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을 만드는 사람들] #1 프로듀서 이해인
과연 무엇이 K팝을 정의하는가? 장르로 본다면 마땅한 해답이 없지만 산업의 관점에서 K팝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분업화’다. 관객을 바라보며 노래하고 춤을 추는 아이돌 뒤에서는 찬란한 아우라와 무대를 꾸미기 위해 노력하는 누군가가 존재한다. 앞에 나서지는 않아도 조용히 K팝을 진두지휘하는 이들을 만나고자 이즘이 인터뷰 시리즈 ‘K팝을 만드는 사람들’을 시작한다. ‘K만사’ 대망의 첫 번째 주인공은 프로듀서 이해인이다.
이해인에게는 서사가 있다. < 프로듀스 101 > 출연 연습생으로 이름을 알린 이후 프로젝트 그룹과 각종 방송을 거쳤던 이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결실을 맺었다는 이야기다. 걸그룹 키스오브라이프의 출범부터 독특한 헤드라인으로 언론에 노출된 그는 지금 보이그룹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총괄 프로듀서를 맡고 있다.
이즘이 행적만으로 이해인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다. 매년 신규 그룹이 쏟아지는 K팝 시장 안에서 틈새시장을 찾아내 대중을 공략하는 그의 기획은 지속적으로 준수한 결과물을 제시했다. 조금 더 깊숙한 대화를 나눠보고자 인터뷰로 만나게 된 이해인은 역시나 남다른 열정과 직관, 세밀한 분석력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다. 그가 앞으로 써내려 갈 이력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졌다.

과거 키스오브라이프를 맡았던 당시에는 크레이티브 디렉터라는 명칭을 사용했고 지금은 총괄 프로듀서로 클로즈 유어 아이즈를 담당 중이다. 구체적인 업무 내용이 궁금하다.
키스오브라이프 때는 프로모션 방향 등 넓은 측면에서 콘셉트를 제안하고 설득하는 사람이었다. 뮤직비디오를 드라마타이즈 형식으로 찍는 것은 어떨까 등. 지금은 내가 결정권자로서 음악적인 방향도 같이 설정하고 있다. 일의 범위가 많이 늘어났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경우는 멤버를 선출하는 < PROJECT 7 > 서바이벌 방송부터 디렉터로 출연했다. 섭외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2024년 < Lose Yourself > 활동까지 함께하며 천천히 정리하던 시기에 친한 작곡가를 통해 < PROJECT 7 > 제작사 대표를 소개받았고, 프로그램 출연 제안이 먼저긴 했으나 자연스레 그룹 디렉팅으로도 이어졌다. 한창 오디션 프로그램이 많았던 옛날부터 디렉터의 역할을 언젠가 하고 싶다는 마음을 막연히 가졌지만 아이돌의 길을 좇으면서 이제는 어렵겠구나 했다. 결국 간절하게 원하니 다 이뤄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지금이다.
K팝의 틈새시장을 파고드는 전략을 취한다고 밝혔다. 키스오브라이프와 클로즈 유어 아이즈, 두 팀을 설계할 때 가장 중점에 둔 것은 무엇인가?
일단은 멤버들에게 맞는 그림을 주려고 한다. 키스오브라이프는 멤버들이 통상적으로 예쁘장한 콘셉트가 어울리는 친구들이 아니라 생각했다. 아무리 좋은 옷이라도 체형에 맞아야 하지 않나. 대신 ‘자유’의 키워드가 부각될 수 있도록 여성 아이돌로서는 당시 흔치 않은 힙합 장르와 웨스턴 스타일을 고안했다.
키스오브라이프가 ‘마라맛’이라면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정 반대로 ‘슴슴한 평양 냉면’ 같은 팀이다. 힙합 장르의 보이그룹이 굉장히 많은 추세를 따른다면 타 그룹의 아류가 될 수 있어서 아예 배제했다. 더군다나 멤버들 마음속에도 힙합이 없는 것 같아서 힙합으로 가게 되면 크게는 멤버들의 태도나 분위기에도 제약이 가겠다 싶었다. (웃음) 대형 기획사라면 내가 원하는 바를 밀겠지만 중소 규모의 회사에서는 타겟 설정이 중요하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최근 부각되는 ‘청량’과는 또 다른 ‘서정성’을 핵심으로 두어서 더욱 인상 깊었다. 데뷔 EP < Eternalt >의 최대 주안점을 설명한다면.
플레이리스트처럼 전체로 듣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미니 앨범 치고 여덟 곡으로 많은 트랙 수도 비슷한 무드를 유지하려는 의도다. 특별하게 튀는 곡을 최대한 지양하려 했다.
과거 키스오브라이프 때도 < Born To Be XX >의 타이틀곡을 ‘Nobody knows’로 밀었고, 이번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타이틀곡 ‘내 안에 모든 시와 소설은’ 또한 굉장히 부드럽다. 이런 알앤비는 이해인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일까.
