리 ‘속’을 이끌었다. 베일리였다. 그의 몫인 댄스는 정해진 코스를 밟아가는 진부함 아닌 충동을 따르는 것 같은 길들지 않음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정반대의 믿기지 않는 세련됨이 공존했다. 그러니 그 어린 나이에 레드벨벳의 ‘싸이코’, 태양의 ‘바이브’, 에스파의 ‘도깨비불’의 안무를 짜준 게 아닐까. 오랜만에 경험하는 비(非)교화, 본능적, 내추럴 댄스. 그가 주도한 사소하나 큰 변화는 갈수록 따분해지고 있는 K팝에 필요한 순수 야성을 폭발시켰다. 대중은 음원을 듣는 걸 넘어 반드시 영상을 봐야 정체성 파악이 확실했다. 애니 외풍(外風)과 베일리 내연(內燃)에다 흡수력 빠른 타잔 영서 우찬의 댄스, 랩, 비주얼 화력은 성공의 주문을 완성했다. 간만의 혼성그룹이란 정체성마저 유리하게 작동하면서 신선이란 언어는 그들에게만 붙었다. 올해의 신인이다. (임진모)
윤도현밴드 ‘Rebellion (Feat. Xdinary Heroes)’
사실 금속성을 향한 열망은 지면 아래서 꾸준히 꿈틀댔다. 그 덕에 발라드의 문법으로 진입장벽을 낮추고 서정적인 노랫말로 친숙하게 다가갈 때도 YB는 언제나 ‘로커’의 정체성을 견지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로 박살 낼 줄은 몰랐다. 어느덧 데뷔 30주년에 다다른 이 베테랑들은 2000년대 들어 헤비니스의 흐름을 이끈 메탈코어에 젠트(Djent)의 중량을 얹어 거침없이 전장을 누빈다. 육중한 리프가 포성을 울리면 윤도현이 야수 같은 포효와 멜로딕한 가창을 오가며 종횡무진하고, 무자비한 전차가 밀고 지나간 자리엔 불길한 쇳기만이 이글거린다.
신예의 가세는 노련함에 젊은 패기를 수혈했다. 세월의 차이에서 격세지감을 느낄 법도 하지만 자유를 부르짖는 외침 속에서 나이와 연차는 중요치 않다. 척박한 우리 토양에 YB가 ‘대중적 록 밴드’를 이룩하며 지반을 다졌고 그 땅 위에 뿌리를 내린 엑스디너리 히어로즈가 힘을 더하니, 세대를 뛰어넘어 등을 맞댄 두 팀의 연대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흐뭇하다. 사그라지지 않고 이어지는 로큰롤 정신과 그렇게 틔운 또 하나의 새싹. 그리하여 록은 죽지 않는다. (박수석)
이찬혁 ‘멸종위기사랑’
낭설은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사랑, 멸종 위기론’은 유독 생명력이 강했다. 차트와 영상으로의 침투가 전설 속 구전동요의 양상이다. 감미로운 멜로디로 휘감은 전언에 현혹되어 사람들은 끝을 모르고 따라 부른다. 절대자의 아가페를 인간 언어로 옮긴 가스펠과 동물적 성애를 리듬화한 디스코, 두 장르를 거느린 에로스의 분신은 이 사태를 구경하며 분명 흥겹게 하강했을 테다. 양극단의 사랑을 양손에 쥐고 천사 중창단을 거느린 그는 내일이면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감정이 사라지리라 섬뜩하게 공표, 비정한 인류 사회는 그 처지에 꼭 맞는 음악적 패러독스를 목도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품행이 독특할지라도 그는 분명 온정이 있었다. 문학적으로는 참신할 지라도 ‘사랑 소멸’이라는 발상은 인본주의에도 한참 반한다. < Eros >라 자칭했으니 신화 논리로도 비약이다. 그렇다면 비극을 고대하며 퍼붓는 즐거운 제례와 환희에 찬 코러스는 과연 진심인가. 임의적 해석으로 따뜻한 결론을 소망한다. 역사 속 모든 종말론은 실현된 적이 없다는 게 결정적 단서. 이 침울한 복음의 진의는 흥겨운 반어법에 있다. 그는 사랑의 최후를 설파하며 신자들의 믿음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우리는 아직 사랑을 잃지 않았음을, 당연히 그런 애달픈 미래도 없음을. (손민현)
