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무현 인터뷰
손무현
연기파 케빈 베이컨이 몇 작품만 건너면 대부분 할리우드 배우와 연결된다는 “케빈 베이컨 법칙”처럼 1990년대 가요 르네상스엔 “손무현 법칙”이 있다. “내가 거장은 아닐지언정 수많은 거장과 함께 음악한 건 맞다”며 겸손을 표한 그는 윤상과 장혜진부터 거목 한대수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작품에 이름을 아로새겼다. 국산 메탈 밴드 외인부대의 기타리스트로 경력을 끊은 그는 품고 있던 팝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세련된 가요 작가로의 전환을 알렸다. 1990년도 공전의 히트작 김완선 <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의 프로듀싱과 1999년 < 주유소 습격사건 > 영화음악으로 음악적 지평을 넓혔다.
서른일곱 비교적 젊은 나이에 한양여자대학교 실용음악과 교수로 부임한 십수 년 교육과 음악을 병행했다. 이태윤, 장혁 등 오랜 동료와 합작한 마스터포와 “제자들과 음악 하고싶다”란 마음으로 결성한 팀 손에서 교육자와 음악가 정체성이 공존했으며 매해 색다른 구성과 음악 스타일을 선보인 팀 손은 “팀 손 2025”로 하반기 음원 발매를 계획중이다. “거대 기획사가 닿지 않는” 연주인과 독립 음악가들을 위한 음악 행정의 꿈을 표출한 그의 눈빛은 1990년대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근황은 어떠한가?
지금은 교육자라고 봐도 좋다. 2004년경 이오에스(EOS) 엔터테인먼트라는 녹음실과 기획사를 운영하던 중 한양여자전문대학교에서 실용음악과 초대 교수로 모시고 싶다는 전화가 왔다. 2003년 그 제안에 승낙했고 2004년 첫 학기부터 실무에 돌입했다.
교수 생활이 벌써 스물두 해다.
물론 2~30대처럼 하루 종일 녹음, 세션 작업은 어렵지만 교수로서도 음악 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다. 실용음악과 교수에게 매년 요구되는 “업적”이 음반 발표이며 정규 앨범까진 아니더라도 간간이 싱글 발매와 관련 공연을 지속했다. 음악 생활 20년 넘어가면서 “손무현”이란 이름이 지겨워졌다. 결국 나 혼자 음악하는 게 아니라 자각했고, 동료와 협업했던 과거와 달리 제자들과의 협업을 “팀 손(Team Sohn)”이라고 명명했다.
음악을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우선 친누나 세 명이 다 클래시컬 뮤직, 특히 관악기를 수학했다. 부모님께서 나에게는 음악을 공부시키지 않았지만, 초등학교 5~6학년쯤 비틀스와 아바에 빠져들었고 중학교 짝꿍 녀석 집에 놀러 가서 처음 본 일렉트릭 기타에 홀딱 반했다. 아마 짝퉁 펜더 스트라토캐스터가 아니었나 싶다. (웃음) 전기기타를 통해 내 안의 음악 열정을 느꼈고 학원 대신 귀동냥 독학으로 연습에 매진했다. 당시 명동 중국 대사관 앞에서 일본 원서로 쓰인 잡지와 악보를 팔았다. 그 책들을 통해 나름의 저변을 넓혔다.
같이 스쿨밴드 하던 현역 드러머 장혁이 어느 날 신중현씨 둘째 아들이 친 기타라며 녹음 테이프를 들려줬다. 그 때까지만 해도 갖고 있던 “강남에선 기타로 내가 좀 먹어주지!”라는 생각이 깨져버렸고 100만볼트 전기 충격파가 머리를 팡 때리는 기분이었다. 테이프의 주인공 신윤철과 친해지며 자연스레 신중현 선생님 댁에 드나들게 되었다. 기타 대신 컴퓨터로 작업하는 모습이 생경했는데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김완선 ‘리듬 속의 그 춤을’ 트랙을 미디로 찍고 계셨다. 1984-85년경 이야기다.
신대철은 너무 위대한 형이었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도 없던 시절, 실존이 내 앞에서 연주하는 모습에 “실화야?”를 외쳤다. 우상으로 삼은 그를 카피하고 또 카피했다. 매일 그를 볼 수 있어 행복했다.
그렇다면 본격적 경력의 시작은 무엇인가?
신중현 선생님께서 운영하던 이태원 “라이브”라는 클럽에서 굵직한 이름과 조우했다. 백두산 기타리스트 김도균 씨와 김종서 형, 들국화에서 기타 쳤던 최구희 모두 그 클럽을 거쳐 갔다. 미성년자였지만 운 좋게도 낮에 대 라이브에서 연주할 기회를 얻었고 난다긴다하는 형들의 음악성을 흡수했다.