처음부터 알앤비 장르를 정해두지는 않았다. 애초에 작곡가들에게 돌리는 제안서의 주 키워드도 로파이(Lo-fi), 하우스, 북유럽 등이었다. 멤버들도 흑인 음악을 딱히 즐겨 듣는 편이 아닌데다 장르를 온전히 소화하기에는 보컬 스킬도 아직 부족해 알앤비는 오히려 덜어내려 했다. 그러나 신생 회사고 신인이다 보니 A리스트 급의 곡을 쉽게 주려고 하지 않아서 제한된 범위 안에서 고민하다 보니 이렇게 정해졌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다음 앨범에 대한 계획도 이미 있다고 밝혔는데.
콘서트나 계절에 적합한 음악으로 꾸리려고 준비하고 있다. 이번 앨범을 팬분들이 많이 좋아해주고 있지만 무대에서의 수요에 맞는 곡도 필요하다. 하나 목표가 있다면 세 번째 순서에서 사람들이 예상한 기대치를 다 틀어버리는 것. 즐거운 반전을 주고 싶다.

아이돌 연습생으로 방송에 출연해 지금은 프로듀서가 된, 흔치 않은 캐릭터다. 그동안 포지션이 많이 바뀌면서 K팝에 대한 관점도 달라졌을 것 같다.
판도 변화는 연습생 때부터 체감했다. 20대 초중반에 딱 느꼈는데, 젠더리스 패션처럼 퍼포먼스에도 여성과 남성의 구분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단적으로 걸그룹은 다 힐을 신고 춤을 췄는데 어느 순간부터 운동화를 신고 있다. 트렌드에 맞는 것을 익히지 않는다면 요즘 음악을 소화하기 어렵겠다고 직감했다.
노래를 잘한다는 것도 예전엔 고음을 쉽게 내거나 발음이 정확한 쪽이었다면 지금은 글로벌 시장으로 커지니까 오히려 굴리는 발음에 대한 선호도 생기고 있다. 영어 가사의 비중 확대도 그렇고. 라이브를 잘하는 가수와 녹음에 능한 가수가 다르다는 것을 많이 깨닫는다. ‘새로운 기본기’가 필요하다.
트렌드를 캐치하기 위한 이해인만의 전략이 있는지도 묻고 싶다.
솔직히 말하자면 트렌디한 사람은 아니다. (웃음) 주변에는 신곡을 다 듣고 매주 레퍼런스 회의를 하는 이들도 있는데 나는 그저 직관적이다. 매일 분석하면 음악에 싫증이 날 수도 있다. 프로의 자세가 아닐 수도 있지만 대중의 입장에서 음악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렇다면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는 편인가.
주변에서 힌트를 많이 얻는다. 대화를 굉장히 좋아하는 타입이라,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인생 영화나 좋아하는 가수 혹은 작곡가 등을 물어보고 나중에 싹 훑어보는 식이다. 타인이 어떤 감성을 좋아하는 지를 느끼고 거기서 아이디어도 종종 발췌한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의 차기작 콘셉트도 과거 키스오브라이프 친구들과 나눈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근래 추세에 맞게 음악이 편안한 동시에 한편으로는 한국어 가사의 비중이 높은 것이 < Eternalt >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요소다.
멤버 중에서 영어 발음에 익숙한 친구가 없다. 동양인은 대부분 앞니로 말하는데 영어는 안쪽에서 소리가 나와야 자연스럽고 매력적이다. 이런 차이를 고려해 영어 가사를 점차 줄였다. 물론 트레이닝을 받으면 영어가 익숙해질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시간도 부족했고, 지금 단계에서 가수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뽑아주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 섰다.
수록곡 중에서 ‘To the woods’는 본인이 직접 가사를 쓰기도 했다.
가장 아끼는 곡이었는데, 원하는 방향성을 작사가들에게 자꾸 요구하면 좋지 않을 것 같아 직접 쓰기로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향성인지) 약간의 섹시함이 묻어나오는 애절함과 슬픔의 감정. 방탄소년단의 ‘Save me’처럼 위로와 조언이 될 수 있는 이미지다. 안무도 그런 면을 살려서 짜려고 했다. 사실 앨범 전체적으로 가사가 처음 기획에 비해 컨셉추얼해진 편이다. 원래는 누가 들어도 내 이야기라고 느낄 수 있는 텍스트를 지향했는데 아무래도 기간에 맞춰야 하니까 지금의 형태로 나오게 되었다.
다국적 그룹인데도 가창에 걸림이 없어 놀라웠다. 프로듀싱에서 보컬은 어떻게 잡았는지.
직접 보컬 디렉팅을 보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 자연스럽고 편한, 마치 배우가 노래하는 듯한 톤을 선호한다. 절친한 관계이자 같이 작업도 많이 하는 아도라(ADORA)에게 그런 식으로 의뢰했다. 내 마음을 잘 알아서 원하는 바를 바로 끄집어줄 수 있는 친구다.
퍼포머 경험이 프로듀싱에도 반영되는 것이 있다면?