이프아이 ‘Nerdy’
유독 뛰어난 신인 아이돌 그룹이 많이 등장했던 올해, 가장 좋은 곡의 기준은 각자 다르겠으나 가장 듣기 편한 곡은 이프아이의 손에서 나왔다. 도입부의 변조된 보컬과 에스닉한 드럼에 당황하지 말기를. 보컬이 흘러나오자마자 홀린 듯 빨려 들어갈 테니 말이다. 각자의 색깔을 하나씩 비추어내는 파트 뒤로 너르게 펼쳐진 코러스가 푸른 파도를 유영하는 편안함을 자아낸다. 이어 샤샤와 미유가 번갈아 중심을 잡으면 모두 힘을 합쳐 겹겹이 화음을 쌓으니, 새삼스럽게 ‘목소리가 최고의 악기’라는 오래된 경구를 되새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Nerdy’가 이들의 데뷔 싱글이라는 점이다. 평균 나이가 채 20살이 되지 않은 멤버들의 노력이 선명히 다가오는 한편 신비로운 분위기 역시 사춘기의 설렘을 오롯이 담아냈음을 깨닫게 된다. ‘애써 못 본 척 널 지나쳐’도 다시 ‘로봇처럼 뚝딱’이는 감정선이 하늘하늘한 멜로디에 스며들고, 한 글자씩 발음하는 단어가 새로운 의미로 재탄생한다. ‘괴짜 같은’, ‘세상 물정 모르는’, ‘무언가에 푹 빠진’ - 다양한 뜻을 가진 표현이지만 적어도 이프아이의 ‘Nerdy’는 ‘사랑스러운’을 포함한다. (박승민)
조동희 ‘꽃차례’
‘어떤 꽃은 봄에, 어떤 꽃은 가을에
같은 줄기에서도 꽃이 피는 순서가 있대
늦게 피는 것이 뒤처진 게 아니듯
우리는 우리만의 시간을 사는거야’
철없어 보일까 내심 숨겨 왔지만, 사실은 무엇보다 듣고 싶던 말이었다. 깊어지는 청춘의 방황과 그 현실 속 빈말이라도 던져줄 어른이 그리웠다. 조동희의 소작에는 화려한 연주, 고음과 춤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글의 힘이 있다. 그의 문장은 유별히 떨어야 했던 작년 겨울의 웃풍을 함께했고, 개화를 앞둔 망울의 설레는 마음을 일깨웠으며 자극을 배제한 순수의 형상으로 현대인의 빈 감성을 채웠다. 핏줄의 이름값과 과거의 위상에 고뇌하던 인고의 시간을 기억한다. 마침내 온 배경의 무게를 넘어선 조동희의 음악은 끝내 < 꽃차례 >로 만개했다. (신동규)
코르티스 ‘What you want’
자필로 작성된 출사표는 종이에 반듯하게 그어진 줄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 무엇을 썼나 들여다보니 어렸을 때부터 바라온 내용이 차례로 적혀 있다. 작업 과정이 노래에 그대로 투영된 모양이다. 녹음을 시작하고 각자의 소망을 풍선에 불어넣으니 속에 간직한 열망이 터져 나오며 곧바로 완성된 ‘What we want’. 남의 이야기가 아닌 안에서 샘솟은 단어는 고칠 필요 없이 젊은 세대의 욕망을 건강하게 노래하는 데뷔곡이 되었다. 그럼에도 첫술에 배가 차지 않은 코르티스는 춤추던 트레드밀을 박차고 나와 이미 가속 페달에 발을 올렸다.
출정의 각오를 다지느라 목소리 가다듬을 시간도 없다. 아직 가진 것보다 원하는 것이 더 많은 소년들은 그들을 대표하는 곡에서 정교하게 노래하기보다 당당하게 소리친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확성기를 달기 위해 유독 다섯 명이 함께 부르는 구간이 많아 유려한 가창을 선보이는 수록곡과 다르게 찰나의 해방을 실현했다. 트렌디한 ‘Go’나 ‘Fashion’이 아닌 DIY 정신을 가진 밴드가 할 법한 ‘What you want’가 타이틀로 낙점된 맥락도 모두 같은 선 위에 있다. 그리고 그 선 바깥에 색을 칠하는 다섯 소년은 K팝의 경계를 확장하기 위해 담장을 뛰어넘는다. (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