신중현 선생이 이태원 태평극장을 인수해 “록 월드(Rock World)”라는 5~600석 규모의 공연장으로 리모델링했다. 신윤철의 친구였던 나는 공연장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신대철 형 대타 격으로 여러 형들과 합주했다. 1986년 시나위 1집 < Heavy Metal Sinawe > 대표곡 ‘크게 라디오를 켜고’와 ‘남사당패’를 이미 1985년에 들었다. “카피 곡 아닌 오리지널을 써야겠다”란 의지를 품은 것도 시나위 덕이었다.
외인부대 곡 작업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부활 출신 기타리스트 이지웅과 시나위의 임재범 등이 모여 1987년경 조직한 외인부대는 1988년 1집을 냈다. 요즘 석 달에 걸쳐 할 일을 사흘에 다 마칠 만큼 말도 안 되는 리코딩 일정이었다. 임재범의 일탈로 외인부대 1집 활동은 흐지부지 끝났고 같은 해 11월에 나온 2집은 이지웅 체제에 박문수가 보컬로 참여했다.
사실 상당히 기형적인 밴드로 사실상 “임재범과 외인부대”라고 봐도 무방하다. 시나위 때 주도하지 못했던 각종 음악적 특성을, 외인부대를 통해 풀어낸 것이다. 나머지 멤버들은 연주로 뒷받침해 줬고. 곡도 임재범의 보컬 멜로디가 주였다. 옆에서 연주자들이 잘 달궈주면 멜로디를 기가 막히게 뽑는 보컬이다. 노래야 뭐, 두말할 나위 없이 대단했고. 아, 기타는 내가 이지웅보다 조금 더 앞에 나섰다. 55대 45 정도로. (웃음)
메탈에서 가요로의 전환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
외인부대 때부터 “음악으로 돈을 벌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마침 “기본적으로 록 기타리스트지만 멜로디도 잘 푸는 연주자”라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신세계 음향에서 한대수 신작의 기타 세션 요청이 들어왔고, 일주일간 작업한 게 1989년 작 < 무한대 >다. A사이드는 송홍섭과 이병우 등 이미 경력이 충분한 음악인들이, B면엔 손무현과 김민기(드럼), 김영진(베이스)등 신진 연주자를 기용했다. 메인스트림 음반사 발매작의 프로덕션에 참여함으로써 가요계 이름을 알리는 스타트가 된 중요한 시점이다.
그 작업을 통해 송홍섭 눈에 띄어 1990년 발표된 오석준-장필순-박정운 일명 “오장박” 1집에 기타 연주로 참여했다. 1989년도 영화 < 굿모닝 대통령 >에도 삽입된 ‘내일이 찾아오면’이 유명한 음반이다. 그 때부터 전문 세션맨으로 기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돈의 맛을 알게 되었다. (웃음) 번 돈으로 악기를 맘껏 살 수 있어 행복했다.
무조건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히트곡을 써야지”란 마인드는 아니었지만 하드록, 헤비메탈을 좋아한다고 해서 기타 솔로를 10분 늘려서 하는 식의 과도한 자기 주장도 선호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계획적으로 풀어가는 음악, 절제의 미를 높이 산다.

본격적인 프로듀서의 계기는 무엇인가?
쿨과 터보 같은 댄스 뮤직을 주로 작사했던 이승호로부터 “김완선 신보에 밴드가 필요하다” 제안이 왔다. 당대 최고 여가수와의 협업에 월급까지 준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그렇게 윤상과 함께 조직한 김완선 백밴드가 실루엣이다. ‘이 세상 슬픈 가운데’와 ‘기분 좋은 날’이 수록된 4집 < KIM WAN SUN Vol.4 >도 실루엣으로 홍보했다.
당시 김완선 제작자이자 친이모였던 한백희의 눈에 들어 실루엣 활동 종료 후 재계약 시점에서 새 음반의 작곡 의뢰를 받았다. 작곡 경험은 거의 없던 터라 당황했지만 막상 한백희 사장에게 전달한 곡이 평가가 좋아 아예 김완선 살던 집 2층을 스튜디오로 만들어 거기에 기거하며 곡 작업에 매진했다. 그 때 처음 쓴 곡이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다.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가 이렇게 잘 될 줄 알았는가?