K팝이 보는 음악이다 보니 전반적인 이미지를 상상에 도움이 많이 된다. 특히 내가 어느 하나 특출난 사람보다는 넓고 얕은 지식을 지닌 유형이기도 하고. < 프로듀스 101 >에서도 최종까지 오른 이유가 올라운더 형으로 전략을 잘 짜고 캐릭터를 만든 덕분이라 생각한다. 지금도 안무 취합을 직접 하며 시상식 무대도 거시적 관점으로 기획하고 있다.

얘기를 꺼내기 미안할 정도로 꽤 지난 일이긴 하지만, K팝 산업 내에서 산전수전을 많이 겪었던 사람이다. 제3자 입장에서는 이 업계에 남아있는 것이 조금 의외였는데.
일단 나 자체가 시간이 지나면 까먹는 좀 단순한 스타일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지나간 얘기보다 미래를 바라보려고 하고, 물론 잘 안 풀렸던 시간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가 남지는 않는다. 새로운 일을 하는 것에 지난 경험이 도움을 준다는 식으로 사고하는 중이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다 ‘잠깐’이다. 주변에서 갑자기 유명해졌다가 금세 내려온 케이스를 학창시절부터 봐왔다. 아이돌로 잘 되었다고 해도 결국에는 다음을 준비해야 하는데 다른 루트로 가서 장기적인 계획을 먼저 세우는 것도 장점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음악 매체에서 K팝의 퍼포머 뒤 제작자를 많이 조명하려고 하지만, 동시에 팬덤에서는 이를 탐탁치 않아 하는 시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본인도 딜레마를 느끼는지.
나처럼 독특한 길을 거쳐서 온 사람이 별로 없고, 한국 사회 자체가 ‘언더독’ 서사를 좋아하는지라 처음에는 이전 회사에서도 나를 홍보에 어필했다. 그렇지만 내가 받는 주목이 아이돌을 능가하면 안 되기에 일할 때는 어디까지나 스태프의 역할을 다하려고 한다. 내 브랜딩을 억지로 주저하지 않되 본분을 지키면서 열심히 해야 하지 않을까.
사실 최근에도 인터뷰 요청이 계속 들어왔는데 어느 순간 계속 얘기가 반복되는 것 같기도 하고, 클로즈 유어 아이즈 멤버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동시에 내가 조명을 안 받는다 해서 주목이 친구들에게 갈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다 떠나서 그래도 이즘 인터뷰까지는 꼭 하고 싶었다. (웃음)
궁극적으로 이해인이 생각하는 좋은 제작자란 무엇인가.
아이돌이 굉장히 불안정한 직업이다. 직업이라고 말하기도 조금은 애매할 정도다. 월급을 받는 스태프 입장에서 이 친구들이 돈을 벌게 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아이돌을 만들 수 있는 것도 다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나온 자본 덕분이다. 힘들게 벌고 결단을 내려서 우리가 투자금을 받은 것이니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해인을 롤모델로 생각하고 있을 미래의 K팝 산업 종사자들에게 조언을 남긴다면.
인생에 정답은 없겠지만 꼭 하나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세상에 도와달라 하면 도와주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도와달라는 말을 잘 못하는데, 이 또한 연습으로 길러야 하는 능력이다. 모르면 어른들을 찾아가서 알려달라고 요청하자. 기회는 그 과정에서 찾아온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도 대단한 실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타인에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많이 소통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계획을 살짝 알려줄 수 있나.
도전적인 일을 계속 할 예정이다. 버추얼 아이돌, 밴드 팀, 그리고 해외 글로벌 시장을 타겟으로 둔 그룹 등. 기존의 틀에 갇히지 않는 실험이 될 것 같다.
마지막은 이즘의 공식 질문이다. 이해인을 음악의 세계로 인도한 인생 음악과 음반 혹은 아티스트를 말해달라.
노래로 간다면 영화 < 주홍글씨 >(2004)에서 배우 故이은주가 부르기도 했던 아일랜드 밴드 코어스(The Corrs)의 ‘Only when I sleep’이다. 어릴 때 아버지가 TV 시청을 금지하셔서 대신 몰래 라디오에 이어폰을 꽂았다. 그때 들은 < 보고 싶은 밤 > 프로그램에서 접한 곡으로 내가 선호하는 음악이 마이너 코드의 어둡고, 또 위로해주는 감성임을 느꼈다. 나중에 입시에서도 이 노래를 불렀다.
아티스트는 롤러코스터. 한 장만 뽑기 어려울 정도로 모든 앨범을 다 좋아하고 처음 나온 지 시간이 지난 지금 들어도 정말 세련된 음악이다. 나중에 들으면 촌스러운 노래도 있는데 롤러코스터는 정말 계속 듣게 되는 매력이 있다. 덧붙여 말하자면 롤러코스터의 멤버 지누 선배 쪽과 친분이 있어서 자연스레 뮤지션으로 활동하는 딸 진초이(ZIN CHOI)와도 아는 사이인데, 이 친구의 능력이 정말 비범하다. 디제잉에 작곡도 하고, 그림도 그리는데 심지어 악기까지 다룬다. 꼭 만나보셨으면 좋겠다.
진행: 한성현, 손민현, 임선희, 박시훈
사진: 임선희
정리: 한성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