취입 당시엔 “사고만 안 쳤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하늘 같은 선배들 포함 김완선에게 곡을 주려는 음악가들이 줄을 서 있었고 그들 중에서 선택받은 게 아닌가. 김완선이 방송 활동을 하는 동안 작곡 파트너 형과 열심히 작업한 트랙을 방송 활동을 마친 김완선이 불러보는 방식이 1988년 말부터 1990년 초까지 2년 가까이 이어졌다.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는 이젠 내 곡이 아닌 것만 같다. 의지와 관계없이 어디서든 불리고 오디션 프로그램 < 내일은 미스트롯 > 을 비롯해 선후배들의 리메이크도 잦다. 저작권은 나에게 있지만 내 손을 떠난, 대중의 곡이 된 것 같다.
1990년대 가요계 아이콘인 서태지와 신해철과도 협업했다고.
서태지와 아이들 ‘난 알아요’ 기타 트랙을 녹음했다. 열 번가량 친 것 같다. 크레디트에 적혀 있지 않다면 서태지 본인이 직접 쳤거나 신대철 형 버전을 사용했을 테다. 신해철은 미워할 수 없는 열정의 소유자며 많은 사람들이 천재로 인식하지만, 사실 재능보다 노력이 컸던 노력파다. ‘안녕’과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가 수록된 1990년 1집에 ‘아직도 날 원하나요’ 속 기타를 연주했다. 해철이가 밴드 하자고 제안하기도 했지만, 당시에 내 눈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음악을 너무나 사랑했던 해철이와는 아름다운 기억밖에 없다.
영화 음악도 했다.
2~3년 가요 작·편곡 및 프로듀싱을 열정적으로 하다 보니 어느 날 ‘왜 내 음악이 4분짜리 규격에 머물러야 하나?’ 의문과 회의가 들었다. 음악적 폭을 더 넓히려는 와중에 어느 제작자의 요청으로 당시 붐이 일던 드라마 OST를 맡게 되었다. 그게 바로 장동건이 주연한 드라마 < 우리들의 천국 >이었다. 내가 작곡하고 박주연이 가사를 쓴 이주원의 ‘아껴둔 사랑을 위해’가 큰 사랑받았고 특히 군 장병이 즐겨 불렀다. 배우 장동건이 직접 부른 ‘너에게로 가는 길’도 내가 썼다.
1996년 박상민, 박중훈 주연의 < 깡패수업 > 스코어를 만들었다. 여기서 김상진 감독과 인연을 맺어 1999년에 < 주유소 습격사건 >부터 < 광복절 특사 >(2002) <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 >(2007)같은 시네마 서비스 계열 영화들을 쭉 맡게 되었다. 덕분에 충무로에서 꽤 이름난 영화 음악가가 되었다.
한동안 가요계와는 왜 멀어진 것인가?
1993년쯤 변화한 가요계에 좌절했다. 터보와 알이에프, 룰라와 노이즈 등 댄스 뮤직의 대세는 내가 사랑했던 가요 판과 달랐다. 마치 표정을 싹 바꾼 채 “누구세요” 정색하는 느낌이었다. 물론 나도 1990년대 미디 작업은 했지만 역시나 밑바탕엔 밴드와 연주가 있는 사람이다 보니 그런 기본 없이 마구잡이로 찍어내고 양산하는 음악에 회의를 느꼈다. 그래서 영화 음악판에서만 10여 년 머물렀다.
1990년 윤상 1집이 100만 장 대박이 났고 돌아가신 한백희 여사도 나에게 은근한 자신감을 불어넣어 줬다. 전문 보컬리스트가 아니기에 가창을 더 다듬어야 했으나 빡빡한 일정으로 인해 그러지 못했다.
윤상과 함께한 ‘처음부터 사랑한 나’와 ‘바다로 간 너는’ 같은 솔로 시절 곡들이 시티팝으로 조명받았다.
나와 김현철, 윤상 같은 1990년대 가요 작가들이 미국 AOR이나 일본 시티팝 같은 세련된 음악을 좋아했고 그걸 레퍼런스 삼은 곡들도 더러 있었다. “한국 시티팝”이란 표현이 자연스러운 이유다.
신대철만큼 충격을 안겨준 음악인이 윤상이다. 이미 집에 미디를 비롯한 각종 전자악기를 구비해놓고 혼자 프로덕션을 할 수 있는 준비된 음악인이었다. 록 이외의 팝도 좋아했던 나와 음악적 코드도 맞았고 이 친구랑 함께라면 음악적으로 발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20대 음악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윤상 1집과 2집을 거의 함께 살면서 만들 만큼 참여도가 높았다.
솔로 1집과 2집 중에서 각별한 곡이 있다면?
1집에 ‘아침을 기다리는 새벽’이란 연주곡이 있다. 조금 더 가다듬었으면 좋았겠지만 클래식 기타를 담은 특별한 곡이다.

메탈 기타리스트에서 가요 음악 작가로의 전환이 놀랍다.
그룹사운드 시절 “메탈 형님들”로부터 배신자 소리 많이 들었다. (웃음) 지금도 마이클 솅커 그룹과 데프 레파드, 에이씨디씨(AC/DC)를 즐겨 듣지만 헤비메탈이라서 좋다기보단 그들의 음악 자체가 뛰어나서 좋은 것 같다. 꼭 헤비메탈의 틀에 가둬서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더블 트러블과 마스터포 시절도 궁금하다.
‘시행착오’와 ‘바다로 간 너는’ 메들리 후반부 기타 솔로는 지금 치라고 하면 절대 못 칠만큼 나름 기술적이었다.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서 건반을 연주했던 황세준과 플라워의 멤버였던 김우디, 죽마고우 장혁과 함께한 1995년 < Old & New >가 유일작이다. 마스터포는 ‘Shine’에 참여한 조범진 덕에 결성된 밴드다. 기타 및 퍼포먼스가 실로 대단한 조범진이 자극이 되어 이태윤과 장혁을 설득해 ‘예의범절’과 ‘물 흐르는 대로’를 수록한 2013년도 음반 < Synergy > 발매 후 약 1년간 활동했다. 연주 중심의 재즈 퓨전을 구사했다.
제자들과 결성한 팀 손(Team Sohn)도 음악색이 다변적이었다. 평소 좋아하던 시티팝에 힙합 비트와 알앤비 등 현대적인 네오소울을 도입했다. ‘Wanna be free’와 작년에 나온 싱글 ‘Shine’을 추천한다. ‘Shine’에 참여한 조범진은 실로 대단한 음악가다. 일반 교수들이 논문 쓰듯 나에겐 음원과 음반이 교수 업적이기에 안 잘리려면 잘 해야 한다. (웃음)
언젠가 3집을 기대해 볼 수 있을까?
명의만 다를 뿐 팀 손을 손무현 디스코그래피의 연장선으로 봐도 무방하다. 솔로 시절 내 입김이 8할이었다면 제자들과의 콜라보레이션에선 6할 정도로 감소할 뿐이다. 결국 방향성과 최종 결정은 내 몫이기에 프로듀서도 겸하고 있다.
프로듀서로서 특히 아끼는 작품이 있다면?
서비와 청안으로 이뤄진 듀오 캔디맨이란 팀이 2001년 발표한 ‘일기’란 곡이다. < Friday Morning >이란 음반이 전체적으로 우수하지만 상업적으론 실패하고 말았다. 기타 세션과 프로듀싱을 도맡은 한대수의 2000년 정규 8집 < Eternal Sorrow >도 재평가가 시급하다. (웃음)
1989년 < 무한대 >가 쫄딱 망하고 한동안 음반 발매에 어려움을 겪었다. “내가 책임질 테니까 한대수씨 음반 하나 제작하자”라고 여러 음반사에 연락을 돌렸다. 그 중 한군데가 승낙했고 내가 총대를 매서 한달정도 작업한게 < Eternal Sorrow >다. 인간적으로는 미국 맨해튼에서 수학한 피아니스트 이우창과 더 가깝지만 나도 음악적으로는 한대수와 교류가 매우 지대했다.
무려 한대수인데도 받아주는 곳이 없어 신보 제작에 난항을 겪었다. “손 박사, 사람들이 다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 다시 미국 돌아갈래” 전화 왔을 정도다.
손무현에게 음악적 영감을 준 아티스트 혹은 음반이 있다면?
해외에선 ‘Africa’와 ‘Rosanna’가 들어간 토토 < Toto IV >와 일본 그룹 안전지대를 꼽고 싶다. 안전지대는 기술적으로 뛰어나진 않지만 타마키 코지를 필두로 네 명이 똘똘 뭉쳐 그야말로 “밴드적인” 하모니를 낸다. 그들의 감성도 독보적이고. ‘서울 서울 서울’과 ‘모나리자’가 수록된 1988년 조용필 정규 10집도 영향이 컸다. 미국 프로듀서 초빙으로 세련미와 완성도를 높인 작품이다.
앞서 언급했던 토토의 스티브 루카서도 물론 대단했고, 십 대 시절 동경했던 기타리스트로는 마이클 솅커와 신대철을 들고 싶다. 1977년도 음반 < Lights Out >의 유에프오(UFO) 시절부터 우러러봤고 ‘Armed and ready’와 ‘Lost horizons’가 수록된 1980년 작 < The Michael Schenker Group >의 대부분 곡을 따라 연주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학창 시절 헤비메탈에 푹 빠졌다가 20대에 토토 4집과 ‘Rosanna’를 통해 “메이저 그라운드가 요구하는 음악은 이런 방향으로 가야하는구나”를 절감하게 된 것이다.
진행: 염동교, 신동규, 한성현